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서울성모병원 VIP 병동의 서늘한 대리석 복도 끝.
세아는 조인석 전무가 들이댔던 태블릿 PC 화면 속 사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극한의 한기를 뚫고 마침내 비상 공조실 문을 박살 내며 쏟아져 들어왔던 구출 요원들의 노란 랜턴 불빛. 그 아수라장 속에서, 단추가 몇 개 풀려 흐트러진 셔츠 깃을 여민 채 창백하게 굳어 있던 도현의 숨결을 제 머리칼로 조용히 가리던 자신. 그리고 조 전무의 밀매 비서를 향해 짐승처럼 독기 가득한 시선을 던지던 그 찰나의 순간이 붉은 경고등 아래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응급 처치였습니다."
조 전무의 뱀 같은 미소 앞에서도 세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쏘아붙였었다.
"상무님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위기였습니다. 사내 규정상의 품위 유지보다 인명 구조가 먼저라는 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 아닙니까, 전무님?"
그 당돌한 반박과 때마침 들이닥친 민채원 과장의 기지 덕에 간신히 사옥을 빠져나와 이곳 응급 병동으로 도현을 후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조인석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는 이 병원 안에서, 그들은 여전히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띡, 띡, 띡.
정적만이 감도는 VIP 격리 병실 안. 규칙적인 바이탈 모니터 음만이 두 사람의 생존을 증명하듯 울리고 있었다. 세아는 도현의 침대 옆 간이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도현의 차디찬 오른손을 꽉 쥔 상태였다.
"이봐, 강도현. 깨어나서 근태 체크라도 좀 해 보시지?"
세아는 핏기 없는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팀장이 상무 병간호하느라 초과 근무를 이만큼이나 하고 있는데, 대체 결재는 언제 해 줄 건데? 야근 수당 청구서가 벌써 결재선 대기 중이거든?"
장난스러운 독백 끝에 묻어나는 건 짙은 물기였다. 세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도현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스르릉, 미세한 진동과 함께 도현의 손가락 끝이 꼼지락거렸다. 세아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34.2도까지 떨어져 얼음장 같던 그의 손끝에, 세아의 온기가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바이탈 모니터의 체온 표시등이 조금씩 숫자를 바꾸기 시작했다. 35.1도, 35.8도…… 마침내 기적처럼 36.5도 정상 체온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세아냐?"
산소마스크 너머로 웅얼거리는 듯한,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현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초점이 흐릿하게 흔들리다 이내 세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너…… 다친 데는. 괜찮아? 안 춥고?"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해?"
세아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도현의 손을 탁 놓으려 했지만, 도현은 남은 힘을 쥐어짜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맞잡았다.
"상무님, 정신이 듭니까? 깨어나자마자 부하 직원 근태 관리 하시는 거예요? 진짜 지독한 워커홀릭이네."
"네가 눈앞에 없으면…… 일이 안 돼서 그래."
도현이 마스크를 슬쩍 벗겨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터져 있었고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만큼은 세아를 향해 온전히 살아 있었다.
"조인석이…… 가만 안 있었을 텐데."
"말도 마요. 아주 사내에 찌라시를 실시간 중계로 돌리셨더라고요. 우리 둘이 공조실에서 아주 뜨겁게(?) 껴안고 있었다고 법무팀에 의사들까지 대동해서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서 있데요? 진짜 넷플릭스 드라마 찍는 줄 알았네."
세아가 코방귀를 뀌며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도현에게 잡힌 채였다. 도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세아의 손등을 엄지로 살며시 쓸었다.
"고마워. 날 살려줘서."
"살려줬으면 밥값을 하세요. 당장 일어나서 기획안 컴펌이나 똑바로 하라고요."
그때였다. 병실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친 발소리들이 복도를 채우기 시작했다.
"비키세요! 저희는 엘리시안 그룹 사내 감사팀과 법무팀 합동 조사반입니다. 강도현 상무의 약물 오남용 및 정서 불안정 상태에 대한 긴급 확인을 위해 본사 의료진과 동행했습니다!"
"사내 규정 제42조 위반 및 임원의 품위 유지 의무 위반 혐의로 긴급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문 열어주십시오!"
조인석이 보낸 사내 탐문 요원들이 병동 내에 들이닥친 것이 분명했다. 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도현 역시 본능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누적된 체온 저하로 이내 신음하며 시트에 다시 파묻혔다.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마."
세아가 도현의 어깨를 누르며 병실 문을 향해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문이 벌컥 열리려는 찰나, 복도 쪽에서 익숙하고도 당찬 목소리가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아이고, 법무팀 김 팀장님 아니십니까? 야밤에 아주 열일하시네요? 이번 분기 평가 B등급 받으시더니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다니시는 모양이에요?"
민채원 과장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이성적이고 계산 빠른 눈빛으로 태블릿과 서류 뭉치를 품에 안은 채 복도를 딱 가로막고 서 있었다.
"민 과장? 비키세요. 이건 대표이사 직속 긴급 이사회 발의 안건에 따른 임원 신체 검사입니다."
"이사회 발의요? 웃기지 마세요. 정식 의결서도 안 나온 가처분 신청서 한 장 들고 와서 어디서 공갈협박입니까? 그리고 사내 규정 제42조? 그거 개인정보보호법보다 위에 있습니까? 임원의 민감한 의료 정보는 법원 수색영장 없이 사내 법무팀 따위가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는 건 로스쿨 초년생도 아는 상식인데요?"
민채원이 턱을 치켜들며 쏘아붙였다. 조인석의 수하들이 주춤하는 사이, 민채원의 뒤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덥수룩한 머리에 다소 헐렁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게 가라앉은 오태식 박사였다.
"이봐요, 시끄러운 양반들."
오 박사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탐문 요원들과 동행한 본사 의료원 의사들을 째려보았다.
"당신들 의사 면허 어디서 땄어? 환자가 지금 급성 쇼크로 실려 와서 중환자실 격리동에 누워 있는데, 사내 감사랍시고 들이닥쳐서 검사를 하겠다고? 환자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오 박사님, 저희는 단지 상무님이 평소 복용하시던 그 노란색 알약의 성분 분석과 약물 반응 검사를……."
"노란 알약?"
오 박사가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이게 내가 직접 처방한 특수 트라우마 신경안정제 처방 전말서다. 똑똑히 읽어봐! 이 환자는 15년 전 은하백화점 가스누출 참사 생존자로서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고, 뇌 편도체의 과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내가 아주 예민하게 조제한 특수 신경안정제란 말이다! 성분? 뇌 신경 강제 차단 제제야. 이게 무슨 불법 약물이야? 심장과 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부작용이 있어서 내 철저한 임상 통제 하에만 제한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합법적인 처방 약물이라고!"
오 박사의 호통에 조 전무 측 의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오 박사는 기세를 몰아 그들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리고 하나 더 가르쳐 주지. 이 환자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아주 특이한 '싱크 가중 체온 역전증' 경고 상태야! 체온이 34도 이하로 단 10분만 방치되어도 심근이 급격히 수축해서 그대로 심장 마비로 이어지는 시한폭탄 같은 상태라고! 당신들이 여기서 억지로 채혈하겠다고 환자 자극해서 발작 일으키면, 그 살인 미수 혐의 당신들이 독박 쓸 거야? 조 전무가 책임져 준대?"
살인 미수라는 단어에 법무팀과 감사팀 요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 한들, 재벌 후계자 구도에 엮여 살인죄를 뒤집어쓸 생각은 추호도 없는 평범한 월급쟁이들이었다.
"어…… 그, 그건 저희도 몰랐던 사실이라……."
"모르면 꺼져! 당장 이 격리 구역에서 100미터 밖으로 안 물러나면, 내가 당장 보건복지부에 의료 정보 무단 유출 및 환자 위해 시도로 고발해 버릴 테니까!"
오 박사의 사자후에 결국 조인석의 수하들은 꼬리를 내리고 복도 저편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민채원이 병실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세아와 도현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 팀장, 일단 가짜 진단서 끊어서 단순 과로랑 급성 한랭 질환으로 어레인지 해뒀어. 조 전무 라인 애들은 당분간 조용할 거야. 그러니까…… 둘이 아주 끈적하게 치료 잘하라고."
민채원은 찡긋 윙크를 해 보이고는 오 박사를 이끌고 문을 닫아주었다. 병실 안은 다시 고요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달칵.
수용동의 하얀 커튼 가림막 안, 오롯이 단둘만 남게 된 공간.
도현은 가만히 세아의 손을 자기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세아의 하얗고 고운 손등에는 공조실에서 철문을 두드리고, 수동 우회 밸브를 찾느라 사방에 긁히고 쓸린 붉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시퍼런 멍까지 들어 있는 손을 보며, 도현의 가슴 속 어딘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바보같이……."
도현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몸을 약간 숙여, 세아의 작은 상처투성이 손등 위에 자신의 정수리와 이마를 가만히 맞대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살리겠다고…… 네 자존심 다 버리고, 그렇게 껴안고 질질 짜면서 버틴 거야?"
"질질 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자존심 버린 게 아니라, 단순한 업무 파트너 구호 조치였다니까요."
세아는 짐짓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제 손등을 적셔오는 도현의 뜨거운 숨결에 온몸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거짓말하지 마."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흔들림 없는 결의가 들어차 있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네가 쌓아 올린 철벽도, 그 지긋지긋한 공사 구분 철칙도 다 내던지고 내 품에 안겼잖아. 네가 날 그렇게 붙잡았는데, 내가 어떻게 널 놔."
"강도현 상무님. 여기 병원이고, 회사 사람들도……."
"상관없어."
도현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울렸다.
"조인석이 무슨 짓을 밀고 와도, 사내 규정이 우리 목을 죄어와도 상관없어. 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널…… 난 이제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설령 내 자리가 날아가고, 승계 구도에서 완전히 미끄러진다고 해도."
세아는 숨을 들이켰다. 가방을 정리하려다 언뜻 스친 서류 봉투 틈새로, 15년 전 은하백화점 참사 당시의 낡은 설계 도면 사본이 보였다. 그리고 도현의 셔츠 깃 너머로, 그가 15년간 비밀 금고에 고이 간직해 왔다던 세아 어머니의 유품인 아쿠아마린 펜던트의 푸른 광채가 은은하게 비쳐 드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을 묶고 있는 건 단순한 동기화의 통증이 아니었다. 15년 전 그 끔찍한 불길 속에서부터 시작되어, 냉혹한 사내 정치의 칼날 위에서 더욱 단단해진 영혼의 사슬이었다.
"한세아."
도현이 상체를 더 가까이 밀착해 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세아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난 어쩌면…… 15년 전에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게, 오늘 이 순간 널 오롯이 사랑하기 위함인지도 몰라."
도현의 큰 손이 세아의 턱선을 아프도록 쓸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세아의 피부가 찌릿하게 떨려왔고, 세아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단 1센티미터도 남지 않은 바로 그 순간, 병실의 산소 포화도 경보음이 미세하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