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아? 정말 너야?"
귓가를 때리는 강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품에서 풍기는 체취와 단단한 골격은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했다. 세아의 뇌리가 거세게 점멸했다. 심장 박동 수치가 정상 궤도로 내려앉으며 굳어 있던 손끝에 피가 돌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이성이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엘리시안 그룹 본사 사옥 12층 비상계단이다.
사방이 시멘트로 둘러싸인 이 좁고 음침한 공간에서 신임 본부장 상무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 디렉터가 땀에 젖은 채 껴안고 있다가 누구 하나에게라도 발각된다면? 그 즉시 내일 아침 사내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인기 글 1위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신임 강 상무, 부임 첫날부터 여팀장과 비상계단에서 밀회' 같은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말이다.
"이거 놓으세요, 강 상무님."
세아는 도현의 단단한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이 악물고 내뱉은 목소리에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비즈니스 텐션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도현의 손아귀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세아의 공황을 고스란히 흡수해 간 탓에 그의 손끝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넓은 어깨는 미세한 오한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오직 세아 한 사람만을 담은 채 집요하게 번뜩였다.
"너 지금 나보고 상무님이라고 했냐?"
"그럼 상무님을 상무님이라 부르지, 뭐라고 부릅니까? 여기는 회사입니다. 공과 사는 구분하셔야죠."
세아는 제 손목을 움켜쥔 도현의 손가락을 한 손가락씩 억지로 떼어냈다. 15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의 애틋함 따위, 지금 이 냉혹한 서바이벌 현장에서는 사치에 불과했다. 조인석 전무 라인이 사방에 눈을 뜨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엘리시안 그룹이다. 여기서 틈을 보였다간 살아남을 수 없다.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건 여전하네."
도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마침내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세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구겨진 가디건 깃을 털어내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칼같이 냉정했다.
"강도현 상무님."
세아가 아주 낮고 명확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15년 전 일은 15년 전에 끝났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을 공유하든, 어떤 과거가 있든 간에 그건 회사 문밖에서의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상무님과 저는 오직 계약과 실적으로만 대화하는 상사와 부하 직원일 뿐입니다. 회사 안에서는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마십시오.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도 마시고요."
"한세아."
"한세아 팀장입니다. 다음 보고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 상무실에서 뵙겠습니다."
도현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달싹였지만, 세아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묵직한 방화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세아는 도현을 그 어두운 비상계단 안에 홀로 남겨둔 채 밝고 냉정한 사무실의 복도로 걸어 나왔다.
***
"세아 씨, 정신 체리(Cherry)해. 지금 우리 목줄이 단체로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브랜드 커뮤니케이션팀의 회의실. 자리에 앉자마자 부팀장 민채원이 노트북 화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데이터밖에 모르는 기회주의자처럼 굴던 채원의 얼굴이 사뭇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채원 씨?"
세아는 볼펜을 꾹 쥐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손바닥에 볼펜 끝이 파고드는 약한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다.
"방금 내 정보원한테 들은 건데, 조인석 전무 비서실에서 움직였어. 아까 점심시간 지나고 나서 12층 비상계단 쪽 CCTV 녹화본을 요청해서 받아 갔다더라고. 보안팀장한테 아는 사람 있어서 겨우 알아낸 거야."
세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까 비상계단에서의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CCTV요? 비상계단 안쪽은 사각지대잖아요."
"내부는 안 찍히지. 근데 복도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간 타임라인은 다 찍히잖아. 한세아 팀장이 들어가고, 3분 뒤에 신임 강도현 상무가 들어가고, 한참 뒤에 각자 나왔다? 조 전무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이걸 그냥 넘어갈 리가 없잖아. 냄새 맡은 거야. 강 상무 약점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인간이니까."
채원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조인석 전무는 부하 직원에게 차를 대접하며 웃는 얼굴로 목을 조르는 뱀 같은 자였다. 신임 상무로 부임하자마자 후계 구도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도현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 시각, 상무 집무실 안.
도현은 책상 위에 가죽 가방을 올려둔 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들이켰지만, 세아의 공황을 대신 짊어진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손가락 끝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때 가방의 지퍼 틈새로 삐죽이 삐져나온 하늘색 광채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고 영롱한 아쿠아마린 펜던트 상자였다. 15년 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세아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
도현은 그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다, 비서실을 통해 들어온 보안팀의 연락을 떠올렸다. CCTV 열람 이력에 조인석 전무의 비서가 이름을 올렸다는 보고였다.
"벌써부터 냄새를 맡고 움직이시겠다……."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맹수의 그것처럼 변했다. 그는 아쿠아마린 펜던트 상자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 지퍼를 굳게 잠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세아가 아까 접견실 소파 밑에 떨어뜨렸던 불투명한 회색 통을 꺼냈다.
"아직은 들키면 안 돼. 한세아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도현은 수화기를 들어 보안팀에 짤막한 명령을 하달했다.
"12층 비상계단 인근 CCTV 전원 및 배선 점검 명목으로 오늘 자 녹화본 전체 서버 포맷하세요. 상무 지시입니다."
***
오후 4시, 엘리시안 본사 12층 공용 화장실 앞 복도.
세아는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더 리본 서울'의 브랜딩 기획안 수정 건으로 복잡했다. 15년 전 참사의 흔적 위에 세워지는 몰이라니, 기획을 할 때마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모퉁이를 돌던 세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이, 한 팀장. 마침 잘 만났네."
느릿하고 끈적한 목소리. 카키색 수트를 유려하게 차려입은 조인석 전무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세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 비서들이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었다.
"아,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세아는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신임 강 상무랑은 원래 알던 사이인가? 아까 비상계단에서 아주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조 전무가 세아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담배 냄새와 인공적인 향수 냄새가 섞여 세아의 코끝을 찔렀다. 그 순간, 세아의 시야가 기분 나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숨이…… 안 쉬어져.'
귓가에서 15년 전 은하백화점 붕괴 당시의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매캐한 가스 냄새가 환청처럼 피어올랐다. 조 전무의 뱀 같은 눈빛이 세아의 숨통을 조여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손끝이 급격하게 차가워지며 심장 박동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삐비빅, 삐비빅.
치마 주머니 속 스마트워치가 위험 수치를 경고하는 진동을 울려댔다. 신체 통증 수치 75% 돌파. 여기서 쓰러지면 모든 게 끝장이다. 조 전무 앞에서 약점을 노출하는 꼴이 된다.
"왜 대답이 없나, 한 팀장? 얼굴색이 아주 흙빛인데. 무슨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사이인가?"
조 전무가 세아의 어깨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탁-!
강한 손길이 조 전무의 손목을 중간에서 낚아챘다.
"조 전무님, 제 직원을 사적으로 불러내서 곤란하게 만드시는 건 사양하고 싶군요."
강도현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도현이 세아와 조 전무 사이에 거대한 벽처럼 끼어들었다. 도현의 눈동자는 이미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호흡 역시 거칠어지고 있었다. 트라우마 싱크. 100m 이내에 존재하는 세아의 극심한 공황이 도현의 전신 신경계로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었다.
"오, 강 상무.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한 팀장과 자네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말이야."
조 전무가 비열하게 웃으며 손목을 빼냈다.
도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세아의 통증이 동기화되면서 그의 전신에도 오한과 함께 심장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들이닥쳤다. 이대로 가다간 둘 다 이 자리에서 무너진다. 조인석의 눈앞에서 말이다.
"업무 협의가 급해서 말입니다. 한 팀장, 따라와."
도현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세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 전무의 시선이 채 닿지 않는 복도 끝, 탕비실 옆의 좁고 어두운 비품실 문을 발로 차듯 열어젖혔다.
쾅-!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도현은 문을 걸어 잠갔다.
사방이 A4 용지 박스와 각종 비품들로 꽉 찬,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공간. 세아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하아, 하아……!"
"쉿, 조용히 해. 밖에 조 전무 비서들이 있어."
도현이 세아의 등 뒤로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아 누르듯 벽으로 밀착시켰다.
넓고 단단한 도현의 앞가슴이 세아의 떨리는 등과 맞닿았다. 도현의 두 팔이 세아의 허리를 옭아매듯 단단히 감싸 안았다.
"하아…… 흡……!"
밀접 접촉이 개시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세아의 폐부로 산소가 흘러들어왔다. 그녀를 질식시킬 것 같던 공황의 해일이 도현의 몸속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갔다. 등가교환의 법칙. 세아의 통증 수치가 20% 이하로 뚝 떨어지는 동안, 도현의 체온은 사정없이 급감했다.
"윽……."
도현이 세아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이 마치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식어가며 덜덜 떨렸다. 세아는 그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 기괴하고도 절대적인 공생 관계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도현아……."
비명처럼 흘러나온 그의 이름에 도현은 대답 대신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제발."
도현의 목소리가 이빨을 부딪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체온을, 자신의 면역력을 깎아 먹고 있다. 소꿉친구라는 이름 아래 지독하게 얽힌 이 저주이자 축복을, 더는 감정적으로만 방치할 수 없었다.
밖에서 조 전무 일행의 발소리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이 들렸다.
세아는 서서히 안정을 찾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도현의 품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도현의 파랗게 질린 입술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강도현 상무님."
세아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기획자의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계약하죠."
"……뭐?"
도현이 오한으로 떨리는 와중에 눈을 크게 떴다.
세아는 품고 있던 서류철에서 빈 회의록 용지 한 장을 꺼내 비품실 선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거침없는 필체로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우리 둘 사이의 물리적인 팩트입니다. 서로가 반경 100m 이내에 있을 때 통증과 공황이 동기화되며, 밀접 접촉을 통해서만 완화된다. 맞습니까?"
"……어."
"그리고 고통을 완화해 주는 대가로 상무님의 체온이 급감하고 면역 체계가 무너진다. 이것 역시 팩트죠.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할 '사내 리스크'입니다."
세아의 잉크 마른 글씨가 하얀 용지 위를 수놓았다.
[감각 동기화 리스크 관리에 관한 비즈니스 스킨십 계약서]
도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 위급하고 절박한 순간에, 이 여자는 '계약서'를 들이밀고 있었다. 과연 한세아다웠다. 타인과의 사적 관계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철벽을 치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과의 신체 접촉마저 비즈니스 포맷으로 규격화하려는 것이다.
"첫째, 본 계약은 엘리시안 그룹 사내 보안과 공사 구분을 최우선으로 한다."
세아가 붉은 입술을 열어 차갑게 읊조렸다.
"둘째, 발작 징후가 감지될 시, 타인의 눈을 피해 사각지대(비품실, 탕비실, 비상계단 등)에서만 접촉을 감행한다. 사적인 감정은 일절 배제한다."
"한세아, 너 진짜……."
"셋째."
세아는 도현의 말을 자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주도권은 이제 세아에게 있었다.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약자가 아닌, 리스크를 통제하는 대등한 계약자로서의 선언이었다.
"스킨십은 가볍게 안기 혹은 손잡기만. 심장이 맞닿는 포옹은 발작 수치 70%가 넘었을 때만 허용합니다."
세아는 만년필을 도현의 손가락 사이에 쥐여주었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세아의 손가락과 가볍게 스쳤다. 서늘한 잉크 향이 비품실의 탁한 공기 사이로 번져나갔다.
"사인하세요, 강도현 상무님. 우리의 안전한 사내 생활을 위해서."
세아의 단호한 시선 아래, 도현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계약서 종이 위로 미끄러지듯 겹쳐왔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