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연기 속에서 환히 비쳐오는 외곽 구역의 빛줄기를 받으며, 수동 밸브실 철문 너머로 피투성이가 된 도현의 손을 가쁘게 맞잡아 끌어당겼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도현의 살결은 냉동고에서 막 꺼낸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웠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내 손등의 시퍼런 멍과 찢어진 살점에서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손아귀가 부서져라 꽉 움켜잡으며 그의 상체를 내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도현아, 정신 차려. 내 말 들려?"
도현의 흐릿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밭은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그의 재킷 주머니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틈새로 흘러나온 노란 알약들이 콘크리트 바닥 위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알약들을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현이 평소 상시 복용하던 특수 트라우마 신경안정제였다. 15년 전 은하백화점 참사 이후, 오태식 박사가 도현의 극심한 발작을 막기 위해 뇌 편도체를 강제 차단하도록 조제했던 임시방편의 약. 겉으로는 그를 평온하게 유지해 주는 구원줄 같았지만, 실상은 먹을 때마다 심장과 간을 사정없이 갉아먹으며 그의 수명을 야금야금 단축시키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처방의 전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아…… 세, 아야……."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가늘어서 먼지 섞인 공기 속으로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품을 파고들며 뺨을 어깨에 묻었다. 살을 에는 듯한 오한이 내 몸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어 왔다.
오태식 박사의 차가운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지면 심근이 급격히 수축해서 10분 안에 심장 마비가 올 수 있어. 싱크 가중 체온 역전증은 단순한 저체온증이 아니야. 상대방의 공황을 몸으로 받아내는 도현이한테는 그 온도가 곧 생명선이라고!'
지금 그의 체온은 명백히 그 한계선에 닿아 있었다. 내 품에 안긴 그의 가슴팍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겨우 지탱하고 있던 오른손렁에서 힘을 빼지 않은 채, 왼손에 꽉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해진, 15년 전 은하백화점 전도의 낡은 사본 복사본이었다. 캐비닛 구석에서 찾아내 소중히 보관해 왔던 이 설계 전도가 없었다면, 조인석 전무가 교묘하게 숨겨놓은 지하 2층 구석의 수동 오버라이드 밸브 위치는 영영 찾지 못했을 터였다. 이 종이 한 장이 오늘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겨우 붙여놓은 셈이었다.
그때였다.
철문 너머 어두컴컴한 복도 저편에서 둔탁하고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뚜벅, 뚜벅.
먼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이마를 짚으며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였다.
조인석 전무.
그는 수동 밸브실 입구에 멈춰 서서 바닥에 주저앉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 서넛이 단단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 조 전무는 평소처럼 아주 예의 바르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브랜드 디렉터님이 사내 연애를 아주 요란하게 하시는군요. 신임 본부장님을 모시고 이런 컴컴한 지하 보일러실에서 사적인 밀회를 즐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 아수라장은 다 뭡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당황도 없었다. 오히려 더 리본 서울의 환기 모듈을 고의로 차단해 우리를 질식시키려 했던 자신의 비열한 테러 공작을, 단순한 사내 추문과 관리 부실로 덮어씌우려는 야비한 계산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조인석 전무님."
나는 도현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들어 조 전무를 쏘아보았다. 목구멍이 매캐한 가스 냄새로 따가웠지만 목소리만큼은 칼날처럼 세웠다.
"공사 구분을 못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전무님인 것 같습니다. 신규 랜드마크 오픈 당일에 환기 시스템 제어권을 고의로 차단하고 가스 누출 설계를 조작하는 행위가, 엘리시안 그룹의 임원으로서 하실 법한 비즈니스입니까?"
조 전무는 가볍게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 팀장, 증거가 없는 억측은 사내 명예훼손 사유가 됩니다. 안 그래도 오늘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가 발생해 이사회에서 책임을 물으려던 참인데, 본부장과 디렉터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쯧, 모양새가 아주 사납게 되었어요."
그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강제로 끌어내고 현장을 통제하려는 수작이었다.
그 순간, 내 품에 쓰러져 있던 도현의 손가락이 내 손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안심하라는 신호였다.
도현은 내 어깨를 짚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무릎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조 전무를 마주하는 그의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곧게 펴며 조 전무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억측이라니요, 조 전무님."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비록 저체온증으로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을지언정, 상대를 압도하는 본부장으로서의 위엄은 털끝만큼도 상하지 않았다.
"전무님이 이 지하 공조실의 서브넷 IP를 통해 환기 밸브 강제 폐쇄 명령을 내린 로그 기록, 그리고 H&K 외부 대행사 법인 계좌를 통해 설비 담당자에게 흘러 들어간 자금 내역서까지. 전부 제 개인 서버에 실시간으로 백업되고 있었습니다."
조 전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미소 짓던 입꼬리가 보기 좋게 굳어 들어갔다.
"강 본부장,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이미 10분 전에, 해당 자료들을 포함한 전무님의 배임 및 테러 모의 관련 고발장이 언론사 사회부 데스크와 금융감독원, 그리고 검찰청 특수부에 동시 발송되도록 예약 설정을 걸어두었습니다."
도현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켜 보였다. 빨간색으로 점멸하는 전송 대기 타이머가 정확히 '3분 0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사히 걸어 나가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전무님은 내일 아침 엘리시안 그룹 전무가 아니라 '업무상 과실치사상 및 방화 테러 미수 피의자'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될 겁니다."
사방이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조 전무의 뒤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조 전무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늘 여유롭고 뱀 같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막 한가운데 고립된 사냥감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도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조 전무를 벽 구석으로 완벽히 몰아세웠다.
"선택하십시오. 이사회에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법적 처벌을 달게 받으실지, 아니면 일가친척까지 전부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실지. 시간은 2분 남았습니다."
"너…… 강도현,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 아니라 비즈니스입니다. 전무님이 평소에 아주 좋아하시던, 철저한 손익 계산이죠."
도현의 서늘한 눈빛 앞에 조 전무는 결국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평생을 사내 정치와 가스라이팅으로 군림해 오던 노회한 정적이,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발이 묶여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도현은 차갑게 전송 보류 버튼을 누르며 비서실에 연락을 취했다.
"보안팀장님, 지금 지하 2층 수동 밸브실로 오셔서 조인석 전무님을 임원 대기실로 정중히 '모셔' 가십시오. 이사회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합니다."
"예, 본부장님.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과 함께,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조 전무는 경비원들의 호위를 가장한 감시 속에 힘없이 끌려갔다.
* * *
한 시간 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상무실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유리창 너머로 리본 서울의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가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상 배기 밸브가 정상 작동하면서 행사장 내부의 공기는 완벽하게 정화되었고, 오픈 행사는 아무런 차질 없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찢어진 손등에 소독약을 바르고 있었다. 쓰라린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도현이 다가와 내 손에서 면봉을 부드러운 손길로 뺏어 들었다.
"내가 할게."
그는 소파 앞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세심한 손길로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의 체온은 아까보다 조금 올라와 있었지만, 여전히 평소보다는 서늘했다.
"아직도 몸이 찬데, 왜 자꾸 굳이 움직이려고 해? 오태식 박사님이 체온 떨어지면 정말 위험하다고 신신당부했잖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짐짓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도현은 내 상처 위로 밴드를 꼼꼼히 붙이더니, 풋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네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이제 살 만하니까."
"말이나 못 하면……."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도현이 내 양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진지해진 눈빛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세아야."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무실 구석에 있는 개인 금고로 걸어갔다. 지문 인식과 비밀번호를 차례로 입력하자, 두꺼운 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안에서 도현이 조심스럽게 꺼내 든 것은 아주 작은 벨벳 상자였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 상자를 열자,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색 광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
내 목구멍이 턱 막혔다.
15년 전, 참사 폐허의 그 차가운 돌더미 속에서 잃어버렸던 어머니의 유품. 아쿠아마린 펜던트 목걸이였다. 부서지고 일그러졌던 은빛 테두리는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고, 하늘빛 보석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던 것처럼 맑고 영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15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이걸 잊은 적 없어."
도현이 목걸이를 꺼내 내 뒤로 다가왔다.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아치형의 하얀 목덜미 위로 목걸이를 천천히 걸어주었다.
차가운 아쿠아마린이 쇄골 위에 닿는 순간, 온몸을 타고 기묘한 전율이 흘렀다.
"참사 현장에서 내 가방 구석에 떨어져 있던 걸 발견했을 때, 다짐했어. 널 다시 만나면, 꼭 네 상처를 전부 지워주고 이걸 네 자리에 돌려주겠다고."
도현이 내 앞으로 걸어와 내 어깨를 짚었다. 그의 눈동자에 오직 나만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내 아이폰 화면에 연결된 스마트 워치에서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Trauma Sync: 0%]
정상. 완벽한 정상 수치였다.
그동안 우리를 숨 막히게 얽매던 공황의 동기화도, 스킨십을 해야만 고통이 사라지던 그 가혹한 등가교환의 법칙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고통을 대가로만 작동하던 비정상적인 트라우마 싱크가, 완전히 복원된 사랑의 유품과 서로를 향한 진실한 마음을 통해 진정한 무통증의 건강한 상태로 치환된 것이었다.
내 쇄골 위에서 빛나는 아쿠아마린은 더 이상 슬픈 과거의 잔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단단한 구원의 증표였다.
도현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속삭였다.
"난 내 지위를 잃든, 이 회사를 잃든, 세상을 다 잃든 상관없어. 1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세상은 오직 너 하나뿐이니까."
그의 갈망 가득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평생 너의 공기가 되어줄게, 세아야. 숨이 막힐 때마다 내 품으로 와."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공사 구분이라는 사내 철칙도, 우리를 죗값처럼 짓누르던 과거의 아픔도 이 공간 안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나는 도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로 돌진했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뜨거운 온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어떤 약물보다도 확실하고 완전한 구원이었으며, 오직 서로만을 바라는 온전한 열정의 도킹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지만, 그것은 공황의 두려움이 아닌 달콤한 설렘의 박동이었다. 도현은 내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당기며 깊고 짙은 입맞춤으로 내 물음에 답했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목걸이 아쿠아마린의 은빛 영묘함이 내 쇄골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도현의 눈가에는 마침내 참사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바로 그 찰나.
상무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의 전원이 켜지며, 비서실로부터 다급한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본부장님, 조인석 전무 측 우호 지분 이사들이 비상 연대를 구성해 내일 아침 임시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경영권 승계 구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탄원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이사회 탄원서 폭로 당일의 붉은 태양이 저 멀리 도심의 빌딩 숲 사이로 서서히 고개를 들며 비쳐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