“제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돌아봐 다오. 네가 원한다면 황태자비의 자리가 아니라, 황후의 왕관이라도 네 머리에 씌워주마. 로렌 공작가도, 황실도 전부 네 발밑에 꿇리겠다. 그러니……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엘리시아……!”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부짖는 제국의 황태자, 유진 알베르트의 비참한 통곡이 화려한 침실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그의 손끝은 절박하게 엘리시아의 얇은 실크 잠옷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썩어가는 동아줄이라도 잡은 조난자처럼, 그의 어깨는 사정없이 이지러졌다. 한때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미소로 그녀의 시한부 삶을 비웃던 남자의 얼굴은 이제 눈물과 흙먼지로 얼룩져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엘리시아는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제 발끝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의 감촉을 음미했다. 가느다란 발가락 끝으로 유진의 젖은 이마를 툭, 밀어내는 감각은 묘하리만치 감미로웠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영혼을 바치는 집착과 굴복 감지!] [대규모 포인트 결산 시작: +2,500,000p!] [황실 무제한 보증 담보 문서의 동기화율이 45%를 돌파합니다. 제국 황실 재정의 지분 일부가 사용자에게 이전됩니다!]
머릿속을 가르는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장부의 숫자가 미친 듯이 차올랐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희열은 지독한 독약의 고통마저 감미로운 마취제로 바꾸어 놓았다. 엘리시아는 길게 속눈썹을 내리깔며, 침대 곁을 엄호하듯 서 있는 북부 대공을 바라보았다.
칼릭스 카이엔.
그의 검푸른 제복 깃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살기가 유진의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황태자의 목을 베어 수급을 취하고 싶다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두 남자의 숨 막히는 침묵 사이에서, 엘리시아는 오직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극락의 도파민을 한껏 들이마셨다.
***
그 소란스러운 밤으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오후.
황실 사법 전각의 대심문실은 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청회색 대리석 벽면에는 제국 초대 황제들의 엄숙한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황실 고문관들과 고위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숨을 죽였다.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방 중앙에 길게 놓인 흑단목 심문탁이었다.
탁자의 상석에는 황태자 유진이 앉아 있었다. 반나절 전의 비참하게 울부짖던 모습은 간데없이, 황실의 위엄을 억지로 기워 붙인 은색 제복을 입은 채였다. 하지만 그의 창백한 안색과 잘게 떨리는 손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유진의 초조한 시선은 오직 한 곳, 아직 비어 있는 맞은편 좌석만을 향했다.
쾅.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리며, 차가운 한기가 심문실 내부로 밀려들었다.
모든 이들의 숨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문틀을 넘어 걷는 엘리시아의 모습은 마치 밤의 장막을 찢고 나타난 여신과도 같았다.
그녀는 상복을 연상시키는 극도로 화려한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흑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수놓아져 있었고, 가느다란 목덜미에는 붉은 루비가 핏방울처럼 맺혀 있었다.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다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뺨은 기이할 만큼 생기로 가득 차 장미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북부의 지배자, 칼릭스 대공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칼릭스는 정중하면서도 지극히 소유욕이 묻어나는 손길로 엘리시아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아 에스코트했다. 그의 장갑 낀 손이 엘리시아의 살결에 닿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아…….’
엘리시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찌릿한 고통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칼릭스의 체내 깊은 곳에 뼛속까지 시려 오는 마기의 핵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그 거대하고 난폭한 마기가 엘리시아의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격렬하게 공명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을 알아본 맹수처럼, 칼릭스의 차가운 마기가 그녀의 영혼 속으로 빨려 들어와 장부의 포인트로 환산되었다.
[북부 대공 칼릭스 카이엔의 마기 공명 감지!] [체온 접촉을 통한 마기 정화 및 에너지 흡수 완료!] [포인트 추가 획득: +500,000p!] [현재 수명 상태: 안정(보유 수명 120일 돌파)]
창백하던 칼릭스의 안색에 미미한 온기가 돌았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짙은 집착으로 번뜩였다. 엘리시아는 그의 품에 몸을 살짝 기대며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이 남자의 마기는 자신을 살리는 가장 완벽한 영양분이었고, 동시에 황실을 파멸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칼릭스는 빼어난 몸짓으로 엘리시아를 위해 흑단목 의자를 빼주었다. 엘리시아는 물 흐르듯 우아하게 의자에 가라앉았다.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녀의 태도는 심문을 받으러 온 피의자가 아니라, 신하들의 조아림을 받는 황후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시작하지.”
유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의 눈동자는 칼릭스의 손길이 닿았던 엘리시아의 허리춤에 고정되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질투와 후회로 타들어 가는 그의 심장 소리가 심문실 안을 메우는 듯했다.
탁자 맞은편, 쇠사슬에 묶인 채 초라하게 서 있던 이자벨라 빌리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화려하던 금발은 헝클어져 어깨 위로 지저분하게 흘러내렸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탐욕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황태자 전하! 억울합니다! 저 악독한 년이…… 엘리시아가 스스로 독을 마시고 저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저 고결한 체하는 얼굴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를 밝혀주십시오!”
이자벨라가 쇠사슬을 요란하게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대리석 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증거라고 내놓은 시녀의 증언 따위는 전부 조작된 것입니다! 북부 대공의 무력에 굴복해 거짓을 고한 야만적인 협박일 뿐이라고요!”
그녀가 손가락질하며 발악하는 동안, 심문실 안의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북부의 기사들이 시녀를 심문해 얻어낸 자백은 절차상 황실 법전의 기준에 어긋날 여지가 있었다. 이자벨라는 그 틈새를 노려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차가운 은제 찻잔을 손끝으로 톡, 톡 두드릴 뿐이었다.
정적.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심문실을 지배했다. 엘리시아의 침묵은 이자벨라의 절규를 한낱 광대의 몸짓처럼 가볍고 수치스러운 소음으로 격하시켰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려 제 옆에 우뚝 선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칼릭스는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엘리시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덮어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대공의 묵직한 냉기가 엘리시아의 체온과 부딪쳐 기묘한 불꽃을 일으켰다. 대공의 체내 마기 핵이 또다시 공명하며 웅웅거리는 진동을 만들어 냈다. 두 사람만의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손짓 교감은 황태자 유진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행해졌다.
“끄윽…….”
유진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숨결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여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의 온기를 탐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 고스란히 장부에 기록되었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질투 및 절망 감지!] [포인트 실시간 환산: +150,000p!]
이자벨라는 엘리시아의 철저한 무시와 대공과의 다정한 교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문실 안의 공기는 이자벨라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가 되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며, 엘리시아의 여유는 확실한 패를 쥐고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왜…… 왜 말이 없어! 엘리시아 로렌! 네가 정말 떳떳하다면 내 눈을 보고 말해봐! 네가 그 천한 시녀를 매수한 게 아니라고 증명해 보란 말이야!”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그녀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초조함에 질려 제풀에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증명이라.”
마침내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흑단목 탁자 위에 두 손을 모아 올린 그녀의 모습은 지극히 우아했다.
“이자벨라 영애. 그대는 내가 시녀 클라라를 매수해 거짓 증언을 시켰다고 주장하는군요.”
“그래! 당연하지! 네년이 북부의 힘을 빌려 불쌍한 시녀를 협박한 게 분명해!”
“참으로 안타까운 지능이군요.”
엘리시아가 나직하게 실소했다. 그 조소 섞인 미소에 이자벨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내가 굳이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대가 로렌 공작가의 타락한 시녀를 매수하기 위해 ‘어디서’ 자금을 융통했는지, 그리고 그 독약을 ‘누구에게’ 구매했는지…… 그 기록이 이미 내 손에 있는데 말입니다.”
“무,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작고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금박이 군데군데 벗겨진, 제국 암시장의 악명 높은 독약 상인이 사용하는 비밀 거래 장부였다.
탁.
엘리시아가 수첩을 흑단목 테이블 중앙으로 툭 던졌다. 수첩이 미끄러져 유진의 손끝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 수첩의 백사십이 페이지를 펼쳐 보시지요, 전하.”
유진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수첩을 펼쳤다. 그의 시선이 누렇게 바랜 종이 위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에서,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굳어 버렸다.
“이…… 이것은…….”
“제국 암시장의 거물, ‘바실리’의 비밀 장부 잔해입니다. 이자벨라 영애가 로렌 가문의 시녀 클라라를 매수하기 위해 지불한 황실 인장이 찍힌 금화의 일련번호, 그리고 시한성 지연 독약인 ‘검은 과부의 눈물’을 구매한 날짜와 서명이 고스란히 적혀 있지요.”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것은 이자벨라가 완벽하다고 믿었던 거래의 흘려진 잔해였다. 엘리시아가 세바스티안을 통해 미리 손에 넣어두었던, 이자벨라의 목을 단숨에 벨 수 있는 단 하나의 완벽한 단두대였다.
“아, 아니야! 그건 위조된 거야! 난 그런 장부 같은 건 모른단 말이야!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이자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탁자로 달려들려 했지만, 북부의 기사들이 무자비하게 그녀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꿇렸다.
“모른다고 하기엔, 그 장부에 적힌 지불 대금의 출처가 너무도 명확하군요.”
엘리시아가 조용히 유진을 응시했다.
“그 금화들은 황태자 전하께서 이자벨라 영애에게 하사하신 사가(私家)의 특별 예산이더군요. 황실의 인장이 찍힌 금화가 암시장의 독약 상인 금고에서 나왔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물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문실 안이 발칵 뒤집혔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되어 이자벨라를 덮쳤다. 황태자의 돈으로 독약을 사서 공작가의 영애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치정극을 넘어 황실이 공작가를 시해하려 했다는 반역의 혐의로 번질 수 있는 중죄였다.
유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이 이자벨라에게 주었던 사랑의 징표들이, 결국 엘리시아의 목숨을 겨누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죄책감과 절망으로 메어 왔다.
“이자벨라 빌리에.”
유진이 피를 토하듯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전하! 아닙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전하를 위해…… 저는 오직 전하를 위해……!”
“입 다물라!”
유진의 고함이 심문실을 울렸다. 그의 눈에는 이제 이자벨라를 향한 가차 없는 혐오만이 가득했다. 이 여자가 자신과 엘리시아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은 원흉이었다.
“사법관은 들으라.”
유진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판결을 내렸다.
“죄인 이자벨라 빌리에는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고, 로렌 공작가의 영애를 독살하려 한 반역적 음모가 명백하므로…… 즉시 빌리에 자작가의 가문 서열에서 제외하며, 영지 박탈 및 변방의 광산령으로 평생 유배형에 처한다. 또한 그녀의 신분을 평민 이하로 강등한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무자비한 판결이었다. 사교계의 꽃을 꿈꾸던 공작가의 가짜 영애가, 한순간에 변방의 차가운 돌바닥을 기는 광산 노예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악! 안 돼! 전하! 제발! 엘리시아, 이 살인마 같은 년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나를……!”
이자벨라는 미친 여자처럼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실성한 듯 울부짖었다. 그녀의 손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핏자국을 남겼지만, 북부의 기사들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질질 끌고 심문실 밖으로 나갔다.
멀어져 가는 이자벨라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회랑을 따라 길게 메아리쳤다.
심문실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유진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있었다. 흑단목 탁자 위로 떨어지는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검은 드레스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받아 눈부시게 부서졌다.
그 순간, 유진은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지독한 질식을 느꼈다.
자신이 가차 없이 버렸던 그 가냘픈 장미는, 더 이상 제국의 황실이나 사교계의 얄팍한 규칙 따위에 통제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저 높은 곳에서 제국 전체를 내려다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북부의 거대한 괴물이 버티고 서 있었고, 그녀의 손끝 하나에 황실의 재정과 권력이 춤을 추고 있었다.
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후회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엘리시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절망적인 눈빛을 아주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의 파멸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릭스의 단단한 팔에 다시 한번 손을 얹었다. 차가운 마기의 공명이 그녀의 온몸을 짜릿하게 관통했다. 더할 나위 없는 극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심문실의 닫힌 문이 다시 한번 거칠게 열리며,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붉은 인장이 찍힌 전령의 서신이 유진의 탁자 위로 떨어졌다. 서신을 확인한 유진의 눈동자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악으로 거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