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날카롭고 파괴적인 마찰음이 황실 정원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분노로 뒤덮여 이자벨라의 뺨을 거칠게 후려쳐 버리는 유진의 광기 어린 몸짓 속에서, 엘리시아는 실신한 척 칼릭스의 품에 안겨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유진의 손때가 묻어 붉게 부어오른 이자벨라의 뺨과, 제 손바닥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부들부들 떠는 유진의 일그러진 안색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신감과 뒤늦은 자책으로 얼룩진 황태자의 얼굴은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 추악하고 소란스러운 파국을 관조하며,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차갑고도 묵직한 대공의 체온이 살결을 타고 흐르는 순간, 귓가를 때리는 장부의 경고음은 가혹하리만큼 달콤했다.
[경고: 북부 대공 '칼릭스 카이엔'의 체내 마기 핵이 비정상적으로 공명하고 있습니다.] [대공의 마기 흡수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하여, 장부의 '비밀 숨겨진 조항'이 활성화됩니다.]
칼릭스의 심장 부근에서 전해지는 기묘한 고동은 단순한 박동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뼈 아래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검고 무거운 마기의 핵이, 엘리시아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미친 듯이 공명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마침내 제 짝을 찾아 울부짖는 듯한, 격렬하고도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제아무리 황실이 날뛰고 전 약혼자가 절망에 겨워 바닥을 기어 다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장부에 기록되는 천문학적인 포인트와 대공의 품 안이라는 완벽한 안식처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진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공작가의 엄숙하고 턱 막히는 침실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최고급 사마르칸트산 실크로 짜인 푸른빛 캐노피였다. 은실로 촘촘히 자수 놓인 설산의 문양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비릿한 피비린내가 아닌, 은은하고 청량한 백합 향과 쌉싸름한 홍차 향기였다.
“정신이 드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 카이엔은 상아색 차이나 칼라 셔츠의 깃을 가볍게 풀어헤친 채, 우아하게 은제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간밤의 서슬 퍼런 살기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열망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공 전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오자, 칼릭스는 주저 없이 잔을 내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리시아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감각이 밀려들며 온몸의 열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열은 내렸군. 그 독차를 마셨을 때는 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엘리시아.”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제가 부서지진 않아요.”
엘리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태연한 태도에 칼릭스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이내 그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네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어. 이자벨라 빌리에는 간밤에 황궁 기사단에 의해 지하 감옥으로 투옥되었다. 황태자가 직접 서명한 체포령이었지. 감히 공작가의 영애이자 대공의 연인에게 독을 쓰려 한 죄, 사지가 찢겨 나가도 모자랄 죄목이다.”
“예상보다 유진의 움직임이 빨랐네요. 이자벨라가 사교계에서 완전히 격리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죠.”
엘리시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자벨라가 몰락할수록, 그리고 그녀를 제 손으로 처단했다는 자책감에 유진이 괴로워할수록 장부의 숫자는 멈추지 않고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이자벨라가 저지른 죄의 대가는 온전히 치러지지 않았다. 그녀가 로렌 가문의 타락한 시녀를 매수해 특수 지연성 독약을 구매했던 그 비밀 장부의 흘려진 잔해들이, 여전히 엘리시아의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황실 다도회라는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그것을 터뜨릴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도파민으로 요동쳤다.
그때, 칼릭스가 엘리시아의 턱끝을 부드럽지만 단단한 손길로 쥐어 올렸다.
“그 영리한 머릿속으로 또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 거지?”
“글쎄요. 어떻게 하면 더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저들을 파멸시킬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악마 같은 여자군.”
칼릭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의 눈빛이 극도로 위험하게 가라앉으며, 상체를 굳게 밀착해 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마기가 엘리시아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 순간, 지침에 새겨진 본능이 깨어났다. 엘리시아는 저항하는 대신, 슬며시 손을 뻗어 칼릭스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화르륵!
단순한 접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릭스의 체내 마기 핵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가슴속에서 억눌려 있던 차가운 폭풍이 엘리시아의 손끝을 타고 그녀의 영혼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기가 정화되며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황홀경에 젖어 가늘게 떨렸다. 이 부동의 친화 특성, 오직 엘리시아만이 그의 마기를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하아…….”
칼릭스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엘리시아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하얀 살결 위로 뜨겁고도 깊은 입맞춤이 새겨졌다. 자극적인 통증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짜릿하게 전율했다.
“이제 단순한 계약 연애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칼릭스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붉은 낙인이 찍히는 것만 같았다.
“내 진짜 반려가 되어라, 엘리시아. 북부의 모든 권력과 내 목숨까지 전부 네 발밑에 바칠 테니.”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공이 제안하는 완전한 굴복. 일반적인 영애라면 그 달콤한 고백에 심장을 빼앗겼겠지만, 엘리시아는 차가운 회계사처럼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대공의 반려라는 지위, 그리고 그가 가진 막대한 마기 자원…….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지.’
그녀는 칼릭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좋아요. 하지만 전 아주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여자랍니다, 전하. 제 요구를 감당할 준비를 하셔야 할 거예요.”
“얼마든지. 네가 원한다면 황실의 보물고를 통째로 털어 네 침실에 깔아주마.”
칼릭스의 눈에 서린 소유욕은 지극히 탐미적이고 잔혹했다. 엘리시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슬며시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파스스슥.
허공에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황금빛 장부가 펼쳐졌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심장을 쥐어 흔들며 얻어낸 막대한 극락 포인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유진의 숨통을 영원히 조일 덫을 완성하기로 했다.
‘유진 알베르트. 네가 나를 기만한 대가는 네 영혼과 황실의 재산 전부다.’
엘리시아는 장부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지난번 유진이 서명했던 '제국 보물고의 무제한 담보 계약서'가 박제되어 있었다. 그녀는 장부의 마법을 발동시켜, 유진이 앞으로 느끼게 될 모든 후회와 집착의 감정 수치를 이 담보 계약서와 강제 연동시켰다.
[연동 설정 완료: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후회 수치가 상승할 때마다, 황실의 보물고 담보 권한이 실시간으로 사용자 '엘리시아 로렌'에게 귀속됩니다.]
황금빛 마법 진이 계약서 위로 붉은 인장을 찍으며 스러졌다. 이제 유진은 후회하면 할수록 가문이 파산하고, 엘리시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완벽한 굴레에 갇힌 것이다. 이 장부의 족쇄는 황제조차 풀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이었다.
그때, 똑똑, 정중하지만 다급한 노크 소리가 침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트렸다.
“레이디 엘리시아, 세바스티안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의 음성에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칼릭스는 아쉽다는 듯 그녀의 손가락 끝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들어오세요, 세바스티안.”
문이 열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예복 차림의 세바스티안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제 쟁반 위에 올려진 몇 장의 보고서와 따뜻한 수건이 들려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가씨.”
“장부의 잔고가 두둑하니,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군요.”
엘리시아의 농담 섞인 대답에 세바스티안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칼릭스에게 가볍게 묵례를 올린 뒤, 엘리시아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문밖에 아주 성가신 손님이 와 계십니다.”
“성가신 손님?”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어젯밤부터 침실 문앞을 지키며 아가씨를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기사들의 제지도 뿌리치고, 황실의 체통도 내팽개친 채 저러고 계시는군요.”
세바스티안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조롱과 가학적인 유쾌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엘리시아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충신이었다. 그녀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즐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무릎이라도 꿇었나요?”
“예, 아가씨.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가씨의 이름만을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군요. 사교계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참으로 보기 드문 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짜릿한 정보였다. 엘리시아는 침대 옆 탁상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최고급 다즐링의 향긋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세바스티안.”
“예, 아가씨.”
“나가서 전하세요. 내가 독 기운 때문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대공 전하의 극진한 간호를 받느라 바쁘니 그만 돌아가라고요.”
“아주 잔인한 처방이군요. 기꺼이 전하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의 눈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덧붙여, 황태자 전하께서 가져오신 사죄의 선물들은 모두 공작가의 창고가 아닌, 저희 개인 금고로 이송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특히 그가 아끼던 제국 동부의 루비 광산 소유권 문서도 포함되어 있더군요.”
“잘하셨어요. 사죄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물질로 하는 법이니까요.”
세바스티안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갔다.
그가 문을 열자,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목소리가 열린 틈새를 타고 침실 안까지 흘러들어왔다.
“엘리시아……!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주게! 내가 잘못했다! 이자벨라 그년에게 속아 눈이 멀었던 나를 용서해 다오……!”
유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찢겨 있었다. 과거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엘리시아를 가스라이팅하던 황태자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극심한 굴욕감과 절망 감지!] [+300,000p… +450,000p… 극락 포인트가 끊임없이 누적됩니다!]
엘리시아는 침대 시트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그 소리를 감상했다. 그 어떤 사치스러운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그런 잔혹한 미소를 빤히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정말 지독한 여자군. 하지만 그래서 더 탐이 나.”
“제 매력의 백분의 일도 채 보지 못하셨으면서 성급하시네요, 전하.”
그녀가 장난스럽게 대꾸한 순간이었다.
쾅! 콰광!
바깥에서 거친 마찰음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세바스티안의 당황한 목소리와 북부 기사들의 거친 제지음이 섞여 들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대공 전하의 처소입니다!”
“비켜라!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반역으로 다스리겠다! 엘리시아! 엘리시아!”
미친 광풍이 몰아치듯,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이중 목조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열렸다.
빗물과 먼지에 젖어 엉망이 된 문짝이 바닥을 뒹굴었고, 그 너머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진 알베르트였다.
그의 금발은 빗물과 땀에 젖어 이마에 볼품없이 달라붙어 있었고, 뺨에는 이자벨라를 때릴 때 튄 듯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황태자의 화려한 예복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오직 침대 위의 엘리시아만을 향해 있었다.
“엘리시아…….”
그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북부의 기사들이 즉각 검을 뽑아 그의 목 겨누었지만, 칼릭스가 가볍게 손짓하여 그들을 물렸다. 칼릭스의 눈빛은 이미 죽은 자를 보는 것처럼 극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유진은 기사들의 검날이 비켜서자마자, 힘이 풀린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엘리시아의 침대 발치까지 다가왔다.
쿵.
그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엎드렸다. 제국의 황태자가, 오직 한 여자의 발끝 아래에서 스스로를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내가…… 내가 어리석었다. 그 가증스러운 계집의 누명에 놀아나, 너라는 가장 고귀한 보석을 알아보지 못했어.”
유진이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엘리시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빗물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침대 밖으로 살짝 흘러내린 엘리시아의 실크 잠옷 자락과 그녀의 하얀 발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구걸하듯, 그 발바닥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맞추었다.
쪽.
“제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돌아봐 다오. 네가 원한다면 황태자비의 자리가 아니라, 황후의 왕관이라도 네 머리에 씌워주마. 로렌 공작가도, 황실도 전부 네 발밑에 꿇리겠다. 그러니……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엘리시아……!”
그는 아이처럼 통곡하며 그녀의 발가락을 제 뺨에 비벼댔다. 지독하고도 추잡한 집착의 노예가 된 황태자의 종말이었다.
그 비참하고도 처절한 구걸을 내려다보며, 엘리시아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영혼을 바치는 집착과 굴복 감지!] [대규모 포인트 결산 시작: +2,500,000p!] [황실 무제한 보증 담보 문서의 동기화율이 45%를 돌파합니다. 제국 황실 재정의 지분 일부가 사용자에게 이전됩니다!]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장부의 알림음과 함께, 엘리시아는 제 발끝을 적시는 유진의 눈물을 아주 차갑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감상했다.
그녀의 시선이 유진의 젖은 머리칼을 지나, 그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서늘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판은 완벽하게 짜였고, 이제 사냥감들은 제 발로 덫 깊숙이 걸어 들어왔다. 엘리시아는 유진의 젖은 머리칼을 구두 끝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