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여긴 회사입니다. 손 치우세요."
세아는 도현의 이마에 닿아 있던 자신의 손을 거칠게 빼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그의 서늘한 감각이 마치 낙인처럼 화끈거렸다. 도현의 눈동자가 갈 자리를 잃고 흔들렸으나, 세아는 얼어붙을 것 같은 그의 온도를 외면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사 구분 확실히 하겠다고 약속한 건 상무님입니다. 이런 무모한 짓, 한 번만 더 하시면 저 정말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겠습니다."
"한세아."
"기획서 검토는 다 끝난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세아는 서류철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상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차가운 대리석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현의 "절대로 멀어지지 마"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타인에게 철벽을 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도현의 그 무모한 온기 앞에서는 자꾸만 그 견고한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을 메우기도 전에, 세아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서 대리였다.
"네, 서 대리님."
- 팀장님! 큰일 났어요! 지금 감사팀 사람들이 저희 팀 자리를 다 뒤집어놓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세아의 발길이 멈췄다.
- 조인석 전무님 지시라면서, 임원과 팀장급 간의 '부적절한 밀회' 및 '정보 유출 의혹'으로 긴급 감사가 나왔다고요. 팀장님 개인 서랍이랑 더 리본 서울 기획 폴더까지 다 열어보라고 난리입니다!
세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조인석 전무. 뱀처럼 웃으며 목을 조여오는 그 인간이 드디어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도현과의 비상계단 접촉이나 사내에서의 짧은 만남들을 꼬투리 잡아 사내 연애 및 공사 분리 위반으로 엮어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지금 바로 내려갑니다. 어떤 자료도 내주지 말고 버티세요."
세아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질주하듯 내려갔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감사팀이 들이닥쳤다는 건 이미 짜인 각본이 있다는 뜻이다. 확실한 물증이 없더라도 소문만으로도 브랜드 디렉터로서의 커리어는 치명상을 입는다. 엘리시안 그룹의 제1철칙인 '공사 분리' 위반은 즉각적인 좌천과 평판 매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랭한 공기가 세아의 피부를 찔렀다. 짙은 회색 수트를 입은 감사팀 요원 세 명이 세아의 책상 주변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팀원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구석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게?"
세아는 구두 굽 소리를 낮추며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사팀장이 세아를 돌아보며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였다.
"한세아 팀장님. 최근 사내 익명 게시판 및 감사실로 접수된 내부 고발 건이 있어서 현장 실사를 나왔습니다. 신임 강도현 상무와의 부적절한 사적 관계 및 그로 인한 프로젝트 정보의 독점적 공유 의혹입니다. PC 하드디스크와 캐비닛 검수를 시작하겠습니다."
"내부 고발요?"
세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식 감사 공문도 없이, 출처 불명의 투서 한 장으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대외비 기획 자료를 털어가시겠다? 조인석 전무님이 감사팀을 개인 심부름센터로 쓰기로 하신 모양이죠?"
"말씀 삼가십시오, 한 팀장님. 저희는 사규에 따라..."
"사규요? 사규 제32조 조사 절차에 따르면, 피조사자에게 최소 24시간 전에 서면으로 조사의 목적과 범위를 통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행위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자 직권남용입니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저 역시 인사위원회에 정식으로 이의 제기하겠습니다."
감사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세아가 강하게 나오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인석의 확실한 지령을 받은 몸이었다. 쉽게 물러설 리 없었다.
"이러시면 오히려 의혹만 키울 뿐입니다. 협조하시죠."
감사팀 요원이 세아의 캐비닛으로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사무실 입구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하죠."
단정한 단발머리에 칼 같은 정장 핏을 자랑하는 민채원 상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조인석 전무의 정적 파벌이자, 오직 실적과 데이터만으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 냉철한 기회주의자. 채원은 구두 앞코를 툭툭 치며 감사팀을 쏘아보았다.
"감사팀장님, 조 전무님 라인 타시느라 눈에 뵈는 게 없나 봐요? 본부장 결재도 안 떨어진 '더 리본 서울' 핵심 기획안을 이런 식으로 반출하려 들다니. 이거 경쟁사에 유출이라도 되면 감사팀이 책임질 겁니까?"
"민 상무님, 저희는 제보에 따라..."
"그 제보라는 거, 내가 익명 투서함에 들어가는 거 똑똑히 봤는데."
채원이 한 걸음 걸어오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투서는 채원이 조인석 파벌의 과잉 반응을 유도하고 약점을 잡기 위해 슬쩍 흘린 판이었으나, 조인석 측이 이를 이용해 세아를 직접 타깃으로 삼자 판을 정리하러 나타난 것이다.
"조 전무님이 요즘 자리가 불안하신지 무리수를 두시네. 한 팀장, 기획서 보안 등급 다 올려놨지? 본부장 승인 없는 자료 이동은 전부 형사 처벌 대상이니까 감사팀 여러분도 손 조심하세요. 괜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철수하시지?"
민채원의 서슬 퍼런 경고와 세아의 논리적인 반박에 감사팀장은 결국 침을 삼키며 손을 뗐다.
"일단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만, 추가 조사는 계속될 겁니다."
감사팀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사무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만 남았다. 채원은 세아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한 팀장, 일 똑바로 해. 꼬리 밟히지 마란 말이야. 조인석이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있어. 강 상무랑 너, 둘 중 하나만 걸려도 끝장내려고 혈안이야."
"도움 주신 건 감사합니다, 상무님."
"착각하지 마. 난 널 도운 게 아니라 조인석이 판치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니까."
채원은 차갑게 돌아섰다. 세아는 책상 뒷벽에 몸을 기댔다.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15년 전 은하백화점의 그 탁하고 매캐했던 가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야.'
세아는 이를 악물고 책상 서랍에서 볼펜을 꺼내 손바닥 중앙을 깊숙이 찔렀다. 뾰족한 통증으로 공황을 지워내려 했으나, 이번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숨이 가빠오고 눈앞이 흐려졌다.
동시에, 저 멀리 100미터 이내의 집무실에 있을 도현의 상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트라우마 싱크'. 자신의 공황이 시작되면 도현 역시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과 극심한 오한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이 지독한 동기화를 끊어내려면 밀접 접촉이 필요했다. 하지만 감사팀의 밀정들이 사방에서 눈을 부릅뜨고 매복해 있는 이 상황에서 도현과 단둘이 만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세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내 메신저를 켰다. 도현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1층 야외 테라스 카페. 10분 뒤.]
***
엘리시안 사옥 1층 야외 테라스는 점심시간을 앞두고 사원들로 붐볐다.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유리창 너머로 본사 임직원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장 열린 공간이었다.
세아는 쟁반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쳐 들고 테라스 구석 테이블로 향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전신이 사르르 떨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공황의 무게 때문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저 멀리 테이블에 도현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완벽하게 재단된 네이비 수트를 입고 태블릿을 보고 있었지만, 세아의 눈에는 보였다. 그의 하얗게 질린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을. 세아가 가까워질수록 도현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현은 세아의 공황과 통증을 온몸으로 대신 받아내며 버티고 있었다.
세아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감사팀의 밀정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몇 걸음 뒤 벤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절대 사적인 감정을 보여서는 안 된다.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가면을 써야 했다.
"상무님, 요청하신 더 리본 서울 기획 수정안입니다."
세아는 사무적이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보고서 검토하시기 전에 목부터 축이시죠."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젖은 눈동자에는 세아를 향한 걱정과, 신체 감각을 타고 흐르는 통증의 흔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갑고 오만한 본부장의 표정으로 돌아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팀장, 일 처리가 늦군요. 감사팀 소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송구합니다. 보안 절차를 강화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세아는 자연스럽게 커피잔 하나를 들어 도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도현이 컵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고, 세아는 컵 홀더 부분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컵 홀더의 좁은 틈새에서 완전히 맞물렸다.
스르륵.
세아의 따뜻한 손가락이 도현의 얼음장 같은 손등과 손바닥 안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음료 트레이를 건네다 실수로 손 끝이 스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 컵 홀더와 쟁반의 교묘한 각도 뒤에 숨겨진 그들의 손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절박하게 서로를 움켜쥐고 있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순간, 스파크가 튀듯 강렬한 자극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들이쉬던 숨을 멈췄다. 허파를 조여오던 무거운 바위가 순식간에 들어 올려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뿌연 안개가 걷히고, 터질 것 같던 심박수가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반면, 도현의 손가락을 통해 세아의 모든 고통과 공황의 잔재가 무서운 속도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도현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그의 하얀 피부 위로 닭살이 돋으며 체온이 급강하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도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은 채, 오히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세아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자신의 몸이 얼어붙을지언정 세아가 편안해질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 밀도 높은 스킨십은 겉으로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이루어졌다.
주위의 감사팀 밀정들은 그저 굳어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두 사람은 그저 서류와 결재를 논하는 냉랭한 상사와 부하 직원일 뿐이었다.
"이번 기획안, 예산 삭감 폭이 너무 큽니다."
도현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지극히 차분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사적인 텐션을 감추었다.
"조 전무 측의 견제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데, 대비책이 부실하군요."
"그 부분은 이미 2차 안에서 보완했습니다. 예산안 대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재조정했으니 확인해 보시죠."
세아 역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도현의 차가운 한기가 세아의 따스한 온기와 뒤섞이며 묘한 열감을 만들어냈다. 들키면 파멸인 사내에서, 적들의 눈을 바로 앞에 두고 벌이는 이 은밀하고 농밀한 접촉은 심장을 터뜨릴 듯한 스릴을 선사했다.
마침내 세아의 호흡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현의 혈색도 미미하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충분히 흡수되었다.
세아는 서서히 힘을 빼며 도현의 손아귀에서 손가락을 살며시 빼냈다. 끝까지 떨어지기 싫은 듯 아쉽게 스쳐 지나가는 손끝의 잔향이 길게 이어졌다.
"그럼, 기획서 검토 부탁드립니다."
세아는 쟁반을 품에 안고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멀리서 감시하던 감사팀 밀정들이 아무런 건덕지도 찾지 못했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뜨는 모습이 세아의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완벽한 승리였다. 조인석이 놓은 덫을 그들의 눈앞에서 비웃어준 셈이었다.
세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섰다.
그 순간, 도현이 태블릿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아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듯하더니, 찰나의 순간 상체를 비스듬히 굽혀 세아의 귀밑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 닿는 그의 숨결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떨림은 가라앉았는데."
도현의 입술이 세아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보일러 열기처럼 일렁였다.
"심장은 더 크게 뛰는데. 비즈니스라 참기 힘드네, 한세아."
그가 남긴 서늘하고도 잔인하게 달콤한 속삭임이 세아의 귓잔등을 붉게 물들였다.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정한 상무의 걸음걸이로 로비를 향해 걸어갔다. 세아는 제자리에 굳어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공황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전 도현의 속삭임이 그녀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