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비품실의 공기 사이로 만년필 촉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세아가 내민 하얀 용지 위, 급하게 휘갈겨 쓴 '비즈니스 스킨십 계약서'라는 글자 위로 도현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겹쳐졌다.
"사인하세요, 강도현 상무님. 우리의 안전한 사내 생활을 위해서."
도현은 펜을 쥔 채 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열감과 오한이 뒤섞인 이채가 서렸다.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그가 서명란에 거침없이 제 이름을 적어 내렸다. 굵고 정갈한 서체로 새겨진 '강도현'이라는 석 자가 세아의 이름 바로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사인했다."
도현이 펜을 선반 위에 툭 내려놓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비품실의 좁은 선반 모퉁이로 세아의 허리가 닿았다. 도현의 서늘한 숨결이 뺨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근데 한세아. 네가 간과한 게 하나 있어."
"뭡니까?"
세아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순전히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공황의 잔재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발작 수치 70%라는 거."
도현이 세아의 깃을 가볍게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눈빛만큼은 타오르듯 뜨거웠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지? 내 몸이 얼어붙는 속도와 네 숨이 막히는 속도가 매번 소수점 자리까지 똑같을 것 같아?"
"계산은 기획자의 몫입니다. 상무님은 그저 제 신호에 맞춰 물리적인 접촉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철저히 공적으로만."
"그래, 공적으로."
도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서늘한 기운이 멀어지자,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은 셔츠 소매 단추를 다시 채우며 비품실 문고리를 잡았다.
"사흘 뒤에 있을 '더 리본 서울' 1차 브랜딩 보고회, 허술하게 준비했다간 조 전무 라인 하이에나들한테 뼈째로 씹힐 줄 알아. 한 팀장."
"걱정 마십시오. 제 커리어에 흠집 내는 짓은 죽어도 안 하니까."
세아는 품에 안은 서류철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잉크 향과 도현의 살냄새가 뒤섞인 문서를 품에 안은 채, 그녀는 비품실의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이것으로 완벽한 방어벽을 쳤다고 생각했다. 그와 엮인 끔찍한 감각의 교류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룰을 만들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사내 정치의 칼날 위에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 * *
사흘 뒤 오전 10시, 엘리시안 본사 18층 대회의실.
"한 팀장, 이번 기획안은 너무 모험적인 것 아닌가? 은하백화점 부지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차분하고 정적인 테마로 가야 유족들 반발이 적을 텐데."
회의실 상석에 앉은 조인석 전무가 찻잔을 둥글게 돌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조 전무의 양옆으로 포진한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조 전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괜히 화려한 복합 쇼핑몰 유치한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뭇매라도 맞으면 브랜드 이미지 타격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차라리 무난한 조경 공원으로 타협하는 게……."
세아는 빔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서서 포인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회의실 벽면에 띄워진 '더 리본 서울'의 조감도와 과거 은하백화점 참사 당시의 구획 도면이 겹쳐 보이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탁한 오피스의 공기, 밀폐된 회의실의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슴 중앙이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15년 전,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아래에서 나를 짓누르던 그 퀴퀴한 가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조인석이 파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지는 거야.'
세아는 입술을 깨물며 재킷 주머니 속에 넣어둔 만년필을 손바닥 깊숙이 찔러 넣었다. 뾰족한 촉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으로 공황의 감각을 지우려 애썼다.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가리키는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인석의 입꼬리가 야비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승리감의 미소였다.
"한 팀장? 왜 말이 없나? 몸이 어디 안 좋은가 보군. 역시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맡기기엔 아직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리가……."
그때였다. 회의용 테이블 맞은편 상석에 앉아 있던 도현의 눈동자가 세아를 향해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호흡 역시 순식간에 가빠지는 것이 보였다. 트라우마 싱크의 신호였다. 세아가 느끼는 숨 막히는 공포와 통증이 고스란히 도현의 전신 신경계로 전이되고 있었다.
도현은 테이블 밑으로 길게 뻗은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세아가 서 있는 교단 바로 아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구두 끝으로 세아의 힐 끝을 지그시 밟아 내렸다.
툭.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세아의 구두 등 위로 도현의 단단한 가죽구두가 포개어졌다. 얇은 스타킹을 사이에 두고 도현의 묵직한 압박감이 전해진 순간, 세아의 허파를 죄어오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막혔던 숨 통이 한순간에 트였다.
'싱크…….'
도현이 고통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아는 눈을 크게 뜨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으나, 그의 한쪽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테이블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대변했다.
감각이 수혈되자, 세아의 이성은 무서운 속도로 회복되었다. 그녀는 단박에 포인터를 고쳐 잡고 조인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전무님,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더 리본 서울'은 단순한 추모 공간이 아닙니다."
세아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맑고 단단하게 울렸다. 방금 전까지 쓰러질 것 같던 기획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장악력이었다.
"추모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한 극복이 됩니다. 과거의 아픔 위에 세워진 이 공간이 서울에서 가장 빛나는 랜드마크로 부활하는 것, 그것이 피해자들에 대한 가장 완전한 위로이자 엘리시안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가치입니다. 저희가 준비한 '스마트 리본 가든'의 연간 기대 집객 효과는 단순 조경 공원 대비 400% 이상입니다. 수치로 증명되지 않는 막연한 공포 마케팅에 휘둘려 기업의 미래 먹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뭐? 공포 마케팅이라니!"
조인석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세아는 쐐기를 박듯 기획안의 상세 수치 데이터를 화면에 띄웠다.
"데이터 분석 결과, 참사 이후 15년간 해당 권역의 소비 정체율은 12%였습니다. 이를 타개할 혁신적인 브랜딩 없이 적당히 타협한 공원을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주주들에 대한 배임입니다. 제 기획안의 타당성은 이미 이사회 임원 과반수의 사전 검토를 마친 상태입니다."
회의실 곳곳에서 감탄 섞인 속닥임이 터져 나왔다. 조인석은 찻잔을 내려놓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았다. 완벽한 논리에 밀린 그가 할 수 있는 반박은 없었다.
"좋군. 한 팀장의 자신감이 아주 대단해. 그럼 어디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도록 하지."
조인석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회의 종료를 선언했다. 임원들이 하나둘 퇴장하는 와중에, 세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닿아 있던 도현의 구두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아와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미세하게 무거워 보였다. 세아는 제 가슴줄기를 쓸어내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그것은 공황 때문이 아니라 도현이 남기고 간 서늘한 잔상 때문이었다.
* * *
한 시간 뒤, 세아는 결재 서류를 핑계로 상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들려오는 도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무실 안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놓은 탓이었다. 도현은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보이스 레코더가 쥐어져 있었다.
"상무님, 서류 결재……."
"이것부터 들어봐."
도현이 세아의 말을 자르며 레코더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칙칙거리는 기계음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전담 의사이자 참사의 정신의학적 기저를 연구하는 오태식 박사의 목소리였다.
[- ……따라서 두 사람의 트라우마 싱크는 단순한 심인성 반응을 넘어선 생체 신호의 등가교환으로 보아야 하네. 고통을 흡수하는 주체는 상대방의 뇌파와 감각 신경을 강제로 동기화시키는 과정에서 심각한 체온 저하를 겪게 되지. 접촉을 통해 통증을 완수할수록, 고통을 대신 가져가는 자의 체온은 1회당 평균 0.5도씩 급감하네.]
세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 박사의 목소리는 냉혹하리만치 무미건조하게 이어졌다.
[-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누적 효과야. 완화 접촉이 단시간 내에 반복되거나 깊어질 경우, 흡수자의 체온은 한계선인 34도 이하로 떨어질 수 있네. 34도 이하로 내려가는 순간, 인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면역 체계를 차단하고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지. 이른바 '체온 한계선의 역전 혼수'일세. 심각할 경우 급성 심장 마비를 유발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극도로 위험한 현상이지. 두 사람의 접촉은 구원인 동시에, 한쪽의 생명을 갉아먹는 칼날이라는 걸 명심하게.]
틱, 소리와 함께 녹음이 끝났다.
상무실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세아는 오 박사의 경고가 적힌 녹음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0.5도씩 떨어지는 체온. 34도 이하 도달 시 심장 마비와 혼수.
그것은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었다. 도현이 매번 자신을 구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칩을 던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걸 왜 이제야 보여주는 겁니까?"
세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에게서 풍기는 한기가 살죽을 파고들었다.
"알 필요 없으니까. 넌 기획안에만 집중하면 돼."
도현이 담담하게 말하며 레코더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태도는 지독하리만치 냉정했다. 하지만 세아의 눈에는 그의 흐트러진 호흡과,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하얗게 질린 목덜미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알 필요가 없다니요? 당신 바봅니까? 내 고통을 가져갈 때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런데 방금 회의실에서 왜……!"
"그럼 거기서 조인석이 보는 앞에 쓰러질 생각이었어?"
도현이 세아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지독한 고집이었다.
"한세아, 네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 빌어먹을 참사 부지 위에 네 손으로 직접 브랜딩을 하겠다고, 15년을 이 악물고 버텨왔잖아. 겨우 조인석 따위한테 꼬투리 잡혀서 날아가는 꼴, 난 죽어도 못 봐."
"그렇다고 당신 목숨을 걸어? 난 이런 식으로 구원받고 싶지 않아!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세아는 분노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여 몸을 떨었다. 도현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타인에게 철벽을 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그녀의 방어기제가, 도현의 무모한 희생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세아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거칠게 던져놓고, 도현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하얗게 질린 손을 낚아챘다.
얼음장 같았다.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은 듯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손이 이 모양인데…… 왜 맨날 당신만 버리는 결정을 하냐고!"
세아는 도현의 차가운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따뜻한 세아의 온기가 도현의 뺨에 닿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세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호통치듯 읊조렸다. 뺨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서늘함에 가슴이 저려왔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네가 얼어 죽으면, 나 혼자 살아서 뭐 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도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세아의 따뜻한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댄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가에 어린 서늘한 외로움과 죄책감이 세아의 온기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세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들어 도현의 굳어버린 손가락 사이에 강제로 쥐여주었다.
"이거 마셔요. 그리고 당분간 비즈니스 접촉은 전면 금지입니다. 당신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도현은 세아가 쥐여준 따뜻한 차를 내려다보다가,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대신, 머그잔을 내려놓고 세아의 두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의 단단한 손아귀가 세아의 손목을 이끌었다. 도현은 세아의 따스한 두 손을 제 차가운 이마에 천천히 끌어당겨 대며, 깊고 젖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네가 쓰러지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 체온이 얼어붙는 게 나아."
그의 이마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와, 세아의 손바닥에서 뿜어지는 온기가 좁은 상무실의 공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충돌했다. 도현이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한테서 절대로 멀어지지 마, 한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