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한세아, 난 어쩌면 15년 전에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게 오늘 널 오롯이 사랑하기 위함인지도 몰라."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고 뜨거운 목소리에 세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턱선을 쓸어 올리는 도현의 커다란 손가락 끝에서부터 찌릿한 전류가 시작되어 온몸의 신경계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의 깊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세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남자가 진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작정인가 싶었다.

하지만 감동의 여운이 채 내려앉기도 전에, 병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졌다.

"어허! 이 인간들이 지금 병원을 연애 시뮬레이션 촬영장으로 아나! 환자분, 지금 심박수 모니터 요동치는 거 안 보여요?"

오태식 박사가 흰 가운자락을 휘날리며 들이닥쳤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도현과 세아에게 꽂히자, 두 사람은 자석의 극이 바뀐 것처럼 황급히 몸을 떨어뜨렸다. 세아는 뺨이 화끈거려 괜히 병실 벽에 붙은 소독약 디스펜서만 쳐다보았고, 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삼켰다.

"강 상무 당신, 내가 경고한 '싱크 가중 체온 역전증'이 무슨 감기몸살쯤 되는 줄 압니까?"

오 박사가 차트를 팍팍 넘기며 도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지면 심근이 급격히 수축해서 10분만 방치돼도 심장 마비로 저세상 행이라고요! 이번엔 한 팀장이 옆에서 온몸으로 체온 유지해 줘서 기적적으로 산 거지, 진짜 요단강 건널 뻔한 겁니다.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 그러니까 목소리 좀……."

"목소리가 작게 나오게 생겼어? 게다가 그 노란 캡슐 말이야!"

오 박사의 시선이 협탁 위에 놓인 회색 약통으로 향했다. 5화에서 조인석 전무가 마약 선동의 덫으로 쓰려다 세아의 기지로 무산되었던 바로 그 약이었다.

"이 특수 신경안정제, 뇌 편도체를 강제 차단해서 발작은 막아줄지 몰라도 심장이랑 간에는 쥐약입니다. 내 허락 없이 이거 하루에 세 알 이상 먹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거늘. 대체 몸을 얼마나 막 굴린 겁니까?"

세아는 오 박사의 잔소리를 들으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공조실에서 탈출하느라 긁히고 멍든 손등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도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독한 약을 삼키며 버텨왔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체온 34도 밑으로 떨어져서 실려 오면, 내 손으로 직접 사내 게시판에 '본부장 저체온증의 비밀'이라고 대자보 붙일 줄 알아요. 알겠습니까?"

"알았으니 제발 퇴원 수속이나 밟아주십시오. 회사에 쥐새끼들이 설쳐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네요."

도현이 툴툴대며 이불을 걷어찼다. 세아는 그의 단단한 등판을 바라보며, 가방 틈새로 삐져나온 15년 전 은하백화점 설계도 사본을 조용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도현의 목덜미 아래로 언뜻 비치는 아쿠아마린 펜던트의 푸른 광채를 눈에 담았다.

'우리가 살아서 서로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

* * *

사흘 뒤, 서울의 아침 공기는 칼바람을 품고 있었다. 엘리시안 그룹 본사 18층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 사무실은 이른 아침부터 마우스 클릭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로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아는 모니터 화면에 가득 찬 엑셀 시트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때 메신저 알림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민채원 과장이 보낸 다이렉트 메시지였다.

[민채원 과장: 팀장님, 지금 3층 소회의실에 조인석 전무 쪽 라인 주주들 다 모이고 있어요. 분위기 장난 아닙니다. 조 전무가 이번에 강 상무님 아예 매장하려고 판 제대로 짰나 봐요.]

세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세아 팀장: 안건이 정확히 뭡니까?]

[민채원 과장: '더 리본 서울' 브랜드 지분 외부 불법 편출 건이요. 강 상무님이 저체온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의사결정 공백이 생긴 걸 꼬투리 잡아서, 브랜드 지분을 조 전무 사촌이 운영하는 H&K 대행사로 전량 이관하겠답니다. 그렇게 되면 강 상무님은 배임 및 직무유기로 이사회 상임직에서 박탈당해요.]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인석, 이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결국 도현의 공백을 틈타 목줄을 죄어오는구나.

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민 과장님, 제가 지난주에 분석하라고 했던 엘리시안 지적 수수료 세목 명단이랑 역외 탈루 의심 수치 정리된 최종 파일, 지금 제 메일로 보내세요. 3분 드립니다."

"네? 아, 네! 바로 쏩니다!"

민채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세아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USB를 꺼내 포트에 꽂았다. 화면에 뜬 파일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그녀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았다. 조인석 전무가 대기업의 법망을 피해 지분을 빼돌리려 했다면, 반드시 꼬리가 밟히게 되어 있었다. 대기업의 밑바닥 생태계부터 핥듯이 분석해 온 세아의 레이더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강도현 상무님이 재벌 후계자라 정공법만 고집할 때, 난 진흙탕 싸움으로 갈 테니까 어디 한번 버텨보시지."

세아는 태블릿을 챙겨 들고 거침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 * *

3층 소회의실 안은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은밀한 탐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긴 테이블을 둘러싼 대주주들과 이사회 임원들 앞에는 고급 다과와 전통차가 놓여 있었다.

단상 앞에 선 조인석 전무는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허허, 주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강도현 상무의 건강 상태가 매우 우려스러운 수준입니다. 최근 공조실 사고 때도 그렇고, 사흘이나 병가를 내지 않았습니까? '더 리본 서울' 그랜드 오픈이 코앞인데, 수장의 개인 신상 문제로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려서는 안 되지요."

"조 전무 말이 맞소. 젊은 친구가 열정만 앞섰지, 몸 관리를 저렇게 못 해서야 대기업을 어떻게 이끌겠나."

가장 지분이 많은 배 이사가 거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석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겁니다. 브랜드 지분을 전문 대행사인 H&K로 편출하여 리스크를 관리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엘리시안의 자산을 지키고, 주주 여러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 동의서에 서명만 해 주시면……."

"그 서명, 잠시 멈추시는 게 좋을 겁니다."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간을 찢고 들어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가로 쏠렸다. 단정한 네이비 정장 차림에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한세아 팀장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간 수척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강도현 상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조인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이내 평온을 가장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한 팀장? 여기는 임원들과 대주주들의 사적인 간담회 자리입니다. 브랜드팀 직원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깽판을 놓을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적인 간담회요?"

세아는 콧방귀를 뀌며 들고 있던 태블릿을 회의실 메인 콘솔에 연결했다. 빔프로젝터가 켜지며 대형 스크린에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가 가득한 화면이 띄워졌다.

"엘리시안 그룹의 핵심 자산인 '더 리본 서울'의 브랜드 지분을 불법으로 유출하려는 모의라면, 공적인 배임 모의죄에 해당합니다. 제가 브랜드 총괄 디렉터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무슨 무례한 소릴 하는 겁니까! 당장 나가지 못해?"

한 주주가 소리를 질렀지만, 세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화면을 가리켰다.

"주주 여러분, 조인석 전무가 제안한 H&K 대행사의 등기부등본과 자금 흐름도입니다. 이 회사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조 전무님의 친인척이 지분 80%를 보유한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입니다."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인석의 나긋나긋하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브랜드팀과 재경팀 민채원 과장이 공동 조사한 바에 따르면, H&K는 지난 3년간 엘리시안의 지적 수수료 세목 명단에서 고의로 누락된 탈루 수치만 무려 120억 원에 달합니다. 조 전무님이 말씀하신 '리스크 분산'의 본질은, 주주 여러분의 배당금을 본인의 친인척 명의 회사로 빼돌리는 '수수료 세탁'에 불과합니다."

세아가 리모컨을 누르자, 조인석의 서명이 날인된 이면 계약서 사본이 화면에 크게 확대되었다. 주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동의서에 서명하시는 순간, 주주 여러분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업무상 배임 및 조세 포탈의 공동 공범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실 겁니다. 엘리시안의 주가는 곤두박질칠 것이고, 여러분의 자산은 휴지 조각이 되겠지요. 그래도 서명하시겠습니까?"

"이, 이게 정말이요? 조 전무! 당신 우리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했던 거야?"

배 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인석의 멱살을 잡을 듯이 몰아붙였다. 다른 주주들도 일제히 서류를 내팽개치며 웅성거렸다.

"조 전무, 해명해 봐! 우리가 당신 말만 믿고 강 상무를 몰아내려 했다가 독박을 쓸 뻔했잖아!"

"어허, 주주 여러분! 잠시만 진정하십시오. 이건 한 팀장의 왜곡된 해석일 뿐……."

조인석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주주들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허겁지겁 서류 가방을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조인석의 우호 세력들이 대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텅 빈 회의실에 남겨진 조인석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세아를 노려보았다.

"한세아…… 네가 감히 내 판을 엎어?"

"판을 엎은 건 제가 아니라, 전무님의 더러운 손버릇이죠."

세아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챙겼다.

옆에 서 있던 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와 조인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큰 체구가 세아를 완벽하게 보호하듯 가로막아 서자, 조인석은 독기가 서린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씩씩거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 * *

회의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복도로 나온 두 사람.

긴장이 풀린 세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어뜨릴 때였다. 뒤에서 걸어오던 도현이 세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는 주위의 눈을 피해 비상구 그림자 속으로 세아를 이끌었다. 사방이 고요한 공간, 도현은 세아의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세아의 손가락뼈 끝에서부터 틈새 없이 밀어 넣어 완전히 깍지를 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도현의 온기는 따뜻했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한세아, 너 진짜 미쳤어?"

도현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했지만, 눈동자는 주체할 수 없는 신뢰와 열정으로 구동되고 있었다.

"상무님 구하려고 제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면 기절하실 걸요? 민 과장 꼬드겨서 재경팀 서버 해킹하다시피 뒤졌다고요."

세아가 짐짓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깍지 낀 손가락을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을 더 꽉 맞잡았다.

"고마워."

도현이 세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15년 전 참사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붙잡았던 그 손길처럼, 냉혹한 사내 정치의 칼날 위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제 본 회의장으로 가자. 네가 시작한 판, 내가 완벽하게 끝낼 테니까."

도현의 단단한 선언에 세아는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엘리시안 그룹의 정기 이사회가 열리는 대회의실. 수십 명의 임원과 주주들이 가득 들어찬 단상 위에 한세아가 당당하게 올라섰다.

마이크를 잡은 세아의 시선이 저 멀리 앉아 있는 조인석 전무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환희와 깊은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내는 도현의 시선과 허공에서 얽혔다.

세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이크를 향해 거침없이 선언했다.

"앞으로 조인석 전무의 기획은 엘리시안의 역사적 사기극에 준하는 리스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 브랜드팀은 '더 리본 서울'의 독자 노선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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