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피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번지기 전에 세아의 하얀 블라우스 깃을 먼저 적셨다. 비릿한 철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도현아……! 정신 차려, 강도현!"

세아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도현의 몸은 이미 제어력을 잃은 낙엽처럼 힘없이 꺾여 내렸다. 10미터라는 물리적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세아의 가슴속에서 날뛰던 공황의 파도가 도현에게 고스란히 옮겨간 결과였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세아의 손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오지…… 말랬잖아. 너까지…… 싱크되면……."

도현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입술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오한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아의 공황 발작을 대신 흡수해 주는 대가로, 도현의 체온은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여기서 누군가에게 들키면 끝장이다.

'공사 분리'라는 엘리시안 그룹의 칼날 같은 사칙이 뇌리를 스쳤다. 조인석 전무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신임 상무와 일개 팀장이 회의실 바닥에 엉켜 있는 모습이 발각되는 순간, 기획안 사수는커녕 두 사람 모두 사내 매장을 면치 못할 터였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며 도현의 팔을 자신의 어깨목에 걸쳤다.

"조용히 해. 숨 쉬어, 억지로라도 쉬어."

키 180이 넘는 단단한 남자의 몸무게가 고스란히 세아의 가냘픈 어깨 위로 쏠렸다. 다리가 꺾일 것 같았지만, 세아는 볼펜을 가방에서 꺼내 제 손바닥을 깊숙이 찔렀다. 찌릿한 육체적 통증으로 정신을 벼려냈다. 지금 쓰러지면 둘 다 죽는다.

세아는 어둠이 짙게 깔린 회의실 뒷문으로 빠져나와 비상 통제실 뒤편으로 향했다. 조 전무 일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사각지대이자, 신축 중인 플래그십 몰의 기계 설비가 임시로 작동하는 환기용 냉동 공조 보존실이었다.

공조실의 두꺼운 철문을 밀어젖히고 도현을 안으로 끌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철커덕.

등 뒤에서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기요! 안에 사람 있어요! 문 열어요!"

문틈 너머로 멀어지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우연한 실수인지, 아니면 조인석 전무의 지시를 받은 통제원의 고의적인 짓인지 가늠할 시간조차 없었다. 공조실 내부의 천장 흡입구에서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시베리아의 칼바람 같은 냉기가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슈우우우—!

차가운 기압 변화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사내망과 연결된 벽면의 스마트 제어판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공조 구역 기압 과충전 경고. 내부 온도 급감 중.]

"하아, 하……."

어깨를 짚고 있던 도현의 숨소리가 급격히 거칠어졌다. 세아는 다급히 그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걸린 것은 은색 메탈 재질의 작은 약통이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노란색 캡슐 알약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현이 늘 상시 복용하던 특수 트라우마 신경안정제였다.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노란 알약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도현은 이미 턱을 덜덜 떨며 치아를 맞부딪치고 있어 약을 삼킬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 오태식 박사의 다급했던 음성이 환청처럼 박혔다.

'세아 씨, 그 노란 약은 뇌 편도체를 강제로 마비시키는 독약이나 다름없어요. 심장과 간을 갉아먹으면서 억지로 버티게 하는 임시방편이라고! 특히 도현이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지면, 싱크 가중 체온 역전증 때문에 심장 근육이 급격히 수축해서 심정지가 올 수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체온을 빼앗기게 두면 안 돼요!'

체온 역전증. 34도의 한계선.

스마트 제어판에 표시된 도현의 웨어러블 밴드 수치는 이미 34.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0.2도만 더 떨어지면 그의 심장이 멈춘다는 뜻이었다.

"도현아, 도현아 눈 좀 떠 봐!"

세아는 그의 뺨을 내리쳤지만, 도현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천천히 감겨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공조실의 얼음바람과 섞여 세아의 뼈마디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이대로 두면 강도현은 죽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제 수명을 갉아먹던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내 공황을 대신 짊어지고 이 차가운 기계실 바닥에서 동사할 것이다.

철벽을 치며 밀어내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사내 정치의 위험성도, 공사 분리의 철칙도, 그 어떤 가식적인 방어기제도 지금 이 순간에는 하찮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내가…… 내가 널 어떻게 보냈는데."

세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방울이 도현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세아는 주저 없이 자신의 두꺼운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던졌다. 뒤이어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거칠게 풀어헤쳤다. 하얀 살결이 영하에 가까운 공조실의 한기에 노출되자 전신이 비명 지르듯 떨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도현의 젖은 셔츠 단추를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도현아, 내 말 들어. 죽지 마. 살아."

세아는 맨살을 드러낸 도현의 가슴 위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은 그의 피부와 세아의 뜨거운 살결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읏……."

지독한 한기가 세아의 심장으로 직접 꽂히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대로 체온을 빼앗기면 자신 역시 저체온증으로 무너질 터였다. 하지만 세아는 도현의 목덜미를 두 팔로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그를 제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온기가 도현의 차가운 가슴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맞닿은 경계에서, 두 사람의 심장박동이 기묘한 박자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날뛰던 도현의 심장이 세아의 일정한 맥박을 따라 서서히 안정감을 찾아갔다.

그 순간, 미세하게 떨리던 도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는 무의식중에 세아의 맨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살을 파고들 듯한 강한 아귀힘이었다.

"하아…… 세아, 야……."

도현이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세아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현의 시선이 세아의 젖은 입술로 향했다. 15년 동안 억눌러왔던 갈망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본능적인 열망이 두 사람 사이의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불태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세아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차가웠던 그의 입술이 세아의 타오르는 온기를 빨아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뜨거워졌다. 거친 숨결이 서로의 입안으로 뒤섞였다. 공조실의 소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로의 타액이 섞이는 소리와, 살결이 밀착해 스치는 서글픈 마찰음만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도현의 단단한 손이 세아의 등 허리를 쓸어내리며 그녀를 제 몸 위로 완전히 밀착시켰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는 두 사람의 결합된 열기 아래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이것은 스킨십이라는 가벼운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서로의 영혼을 나누어 마시는 필사의 구원 행위였다.

34.0도에서 멈춰 섰던 스마트 제어판의 수치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34.5도, 35.1도, 마침내 정상 범주인 36.2도에 도달했을 때, 두 사람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도현의 뺨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세아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그녀의 이마에 깊은 입맞춤을 남겼다.

"살았네, 우리 둘 다."

도현이 나른하게 웃었다. 세아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쿵-!

두꺼운 철문 너머로 거친 타격음이 들려왔다. 기계실 외부에서 쇠지렛대로 문을 뜯어내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조실 내부에 메아리쳤다. 사태를 감지한 보안팀이 들이닥친 것이 분명했다.

세아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블라우스를 주워 입고 단추를 채웠다. 흐트러진 옷 매뭇새를 만지는 손길이 창백하게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도현 역시 세아의 도움을 받아 셔츠를 여미고 코트를 걸쳤다. 비록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창백했으나, 상무로서의 서슬 퍼런 기세를 다시금 두르고 있었다.

콰창-!

마침내 체인이 끊어지며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눈이 멀 것 같은 강한 랜턴 불빛들이 어두운 공조실 내부를 사방으로 비추었다.

"강 상무님! 한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보안 요원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 최전선에는 조인석 전무의 심복이자, 사내에서 '뱀의 눈'이라 불리는 밀매 비서, 김 과장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상황을 녹화하려는 듯 스마트폰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부적절한 밀회 현장을 포착해 매장하려던 조 전무의 덫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단정하게 옷을 여민 채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한세아 팀장이었다.

세아는 아직 호흡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미세하게 떨고 있는 도현의 몸을 자신의 풍성한 머리칼과 어깨 뒤로 조용히 숨겼다. 그리고 김 과장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서리 같은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기계 오작동으로 임원용 공조실에 갇힌 상무님을 구조하던 중이었습니다, 김 과장님."

세아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그런데…… 왜 과장님이 보안팀보다 먼저 열쇠도 없는 이 문 앞을 지키고 계셨던 건지, 내일 아침 감사실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김 과장의 얼굴에서 비열한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세아의 서늘한 시선이 그의 목덜미를 겨누는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김 과장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보안팀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상무와 전무의 고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새우등 터지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한 팀장님, 말이 좀 지나치십니다. 기계 오작동이라니요."

김 과장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슬그머니 재킷 주머니로 밀어 넣으려 했다.

"저는 그저 상무님께서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셨다는 첩보를 받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보안팀과 동행한 것뿐입니다. 대기업 임원의 신변 안전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이 아니라 비서실 소관이니까요."

"첩보?"

세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볼펜에 찔려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코트 주머니 속에 숨기며, 한 걸음 더 김 과장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김 과장님,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보셨네. 여기가 무슨 국정원입니까? 일개 전무 비서실이 보안팀 무전까지 도청해가며 남의 부서 관할 구역에 기어들어 올 정도로 한가해요? 아, 평소에 조 전무님 심부름하느라 오지랖 넓히는 게 본업이시라 감각이 무뎌지셨나 보네."

"뭐라고요?"

"공조실 잠금장치는 외부에서 수동으로 락(Lock)을 걸지 않으면 절대로 안쪽에서 잠기지 않는 구조입니다. 마침 여기 CCTV 사각지대라고 좋아하셨을 텐데, 복도 진입로 CCTV는 아주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누가 이 문 고리를 걸어 잠그고 유유히 사라졌는지, 감사실 삼자대면에서 눈 비비고 같이 확인해 볼까요?"

세아의 쐐기를 박는 말에 김 과장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서울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대기업 팀장의 깡다구는 조 전무의 가스라이팅 따위에 굴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 세아의 등 뒤에서 낮고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비켜."

어느새 옷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돈한 도현이 세아의 어깨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하얗게 질려 피를 토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오만했다. 상무라는 직책이 주는 중압감이 좁은 공조실 입구를 가득 메웠다.

"상, 상무님."

김 과장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도현은 김 과장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일 오전 9시. 조 전무 대동하지 말고, 혼자 상무실로 와."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고서 작성해 오라는 소리야. 네가 왜 보안팀 무전을 가로채서 이 시간에 여기 와 있었는지, 사유서 육하원칙으로 정갈하게 적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 9시 1분 되는 순간, 네 사원증은 인사팀에서 회수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상무님!"

"비키라고 했다."

도현의 서슬 퍼런 명령에 김 과장은 입술을 깨물며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안팀 직원들도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주었다.

세아는 자연스럽게 도현의 곁을 지키며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는 당당하게 걷고 있었지만, 도현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그녀는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직 체온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탓이었다. 세아는 남들의 눈을 피해 그의 코트 자락을 살짝 거머쥐며 그를 지탱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어두운 복도, 도현의 걸음걸이가 조금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그의 코트 안쪽 주머니가 벌어지며 그 틈새로 묵직한 물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세아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내었다.

"앗……."

손바닥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실크 파우치였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새로, 은은한 하늘색 광채를 내뿜는 보석이 보였다.

아쿠아마린 펜던트.

15년 전, 은하백화점 지하 2층 매장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목에 걸고 있었던, 그리고 참사 현장의 잔해 속에서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바로 그 유품이었다.

세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게 왜…… 도현이 너한테 있어?'

물어보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사적인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도현은 세아의 손에 들린 파우치를 조용히 빼앗아 다시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의 눈에 스친 깊은 죄책감과 애틋함이 세아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나중에…… 다 설명할게."

도현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이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지잉- 지잉-!

세아의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비명 지르듯 진동했다. 발신인은 민채원 과장이었다. 이성적이고 계산 빠른 그녀가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리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세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민 과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한세아! 지금 강 상무님이랑 같이 있어? 당장 복귀하지 말고 사옥 밖으로 피해!

"민 과장님? 무슨 일인데 그래요?"

- 조 전무가 움직였어. 방금 대표이사 직속으로 긴급 임시 이사회가 발의됐어. 안건은 '강도현 상무의 약물 남용 및 정서 불안정으로 인한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이야!

세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 아까 상무실 소파 밑에서 수거했다는 그 노란색 알약 성분 분석표를 조 전무가 이사회 단톡방에 뿌렸어. 게다가…… 조금 전에 너희 둘이 공조실에 갇혀서 껴안고 있던 사진까지 실시간으로 유포되고 있다고! 스캔들로 완전히 묻어버릴 작정이야!

"그 알약은 분명히 내가 비타민으로……."

세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띵- 하는 명쾌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을 본 세아와 도현의 숨이 동시에 멎었다.

단정한 수트 차림에 인자한 미소를 지은 조인석 전무였다. 그의 뒤편에는 엘리시안 그룹의 사내 법무팀 변호사들과, 하얀 가운을 입은 본사 의료원 소속 의사들이 살벌한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아, 여기 계셨군요. 강 상무님."

조 전무가 뱀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시선이 세아의 흐트러진 블라우스 깃과 도현의 창백한 얼굴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마침 이사회에서 상무님의 건강 상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어 말입니다. 정식 직무 정지 처분 전에, 본사 의료진의 긴급 약물 반응 검사 및 정신 감정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아, 물론 우리 한 팀장님도 '참고인'이자 '공범'으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 속에서, 조금 전 공조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옷을 벗긴 채 밀착해 있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붉은 경고등 아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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