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아. 내가 너한테 비즈니스 이상으로 구걸하고 싶어지면, 넌 도망갈 거야?"
귓벽을 때리는 강도현의 숨결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고스란히 살을 지져 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마다 지독한 오한과 함께 이질적인 쾌감이 번져 나갔다. 체온이 34.5도까지 떨어진 남자의 품은 겨울철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듯 시렸으나, 한세아는 그를 밀쳐내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도현의 젖은 셔츠 깃을 꽉 움켜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아카이브실의 퀘퀘한 종이 냄새와 먼지 낀 공기 사이로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교차했다. 세아는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 남자가 대기업 엘리시안 그룹의 황태자이자, 자신을 언제든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직속상관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려 애썼다.
"도망치겠죠."
세아는 도현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며 차갑게 속삭였다. 차가워진 그의 뺨이 쓸려 나가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 왔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오래된 생존 방식이었다.
"저는 제 커리어가 제일 소중하거든요. 상무님과의 사적 감정 놀음에 제 15년 노력을 베팅할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감정 놀음이라."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푸르스름하게 질린 입술 끝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비참함과 쓰라림이 뒤섞인, 15년 전 그날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면을 쓰듯 무표정한 안면을 되찾았다.
"역시 한세아 팀장답네. 공사 분리 하나는 칼 같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상무님의 체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이만 복귀하시죠. 누군가 비상계단이나 이 아카이브실 쪽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인석 전무의 눈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세아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카이브실의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하얀 복도 불빛이 도현의 창백한 얼굴을 가차 없이 비추었다. 도현은 품에서 익숙한 불투명한 회색 통을 꺼내 노란색 캡슐 알약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거칠게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 노란 알약. 1화에서 세아가 도현의 사무실 소파 틈새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특수 트라우마 신경안정제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는 약이 아니었다. 오태식 박사가 오직 도현만을 위해 극비리에 조제한, 뇌의 편도체를 강제로 마비시키는 불법적인 신경 차단제였다. 트라우마 싱크로 인해 세아의 공황과 통증이 전이될 때, 급격한 뇌파 변화와 체온 저하를 억제하기 위해 도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을 걸고 삼키는 독약과도 같은 방패막이. 약효가 강한 만큼 심장과 간에 치명적인 무리를 주지만, 도현은 사내에서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이 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난 5화에서 조인석 전무가 검찰의 불시 압수수색을 사주해 도현을 마약 복용 혐의로 엮으려 했을 때, 세아가 눈치 빠르게 이 약을 대공용 비타민 캡슐로 미리 바꿔치기해 두지 않았다면 도현은 그 자리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다.
세아는 그 노란 약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거워졌다. 도현이 저 약을 삼킬 때마다 그의 수명이 깎여 나가고 있다는 것을, 오태식 박사의 경고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날 밤, 원룸 침대에 누운 세아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얇은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브실에서 제 몸을 감싸 안았던 도현의 얼음장 같은 체온이 피부 표면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34.5도. 고작 15분 남짓한 접촉이었음에도 도현의 몸은 급격히 식어 내렸다. 만약 접촉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혹은 세아의 발작이 더 심해 도현이 고통을 더 많이 흡수했더라면 그의 체온은 기어이 오태식 박사가 경고한 '심장 마비 유발 한계선'인 34도 이하로 떨어졌을 것이다.
'체온이 역전되기 시작하면, 흡수하는 쪽의 심근이 급격히 수축해서 멈추게 돼요. 한 팀장, 강 상무가 버텨주는 건 사랑이 아니라 목숨을 건 광기입니다.'
오 박사의 날카로운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세아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한 새끼……."
욕설 섞인 독백이 흘러나왔지만,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듯 가늘게 떨렸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지옥불로 뛰어드는 소꿉친구를, 세아는 매번 비즈니스라는 방패 뒤에 숨어 외면해 왔다. 그래야만 둘 다 이 살벌한 엘리시안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심장의 박동은 이성보다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도현이 다칠 때마다, 그의 몸이 차가워질 때마다 세아의 영혼 또한 서서히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시안 사옥 15층 기획조정회의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웠다.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을 중심으로 사내 파벌의 주축들이 대치하듯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조인석 전무가 특유의 인자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강도현 상무가 날카롭게 날이 선 표정으로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아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총괄 디렉터로서 테이블 말석에 앉아 브리핑 자료를 점검했다. 옆자리에 앉은 민채원 과장이 아주 미세한 동작으로 세아의 소매를 툭툭 쳤다.
"한 팀장, 오늘 조 전무 뱀 대가리가 꽤 독한 걸 준비한 모양이야. 아침부터 기조실 애들이 우리 팀 R&R(R&R: 역할과 책임) 자료 죄다 긁어갔어."
채원의 목소리는 낮고 이성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세아는 눈빛으로 고맙다는 신호를 보낸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범위 내예요. 흔들리지 마세요."
이윽고 조인석 전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특유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포문을 열었다.
"강 상무, 그리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한세아 팀장.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더 리본 서울' 론칭이 코앞인데, 내부 직원들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특히 한 팀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사내에 돌고 있고 말이지."
조인석의 뱀 같은 눈길이 세아의 얼굴에 머물렀다. 세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 전무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하지만 제 건강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일정 또한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지장이 없다라……."
조 전무가 픽 웃으며 비서가 건넨 두꺼운 기획안 서류를 테이블 중앙으로 툭 던졌다.
"하지만 말이야, '더 리본 서울'은 우리 엘리시안의 사활이 걸린 플래그십 몰이야. 한 팀장의 개인적인 열정만으로 끌고 가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요. 그래서 이번 기조협 안건으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브랜딩 디렉팅 권한을 외부 대기업 연합 대행사인 'H&K'로 이관하고, 기존 팀은 마케팅 실행 보조 조직으로 축소 개편하는 안을 상정하고자 합니다."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부서 해체. 그리고 외부 대행사로의 권한 이양. 이것은 단순한 업무 조정이 아니었다. 한세아가 지난 몇 달간 밤을 새워 가며 다져온 '더 리본 서울'의 브랜딩 아이덴티티를 통째로 빼앗고, 그녀를 사내에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조 전무의 라인에 선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대형 에이전시의 노하우와 인프라를 활용하는 것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훨씬 안전하죠." "한 팀장이 유능한 건 알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규모는 일개 팀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박의 칼날 속에서, 세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이 정도 도발에 무너질 그녀가 아니었다. 세아는 슬그머니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의 미간이 좁혀지며, 그의 주먹이 테이블 아래에서 단단히 쥐어지는 것이 보였다. 도현이 입을 열려던 찰나, 세아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주의 뒤에 숨어 구원받는 여주인공 따위는 애초에 그녀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전무님 말씀대로, '더 리본 서울'은 엘리시안의 사활이 걸린 플래그십 몰입니다."
세아의 목소리는 회의실의 차가운 대리석 벽에 부딪혀 맑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빔프로젝터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띄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외부 대행사인 H&K에 이 프로젝트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어허, 한 팀장. 지금 기조실의 결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건가?"
조 전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세아의 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화면에는 복잡한 수치와 붉은색 그래프들이 가득 찬 데이터 시트가 나타났다.
"이것은 제가 민채원 과장과 협력하여 지난 3년간 H&K가 진행한 유사 플래그십 몰의 브랜딩 아웃풋과 비용 대비 효율성(ROI)을 분석한 독점 보존 기획 데이터입니다."
세아의 손끝이 화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H&K는 전형적인 '공장형 기획'을 하는 곳입니다. 화려한 비주얼을 내세우지만, 공간의 역사성과 타깃 고객의 정서적 유대감을 이끌어내는 데는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브랜딩 한 'L 몰'과 'K 스퀘어'는 오픈 후 6개월 뒤 방문율이 각각 42%, 50% 급감했습니다. 반면, 저희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이 제안한 '스토리텔링형 로컬 브랜딩' 안은 사내 여론 조사 및 잠재 고객 2,000명을 대상으로 한 FGI(포커스 그룹 인터뷰)에서 선호도 87%를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기획안의 핵심 페이지를 넘겼다. 6화에서 도서실을 샅샅이 뒤져 찾아냈던 '은하백화점' 부지의 역사적 맥락과, '더 리본 서울'이라는 이름이 가진 '재생(Reborn)'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완벽한 메커니즘이 화면을 채웠다.
"외부 대행사에 이관할 경우 발생하는 추가 용역 비용만 45억 원입니다. 반면 저희 안을 유지할 경우, 기존 리소스를 활용해 예산을 30% 절감하면서도 팬덤 층을 확실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전무님, 45억 원의 불필요한 지출과 브랜드 정체성의 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H&K를 고집하시는 합리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명확한 데이터를 통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조 전무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완전히 걷혔다.
세아가 제시한 데이터는 빈틈이 없었다. 비용 절감, 여론 동의, 그리고 독보적인 브랜딩 퀄리티까지. 조인석이 준비한 '부서 해체' 카드는 세아의 압도적인 실력과 완벽한 논리 앞에 그저 비열한 사내 정치 질에 불과하다는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회의실 곳곳에서 조 전무 라인이 아닌 중립 성향의 임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음, 한 팀장 말이 일리가 있군. 굳이 45억을 더 들여서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가 있나?" "데이터가 확실하네. 기존 안으로 가는 게 맞겠어."
세아는 턱을 치켜세우며 조 전무를 쏘아보았다.
"이상 브리핑을 마칩니다. 디렉팅 권한 이관 안건은 기각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조 전무는 부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석이었습니다, 한 팀장.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열정이 아주 대단하군. 이번 안건은 보류하도록 하지."
완벽한 승리였다. 사내 여론은 완전히 세아의 편으로 기울었고, 조인석의 음모는 시작되기도 전에 처참하게 분쇄되었다. 민채원 과장이 테이블 아래로 세아의 손을 살짝 쥐며 축하의 프레셔를 보냈다.
하지만 세아는 기뻐할 틈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도현에게로 향했다. 도현은 상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지만, 그의 상태가 극도로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세아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도현의 이마 템플 부근에 푸른 정맥이 굵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의 호흡은 눈에 띄게 가빠져 있었고,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싱크가…… 오고 있어.'
세아의 가슴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세아 본인은 지독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조 전무를 격퇴했지만, 내면에서는 과거 참사의 기억과 실패에 대한 공포가 뒤엉켜 미세한 공황 발작의 전조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100m 이내에 있던 도현에게로 전이되었다.
도현은 세아의 공황과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흡수하며, 전신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압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것이 세아에게도 환각처럼 느껴졌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지."
도현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회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임원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인석 전무 역시 세아를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떴다.
회의실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을 때, 거리는 정확히 10m였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제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강도현……!"
세아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려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도현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피부는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오지 마…… 한세아, 오지 마……."
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 접촉하면…… 너까지 위험해. 내 체온이…… 너무 낮아."
그의 체온은 이미 34도의 한계선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세아의 공황을 흡수한 대가로 그의 온몸이 얼어붙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아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제 소꿉친구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 모습을 더는 방관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세아가 도현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 장벽을 만지는 듯한 지독한 한기가 세아의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몰려왔다.
그 순간, 도현의 입술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툭, 떨어져 세아의 하얀 셔츠 깃을 적셨다.
"도현아……?"
세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현의 신체가 세아의 품 안에서 힘없이 무너지며, 바닥을 쓸 듯 주저앉았다. 그의 감겨가는 눈동자 너머로, 지독한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