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약을 바꾼 겁니까?"
옷장 안의 좁은 틈새로 도현을 밀어 넣으며 세아는 그의 멱살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문밖에서는 민채원 과장의 앙칼진 목소리와 구두 굽 소리가 쿵쿵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아는 다급하게 수첩 속에서 노란 알약 하나를 더 꺼내 도현의 손바닥에 꾹 쥐여주었다.
"이제 빚 한 번 갚았네요. 그러니까 절 우습게 보지 마세요, 상무님."
도현의 단단한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며 옷장 문을 닫았다. 쾅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맞물리는 자석 소리만이 좁은 방 안에 울렸다.
"한 팀장님! 안에 있는 거 다 압니다! 기획안 피드백 때문에 그러니까 문 좀 열어보세요!"
민 과장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높아졌다. 세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도어록을 열자마자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민채원이 들이닥쳤다. 그녀의 뒤로는 감사팀 남직원 두 명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무례입니까, 민 과장님."
세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차갑게 가라앉혔다.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직장 상사의 정석적인 톤이었다. 민채원은 세아의 차림새와 방 안쪽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어내렸다.
"죄송해요, 한 팀장님. 근데 조 전무님 라인에서 상무님이 이 근처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제보가 들어와서요. 감사팀에서도 야근 중에 확인차 같이 나온 겁니다. 사내 규정상 공사 분리는 철칙이잖아요?"
민채원의 말은 뾰족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바쁘게 굴러가며 방 안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있었다. 세아는 팔짱을 끼며 비스듬히 문틀에 기대섰다.
"상무님이 제 자취방에 왜 옵니까? 조 전무님 안과의라도 끊어 드려야겠네요. 헛것이 보이시는 모양인데."
"그럼 방 안 좀 확인해 봐도 될까요?"
감사팀 직원이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려 하자, 민채원이 잽싸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유, 김 대리님. 신성한 팀장님 자취방에 남정네들이 들이닥치는 건 에바죠. 제가 들어가서 슥 보고 나올 테니까 거기 딱 서 계세요."
민채원은 세아를 슥 밀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밑과 욕실을 대충 훑어보더니, 도현이 숨어 있는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세아의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옷장 손잡이에 민채원의 손이 닿는 순간, 그녀가 홱 돌아서서 세아를 바라보았다.
"없네요. 진짜 없네. 김 대리님, 상무님 차는 아까 골목 나갔다니까요. 헛걸음했네, 진짜."
민채원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며 옷장 문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세아에게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 아침 기획안 회의, 조 전무가 이 갈고 나올 거예요. 데이터 보완해 놨으니까 메일 확인해요. 그리고…… 다음부턴 차 좀 멀리 대라 그래요. 눈이 몇 개인데 진짜 대가리가 깨지셨나."
민채원은 윙크를 한번 찡긋해 보이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감사팀 직원들을 이끌고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고 고요가 찾아왔다. 세아는 다리가 풀려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장 문이 천천히 열리며 도현이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세아가 쥐여준 노란 알약이 들려 있었다.
"이 약……."
도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태식 박사님이 처방해 준 내 특수 신경안정제잖아. 조 전무가 내 사물함에서 털어가려던 걸 네가 어떻게 알고 가짜 비타민이랑 바꾼 거지?"
세아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조 전무 밑에 있는 비서가 흘리는 소릴 들었어요. 상무님이 약물 중독이라는 찌라시를 주주총회 전에 터뜨릴 거라고 하더군요. 15년 전 참사 트라우마 때문에 오 박사님한테 극비리로 받아 드시던 노란 캡슐, 그거 마약류 지정 성분 섞여 있는 거잖아요. 조 전무는 그걸로 상무님을 완전히 매장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세아는 도현의 셔츠 깃을 털어주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상무님이 무너지면 제 '더 리본 서울' 프로젝트도 날아갑니다. 전 제 커리어를 지킨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공과 사, 확실히 해 두자고요."
도현은 세아의 단호한 태도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안타까움과 함께 묘한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
사흘 뒤, 엘리시안 본사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 회의실.
"이번 '더 리본 서울' 메인 테마의 총장 공간 기획안은 제가 단독으로 지휘하겠습니다."
세아의 목소리가 회의실 유리벽을 타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조인석 전무 라인의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한 팀장님, 독단적으로 진행하시다가 리스크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그룹의 사활이 걸린 건데."
정 차장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딴지를 걸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민채원 과장이 거대한 서류 뭉치와 태블릿 PC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리스크 걱정은 붙들어 매시죠, 정 차장님. 제가 지난 3년간의 유통 상권 소비 패턴이랑, 2030 세대의 공간 소비 트렌드 빅데이터를 아주 이 잡듯이 털어서 분석해 왔거든요."
민채원은 태블릿 화면을 빔프로젝터에 띄웠다. 화면 가득 정교한 그래프와 압도적인 수치들이 나열되었다. 조인석 전무의 눈귀 역할을 하던 직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한 팀장님이 기획하신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라는 테마가 현 시장에서 가장 지배적인 매출 상승 곡선을 그릴 거라는 데이터적 입증 자료입니다. 반박하실 분? 없으시면 한 팀장님 단독 지휘로 기획안 확정 짓고 바로 실행 단계로 넘어가죠. 시간도 없는데 삽질 그만합시다, 우리."
민채원의 거침없는 서포트에 세아는 든든함을 느꼈다. 사내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국 실력과 완벽한 데이터 앞에서는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법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세아는 민채원에게 다가갔다.
"고마워요, 민 과장님."
"고마우면 오늘 야근할 때 커피나 사요. 아, 그리고 한 팀장님."
민채원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조 전무가 '더 리본 서울' 설계팀 쪽에 자꾸 사람을 보내는 것 같아요. 뭔가 구린 구석을 찾으려는 모양인데,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세아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조인석이 설계팀을 뒤흔들고 있다면, 분명 그 15년 전의 참사 부지와 관련된 무언가를 건드리려는 심산이었다.
***
저녁 9시, 본사 지하 3층에 위치한 극비 아카이브 센터.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고적한 공간이었다. 사원증으로도 쉽게 열리지 않는 보안 구역이었지만, 세아는 브랜드 디렉터 권한을 이용해 겨우 내부 극비 문서 창고로 들어섰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수많은 철제 캐비닛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세아는 '15년 전 은하백화점 설계 및 시공 기록'이라고 적힌 누런 파일을 찾아 헤맸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먼지 쌓인 캐비닛 깊숙한 곳에서 마침내 낡고 두꺼운 도면 뭉치를 발견해 꺼냈다.
"이건……."
도면을 펼친 세아의 눈이 커졌다. 15년 전 은하백화점의 실측 인가전 도안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단순 가스 누출 및 노후화로 인한 붕괴로 발표되었지만, 이 도안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백화점 측이 더 많은 매장을 입점시키기 위해 비상 통풍구와 가스 누출 우회 관로를 불법으로 개조했던 흔적이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구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참사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열쇠, '비상 통풍 수동 단로 밸브'의 정확한 위치가 지하 통제실 벽면 뒤쪽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당시 이 밸브만 제때 열었어도 가스가 상층부로 역류해 대폭발이 일어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탐욕이 부른 인재(人災)의 명백한 증거였다.
세아는 숨을 몰아쉬며 스마트폰을 꺼내 도안의 구석구석을 선명하게 촬영했다. 나중에 조인석 전무가 '더 리본 서울'의 안전성 문제를 빌미로 도현과 자신을 협박하려 들 때, 이 도안은 그들의 목줄을 쥘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오태식 박사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팀장, 강 상무랑 감각이 동기화될 때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거 알고 있지? 만약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지는 체온 역전증이 오면, 심장 마비로 둘 다 급사할 수 있어. 절대로 무리하게 스킨십으로 고통을 전이받으려 하지 마.'*
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덤에 묻힌 진실을 파헤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차갑고 무거웠다.
탁한 아카이브실의 공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의 도면을 마주한 탓이었을까.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처럼 옥죄어 왔다.
"하윽……!"
세아는 도면을 쥔 채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숨이 허파로 들어가지 않고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15년 전 무너지던 백화점 건물의 굉음과 매캐한 가스 냄새가 온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황 발작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극심한 공포가 그녀를 짓눌렀다. 볼펜을 꺼내 손바닥을 찌르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볼펜이 바닥으로 뎅그렁 굴러갔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그때였다.
아카이브실의 묵직한 철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세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도현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100m 이내에서 세아의 발작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자신의 전신 신경계로 전이되는 고통을 견디며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도현의 입술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세아야…… 한세아!"
도현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가위에 짓눌린 세아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세아의 연약한 몸을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도현의 넓은 가슴이 세아의 등에 밀착되었다. 그의 뜨겁고도 차가운 손길이 세아의 가슴선을 타이트하게 쓸어올렸다.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세아의 턱을 부드럽게 치켜올리는 그의 손끝에서 정전기 같은 짜릿한 자극이 일었다.
"숨 쉬어. 내 숨 받아먹어, 제발."
도현의 떨리는 입술이 세아의 벌어진 입술 위로 겹쳐졌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인공호흡이자, 서로의 영혼을 옥죄는 고통을 나누는 처절한 접촉이었다. 도현의 깊고 깊은 숨결이 세아의 목구멍을 타고 폐부 깊숙이 흘러 들어왔다.
"읍……!"
세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현의 입술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산소와 함께, 그녀를 짓누르던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세아의 고통이 도현의 몸으로 고스란히 흡수되어 갔다.
그와 동시에 도현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아의 뺨에 닿는 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그 밀폐된 공간 속에서, 서로의 살결이 스칠 때마다 일어나는 정전기적인 열기와 쾌락은 오히려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긴박함과 본능이 뒤엉킨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아카이브실을 가득 채웠다.
세아는 자신을 안은 도현의 단단한 어깨를 꼭 쥐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그에 대한 지독한 갈망만이 남았다. 사내 연애라는 족쇄도, 조인석의 눈길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도현의 체온이 35도, 34.5도까지 떨어지는 오한 속에서도 그는 세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 깊숙한 곳으로 고개를 묻으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도현의 무거운 숨결이 세아의 예민한 귓벽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은 듯 애절하고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세아. 내가 너한테 비즈니스 이상으로 구걸하고 싶어지면, 넌 도망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