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한 팀장님, 오늘 신임 상무 출근하시는 거 아시죠? 미국 본사에서 뼈를 깎아 가며 실적 올리고 온 로열패밀리라던데, 성격이 아주 불도저 수준을 넘어선 기갑부대라네요. 오늘 기획안 브리핑 때 꼬투리 잡혀서 사직서 던지는 사람 나올까 봐 나 벌써 청심환 먹었잖아."

대리 민채원이 탕비실에서 갓 뽑아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호들갑을 떨었다. 플라스틱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의 바쁜 손놀림을 따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세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듀얼 모니터 중 왼쪽 화면에 띄워진 '더 리본 서울 브랜드 가이드라인 v4.2_최종_진짜최종.pdf' 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우스 휠을 내리는 그녀의 손가락끝은 칼로 잰 듯이 정확했다.

"민 대리님."

"예, 팀장님!"

"신임 상무님이 기갑부대든 외계 연합군이든, 우리 팀이 준비한 킬러 콘텐츠 제안서만 완벽하면 태클 걸 명분 없습니다. 그리고 청심환은 법인카드로 청구 안 되니까 개인 경비 처리하세요."

"에이, 차가우셔라. 우리 세아 팀장님은 피 대신 차가운 에스프레소가 흐르는 게 분명해."

채원이 혀를 쏙 내밀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공과 사의 경계선은 그녀에게 목숨줄과 같았다. 대기업 엘리시안 그룹에서 서른둘의 나이로 브랜드 디렉터 팀장 자리를 꿰찬 것은 오직 이 지독한 철벽 방어기제 덕분이었다. 사적인 감정은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쓸모없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슬랙 메신저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마케팅팀 김 과장: 단톡방 전파. 신임 상무 로비 통과하셨답니다! 다들 각 잡으세요!] [디자인팀 박 대리: 헐, 진짜 존잘이라는데 사실임? 사진보다 실물이 미쳤다는데?] [민채원 대리: 존잘이면 뭐 합니까, 우리 목을 벨 단두대 조작법을 배워오신 분인데ㅠㅠ]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사소한 흠집 하나로도 라인이 갈리고 목이 날아가는 엘리시안 특유의 사내 정치 생태계였다. 다들 모니터 뒤로 눈치를 보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키웠다. 전형적인 '일하는 척' 데시벨의 상승이었다.

세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16층 통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뼈대를 드러낸 채 솟아오르고 있는 '더 리본 서울'의 공사 부지가 보였다.

그 순간, 세아의 척추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쫙 끼쳤다.

그곳은 15년 전, 시커먼 유독가스와 비명으로 가득 찼던 은하백화점 참사의 부지였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아래서 어머니의 손을 놓치고 혼자 살아남았던 그 아비규환의 기억이, 거대한 빌딩의 실루엣 위로 겹쳐 보였다.

‘아, 안 돼. 하필 오늘 가뜩이나 중요한 날에…….’

가슴이 꽉 막혀왔다. 목구멍에 딱딱한 돌덩이가 걸린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허파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급격하게 흐려지며 검은 암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세아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스틸 볼펜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뾰족한 볼펜 끝을 왼쪽 손바닥 한가운데에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지독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버텨야 해.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야. 조인석 전무 라인 놈들이 눈을 부릅뜨고 내 빈틈을 찾고 있어. 첫날부터 공황 발작으로 쓰러진 팀장이라니, 사내 찌라시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통증조차 먹히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분당 심박수가 140을 넘어가는 것이 손목의 스마트워치 진동으로 느껴졌다. 경고음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어깨가 잘게 떨렸다.

"어? 팀장님, 안색이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저 멀리서 채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세아는 대답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한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잠깐…… 화장실 좀……."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세아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비틀대며 복도로 나갔다. 화장실은 너무 개방되어 있었다. 언제든 청소 노동자나 타 부서 직원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장 안전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은 오직 하나, 구석진 비상계단뿐이었다.

그녀가 복도 벽을 짚으며 비상계단 쪽으로 한 걸음씩 옮길 때였다.

쿵. 쿵. 쿵.

저 멀리 전용 엘리베이터 홀에서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수행원들의 긴장된 발걸음 소리 사이로, 독보적으로 곧고 단호한 발소리가 섞여 있었다.

강도현이었다.

그가 16층 로비에 발을 딛는 순간, 세아의 온몸을 지배하던 통증이 비정상적인 궤도로 치솟았다.

‘뭐지……?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단순한 공황장애의 수준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거대한 망치로 척추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호흡 곤란이 극에 달하며 신체 통증 지수가 80%를 훌쩍 넘어섰다.

동시에, 로비에 들어서던 강도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상무님? 무슨 일이십니까?"

비서실장의 다급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도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완벽하게 다듬어진 포커페이스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마와 목덜미에 핏대가 섰고, 값비싼 이탈리아제 슈트 안쪽이 순식간에 축축한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고 사정없이 비트는 듯한 극심한 통증.

이것은 자신의 통증이 아니었다. 15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의 낙인.

'트라우마 싱크(Trauma Sync)'.

그녀가 이 건물 안에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다.

"상무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의료진을 부를까요?"

"비켜."

도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평소의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간데없고, 짐승 같은 절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행원들을 거칠게 밀치고 걸음을 옮겼다. 통증의 진원지가 가리키는 방향은 오른쪽 구석, 비상 대피로와 연결된 복도 끝이었다.

100m. 80m. 50m.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고통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다. 도현은 걷는 것조차 버거워 벽을 짚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세아다. 한세아가 여기 있어.’

도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상계단 옆 임원 접견실 소파 구역으로 들어섰다. 극심한 통증에 몸이 비틀거리며 소파 모서리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달그락, 타당.

플라스틱 통이 대리석 바닥을 굴러 소파 밑 어두운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뚜껑이 열려 있었는지, 그 안에서 노란색 알약들이 몇 개 튀어나와 바닥에 흩어졌다.

비상계단 문을 반쯤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세아는,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간 불투명한 회색 통과, 바닥에 흩어진 낯설고 이질적인 노란색 캡슐들.

‘저게…… 뭐지?’

의문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세아는 그대로 비상계단 안쪽으로 쓰러지듯 들어갔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흑…… 후우……."

산소가 부족한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손발 끝이 마비되듯 저려왔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내일 아침 사내 게시판은 그녀의 몰락을 알리는 축제로 가득 찰 터였다.

그때, 철제 비상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복도의 조명을 등지고, 한 남자의 실루엣이 비상계단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현이었다.

그의 슈트는 땀으로 젖어 엉망이었고,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두운 계단실 속에서도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한세아."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아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15년 만에 마주한 소꿉친구이자, 이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회사의 최고 권력자.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 연애나 사적인 접촉은 적발 즉시 파멸을 의미하는 '공사 분리' 철칙의 엘리시안 그룹이었다.

"오지…… 마세요. 상무님, 나가……."

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거부했다.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와 세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세아의 떨리는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스파크가 튀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 두 사람의 피부를 타고 번졌다.

손가락이 닿고, 도현의 넓은 손바닥이 세아의 차가운 손을 완전히 감싸 안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태풍이 몰아치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옥죄어오던 가슴의 통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신체 통증 수치 80%를 가리키던 스마트워치의 진동이 멈췄다.

80%에서 60%, 40%, 그리고 순식간에 20% 이하로.

세아의 폐부 깊숙이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시야를 가리던 검은 암전이 걷히고, 눈앞에 있는 도현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아…… 후우……."

세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끌려 올라온 듯한 압도적인 안도감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지독한 철벽녀인 그녀가, 오직 살기 위해 이 남자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세아가 안정을 찾아갈수록,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도현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갔다.

도현이 세아의 공황과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등가교환의 법칙. 고통을 가져가는 대가로 그의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오한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지만, 도현은 오히려 손에 더 힘을 주어 세아를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넓고 단단한 품이 세아의 온몸을 감쌌다.

"하아…… 진짜 너 맞구나. 한세아."

도현의 목소리가 세아의 귓가에서 낮게 울렸다. 땀으로 젖은 그의 뺨이 세아의 살결에 닿았다. 차갑지만 지독하게 뜨거운, 모순적인 온기였다.

세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도감 뒤로 밀려오는 것은 지독한 현실 감각이었다.

여기는 엘리시안 그룹 사옥의 비상계단이다. 언제 누가 이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 신임 상무와 브랜드 디렉터가 비상계단 바닥에 엉켜 안고 있는 모습이 들통나는 날에는, 두 사람 모두 사내 정치의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갈 터였다.

"이거 놓으세요, 상무님."

세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가슴을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감싸 안으며,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세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세아? 정말 너야?"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러나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도현의 뜨거운 눈빛과, 그 품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세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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