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앞으로 조인석 전무의 기획은 엘리시안의 역사적 사기극에 준하는 리스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 브랜드팀은 '더 리본 서울'의 독자 노선을 선언합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턱을 괴고 있던 사외 이사들의 눈이 일제히 동그래졌고, 대형 스크린 앞의 프레젠터를 쥔 세아의 손가락끝동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단상 아래,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은 조인석 전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늘 온화하게 웃으며 사람 목을 죄던 그 뱀 같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은 찰나였다.

"한 팀장, 지금 제정신입니까? 주주들과 임원진이 다 모인 이 엄숙한 이사회 자리에서 사기극이라니!"

조인석이 찻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찻잔이 부딪치며 쨍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회의실을 울렸지만, 세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뒤편에 가로막아 서 있던 도현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세아에게 쏟아지는 조인석의 살기 어린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조 전무님."

도현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지 않고도 회의장 구석구석까지 무겁게 내리앉았다.

"한 팀장의 보고서는 이미 재경팀의 감사 자료와 크로스체크를 끝낸 사안입니다. H&K로 이관하려던 외주 용역비의 70%가 전무님의 차명 계좌와 연계된 유령 법인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 이 자리에서 화면에 띄워드릴까요?"

"강 상무!"

"선택하십시오. 이대로 조용히 브랜드팀의 독자 기획안을 통과시키고 물러나실지, 아니면 당장 금융감독원 고발장 접수 버튼을 누르게 만드실지."

도현의 서늘한 눈빛이 조인석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조인석은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미 판세는 기울어 있었다. 좌중의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승부의 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그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눈치챈 것이다. 결국 조인석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챙기며 도현과 시선을 교차했다. 그의 깊고 단단한 눈동자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15년 동안 서로를 옭아맸던 트라우마의 사슬이, 비로소 사내 정치의 가장 추악한 심장부를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로부터 사흘 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화려한 불빛이 '더 리본 서울'의 그랜드 오프닝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5년 전, 수많은 비명과 가스가 뒤덮였던 은하백화점의 참사 부지. 그 거대한 무덤 위에 세워진 엘리시안 그룹의 최고 역작, '더 리본 서울'은 오늘 마침내 세상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팀장님, 진짜 대박이에요! 오픈 2시간 만에 유입 인구만 5만 명 돌파했답니다. 인스타그램 실시간 트렌드도 지금 우리 브랜드가 1위예요!"

민채원 과장이 태블릿 화면을 세아의 코앞까지 들이밀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에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처럼 굴던 그녀였지만, 조인석 전무의 마수를 함께 걷어내고 쟁취한 오늘만큼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조차 자랑스러운 듯 빛났다.

"민 과장, 입구 쪽 안내 데스크에 가이드북 수량 부족하다니까 그것부터 체크해요. 오늘 밤까지 긴장 풀면 안 됩니다."

"에이, 한 팀장님은 이 와중에도 칼 같으시다니까. 알았어요, 바로 뛰어갔다 올게요!"

민채원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자, 세아는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며 행사장 한구석의 테라스 난간에 기댔다. 가슴이 답답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샴페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의 상기된 웃음소리 너머로 묘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손등에는 며칠 전 공조실에서 밸브를 찾으며 긁혔던 붉은 상처와 시퍼런 멍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한세아."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트 깃을 단정하게 정돈한 도현이 세아의 곁으로 다가와 난간을 짚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세아의 눈에 포착되었다.

"상무님. 여긴 보는 눈이 많습니다.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하셔야죠."

세아가 짐짓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도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반경 100미터 이내에 내 구원자가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도현이 셔츠 주머니 안쪽을 톡톡 두드렸다. 얇은 천 너머로 살짝 비치는 작은 플라스틱 통의 실루엣. 오태식 박사가 도현에게 처방해 준, 뇌 편도체를 강제로 차단해 주는 특수의약품인 노란 캡슐 신경안정제였다. 1화에서 세아가 도현의 사무실 소파 밑에서 발견했던 그 불투명한 상자 속의 약. 심장과 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며 생명을 깎아 먹는 극약에 가까운 진통제라는 것을 알기에, 세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약, 자꾸 먹지 말랬잖아요. 오 박사님이 경고한 거 잊었어요?"

"알아. 싱크 가중 체온 역전증."

도현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지면 10분 안에 심근 수축으로 심장 마비가 온다던 그 살벌한 경고, 매일 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되새기고 있으니까 걱정 마."

"걱정하는 거 아니거든요? 상무님이 사내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기획안 최종 결재는 누가 해줍니까?"

세아가 뾰족하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눈동자는 도현의 창백한 입술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세아의 서툰 배려가 사랑스러운 듯, 아무도 보지 않는 각도를 틈타 그녀의 손끝을 찰나의 순간 동안 살포시 맞잡았다가 놓았다.

그의 품 안에는 은밀히 소장해 오던 세아 어머니의 유품, 아쿠아마린 펜던트가 들어 있는 작은 보석함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인석을 완전히 끝장내고 대등한 파트너로서 홀로 서는 날, 그녀의 목에 걸어주리라 다짐했던 그 푸른 빛의 맹세였다.

그때였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던 클래식 음악 소리가 기괴한 전기 노이즈 소리와 함께 뚝 끊겼다.

지이이잉—!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불이 왜 이래?"

연회장의 수천 개 전등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주황빛의 조명들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더니, 마침내 툭 하는 굉음과 함께 암전이 찾아왔다. 사방이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비상 유도등조차 켜지지 않는 기이한 블랙아웃이었다.

"꺄악!"

"이게 뭐야! 정전이야?"

웅성거림은 비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명 속에서, 세아의 코끝으로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싸하고 비릿한 냄새. 15년 전, 은하백화점의 붕괴 직전 코를 찔렀던 고농축 프레온 가스와 지하 암반에서 역류하는 지층 수증기의 썩은 내음이었다.

"안 돼……."

세아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온 공기가 돌덩이처럼 무겁게 폐를 짓눌렀다.

조인석이었다. 이사회에서 패배하고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조인석이, 마지막 발악으로 몰 전체의 공조 배기 밸브 회로를 차단하고 환기 팬에 이상 고전압 정전을 유도한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이 '더 리본 서울'을 다시 한번 참사의 무덤으로 만들어 도현과 세아를 매장하려는 미친 짓이었다.

"끄윽……!"

옆에서 무거운 신음이 들렸다.

세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도현은 이미 난간을 잡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트라우마 싱크. 99%의 역대급 통증 동기화가 두 사람의 신경계를 동시에 난도질했다. 세아가 느끼는 극심한 질식의 공황과 공포가 고스란히 도현에게 전이되었고, 도현의 체온은 무서운 속도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35도. 34.5도.

오태식 박사가 경고한 죽음의 한계선, 34도가 코앞이었다. 도현은 세아의 고통을 흡수하느라 온몸을 덜덜 떨며 숨을 헐떡였다.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는 소리가 세아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도현아! 강도현!"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을 맞잡자,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심장으로 뿜어졌다. 전이된 고통 때문에 세아 역시 시야가 흐려졌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숨을 쉬지 못해 가슴을 쥐어짜며 쓰러지고 있었다. 15년 전의 악몽이 완벽하게 재현되는 아수라장.

하지만 세아는 15년 전, 먼지 속에서 울며 구출만을 기다리던 나약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밤을 밤새우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 건물의 뼈대와 내장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은 브랜드 디렉터이자 타협 없는 완벽주의 기획자였다.

"정신 차려, 세아 눈 똑바로 봐."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방을 뒤져 낡은 보조 파일철을 꺼냈다. 6화 도서실에서 몰래 복사해 두었던 '15년 전 은하백화점 전도'의 낡은 사본이었다. 비록 지금 세워진 리본 서울은 신축 건물이지만, 지하 공조실의 수동 우회 밸브 배관만큼은 과거 은하백화점의 거대한 콘크리트 기초 옹벽을 그대로 활용해 우회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현아, 나 봐. 나랑 같이 가야 해. 여기서 죽게 안 둬."

세아는 도현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밀접 접촉이 일어나자 도현의 거친 호흡이 미세하게 진정되는 듯했으나, 그의 체온은 여전히 34.2도에서 멈춘 채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0분이었다. 10분 안에 이 가스를 빼내고 산소를 공급하지 않으면 도현의 심장은 멈춘다.

세아는 도현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의 무거운 체중이 짓눌러왔지만, 이 악물고 일어섰다.

"민 과장! 사람들 데리고 비상구 아래쪽으로 대피시켜요! 문 다 열고!"

어둠 속에서 질겁해 울고 있던 민채원을 향해 세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팀장님은요? 팀장님 어디 가시게요!"

"밸브 열러 가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살려요, 당장!"

세아는 도현을 부축한 채, 비상등조차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공조 터널 안으로 거침없이 직진했다.

터널 안은 역류한 가스와 지층 수증기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폐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세아는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전도는 명확했다.

'우측 세 번째 통로, 거기서 좌회전 후 지하 2층 수동 오버라이드 밸브실.'

마침내 도달한 철문 앞. 세아는 도현을 문벽에 기대어 눕혀두고, 거대한 수동 제어 밸브 앞으로 달려갔다.

적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실린더 핸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굳어버린 핸들은 세아의 가녀린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여…… 제발 움직이란 말이야!"

세아는 온 힘을 쥐어짜 핸들을 매달리듯 잡아당겼다. 차가운 쇠붙이에 손바닥 살점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핸들을 적셨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세아는 손을 놓지 않았다.

15년 전, 어둠 속에서 도현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 어린 손으로 잔해를 파헤쳤었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를, 그리고 내가 일구어낸 이 공간을 조인석 따위의 더러운 음모에 무너지게 두지 않겠다.

"아아아앗!"

세아가 비명을 지르며 온 체중을 실어 핸들을 꺾었다.

쿠구구궁—!

녹슨 쇠가 비명을 지르며 마침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린더가 수동으로 오버라이드되자, 차단되었던 비상 배기 댐퍼가 기계적인 굉음을 내며 열렸다.

스으으으—!

엄청난 기압 차와 함께 터널 가득 차 있던 탁한 가스와 수증기가 외부로 급격히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선한 외부 공기가 환기구를 타고 연회장과 터널 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하아……! 하아……!"

세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스가 빠져나가자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완화되었다.

연기 속에서, 저 멀리 외곽 구역의 비상 차단막이 열리며 화려한 서울 도심의 인공 불빛과 달빛이 밸브실 안으로 길게 쏟아져 들어왔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빛줄기가 먼지 가득한 공중을 가르며 쓰러져 있는 도현의 얼굴을 비추었다.

"도현아……."

세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바닥을 기어갔다.

철문 너머,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도현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세아의 피투성이 손. 도현은 남은 힘을 쥐어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세아는 도현의 얼음장 같은 손을 꽉 움켜쥐며 그를 자신의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도현의 체온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의 주머니 틈새로 흘러나온 노란 알약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리고 수동 밸브실의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