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줄기는 사선으로 내리쳐 백야령의 거친 암석을 두들겼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뇌전이 대지를 찢어발기듯 내리꽂힐 때마다, 백색 가사를 입은 집법대원 서른 명의 칼날이 푸르스름한 살기를 뿜어냈다.

"길을 막는다면, 그 대상이 화산의 도사들이라 할지라도 남김없이 베어 넘길 뿐이다."

무강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흑적색의 불길 같은 마기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증발시키며 희뿌연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망령되도다!"

집법대주가 대갈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화산의 정통 무맥을 수호한다는 자부심과, 눈앞의 사도(邪道)를 반드시 척결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본산의 자비가 네놈에게 분에 넘치는 기회를 주었거늘, 끝내 마도의 손을 잡고 동문들에게 검을 겨누는구나. 군령을 위반하고 전선을 이탈한 대가는 오직 죽음뿐이다!"

집법대주의 검끝이 허공을 가르자, 서른 명의 무인이 일제히 보법을 밟았다.

스스스슥!

빗물 가득한 흙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무강의 이명을 자극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었고, 서로의 사각을 완벽하게 메우는 유기적인 흐름을 보였다. 화산이 자랑하는 비전 검진, '칠성매화검진(七星梅花劍陣)'이 백무강을 중심으로 좁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검진이 뿜어내는 기세는 거대한 맷돌과 같았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검압이 무강의 전신을 짓눌렀다.

'확실히 혈살대의 오합지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군.'

무강은 차갑게 식어가는 이성 속에서 적들의 기세를 가늠했다. 화산의 대제자 현운이 품었던 고결한 검리와는 또 다른, 오직 규율과 숙청만을 위해 단련된 차갑고 예리한 검풍이었다.

"살(殺)!"

집법대주의 일성무퇴의 구령과 함께, 전방의 세 명의 무인이 동시에 신형을 날려왔다. 그들의 검끝에서 피어난 세 줄기의 푸른 검기가 빗줄기를 가르고 무강의 안면과 가슴, 단전을 향해 쇄도했다.

파아앗!

무강은 신형을 뒤로 반 보 물리며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환정마경의 심법으로 끌어올린 흑적 마기가 검신에 엉겨 붙으며 묵직한 호를 그렸다.

깡! 깡! 깡!

치열한 금속음이 백야령의 정적을 깨뜨렸다. 세 자루의 검을 튕겨내는 순간, 무강의 손목을 타고 묵직한 반진력이 전해졌다. 화산 본산의 정순한 도가 내력은 마기를 밀어내려는 성질을 품고 있었다. 비록 한 명 한 명의 공력은 무강보다 아래였으나, 검진을 통해 합일된 힘은 무강의 내동댕이쳐진 경맥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큭……."

무강의 입꼬리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턱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전 내부에서 사납게 요동치던 혈살대주의 탁한 내력과 사파 고수들의 망집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날뛰기 시작했다. 칠정반사(七情反噬)의 징조였다.

- 내가 어찌 죽어야 한단 말이냐! 화산의 위선자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라! - 피를 다오! 내 목숨을 앗아간 정파 놈들의 목을 베어라!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환청이 되어 무강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안구 뒤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고, 눈앞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마기가 폭주하여 전신 맥락이 파열되기 직전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마물 놈, 이미 내력이 폭주하고 있구나! 검진을 극성으로 전개하라! 마도에 물든 육신을 갈가리 찢어 발겨라!"

집법대주가 무강의 상태를 간파하고 사납게 외쳤다.

서른 자루의 검이 공중에서 정교한 궤적을 그리며 얽혀 들었다. 푸른 검기는 마치 밤하늘에 만개한 매화의 숲처럼 무강의 사방을 완전히 차단했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절대의 사지였다.

하늘에서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대지를 흔들었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광풍은 빗줄기를 칼날처럼 매섭게 몰아붙였다.

무강의 무릎이 서서히 꺾였다.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백색 소매를 붉게 적셨다. 내면의 마해(魔海)는 끊임없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려 했고, 외부의 검진은 그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좁혀들고 있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무강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부러져 나갈 듯한 힘이 들어갔다.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잔상이 있었다.

시든 수풀 사이에 어스름한 노을이 내리앉던 곳. 씁쓸한 약초 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던 낙하원의 앞마당. 그곳에서 늘 묵묵히 탕약을 끓이며 자신을 바라보던 한 여인의 미소.

- 무강아, 너무 독해지지 말거라. 세상이 너를 버렸을지언정, 이곳은 언제나 너의 집이란다.

설화선이 건넸던 따뜻한 천명초의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무강의 심장 한구석을 두드렸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강호의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무강이 온전히 지켜내고자 했던 단 하나의 정토(淨土)였다. 그 평화를 향한 독점적이고도 처절한 집착이, 그의 내면에서 거대한 도심(道心)의 기틀이 되어 솟구쳤다.

'내가 갈 길은 정파도, 사파도 아니다.'

무강의 동공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적색의 광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깊고 맑은 심연의 빛으로 변해 갔다.

'오직 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나만의 길을 가겠다. 그것이 마(魔)일지라도, 내 도(道)가 되어 앞길을 밝히리라.'

그 순간, 무강의 내면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쾅-!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낙뢰가 무강의 바로 옆 바위를 내리치며 산맥을 뒤흔들었다. 대지가 요동치고 사방이 눈부신 백색 광명으로 가득 찬 그 찰나의 순간, 무강의 전신을 옥죄던 칠정반사의 마기가 거짓말처럼 정돈되기 시작했다.

마해에 가라앉아 있던 사파 고수들의 원혼과 혈살대주의 한(恨)이, 무강의 확고부동한 의지와 집착 앞에 굴복하여 정순한 에너지로 치환되었다. 마기와 도가가 서로 부딪쳐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무강이라는 그릇 안에서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융합된 것이다.

전중파경(戰中破境).

사선을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무강은 마침내 스스로 쌓아 올렸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환정마경의 새로운 경지를 돌파해 냈다.

파아아앗!

무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흉포한 마기가 일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의 주변으로 빗방울들이 허공에 멈춰 선 듯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함. 그것은 무가가 도달할 수 있는 극의 중 하나인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상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집법대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눈앞의 마두가 뿜어내던 광기와 폭주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치 심연의 깊은 못과 같은 고요함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세를 늦추지 마라! 일격에 끝낸다!"

불안감을 느낀 집법대주가 소리쳤다. 삼십 명의 검이 자아낸 매화검진이 무강의 목과 심장을 향해 일제히 쏘아져 내렸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검기의 장막은 거대한 그물망처럼 촘촘했다.

그러나 무강의 눈에는 그 모든 움직임이 지극히 느리게 보였다. 검기가 가르고 지나가는 공기의 결, 빗방울이 쪼개지는 파편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첫 번째."

무강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그가 검을 부드럽게 가로저었다. 화산의 상생검리와 마경의 변칙적인 살수가 융합된 독자적인 검식이었다.

스으윽.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검끝이 호를 그리자, 허공을 메우고 있던 푸른 매화 검기들이 마치 가을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맥없이 바스러졌다. 검진을 구성하던 전방 열 명의 무인이 단 한 순간에 가슴팍을 깊게 베이며 비명을 지르고 뒤로 나자빠졌다.

"이, 이럴 수가!"

집법대주의 눈이 경악으로 찢어질 듯 커졌다. 칠성매화검진이 단 한 초식에 무력화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두 번째."

무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빗줄기 사이를 유영하듯 나아간 그의 신형이 좌우로 갈라진 집법대원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흑적색 검기가 실타래처럼 퍼져 나가며 사방을 휘감았다.

서걱! 서걱! 서걱!

살이 잘려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백야령을 메웠다. 어떤 저항도, 반격도 허용되지 않는 압도적인 살육이었다. 화산 본산에서 평생을 단련해 온 정예 무인들이, 무강의 검끝이 지나갈 때마다 낙엽처럼 쓰러져 바닥을 붉은 피로 물들였다.

"괴, 괴물 놈!"

남은 대원들이 공포에 질려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알던 화산의 속가제자 백무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자는 하늘의 벼락과 내면의 마(魔)를 동시에 지배하는 절대적인 무신(武神)이었다.

"마지막."

무강이 집법대주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빗물이 그의 검끝을 타고 흐르며 붉은 핏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법대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놈…… 감히 화산의 집법대를 전멸시키다니! 장로님께서 결코 너를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현안 도인 그 늙은이가 나를 용서하고 말고 할 권한 따위는 없다."

무강의 목소리는 지극히 무덤덤했다.

"그자 역시 머지않아 네놈들의 뒤를 따르게 될 테니까."

"이, 이익!"

집법대주가 단전을 쥐어짜 내 잔여 내공을 전부 검끝에 집중시켰다. 그의 검에서 화산파의 절예 중 하나인 '태을선검(太乙仙劍)'의 기세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검끝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강의 심장을 향해 직선으로 쇄도했다. 목숨을 건 단 한 번의 투로였다.

무강은 검을 치켜들지 않았다.

그저 검끝을 아래로 내린 채, 집법대주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가볍게 몸을 틀었을 뿐이었다.

파앗!

매서운 검풍이 무강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 무강의 오른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역수로 쥔 검날이 집법대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거억.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집법대주의 신형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의 검끝이 허공을 갈랐고, 목줄기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커, 헉……."

집법대주는 검을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무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짙은 절망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이 담겼다. 이윽고 그의 무릎이 꺾이며 백야령의 차가운 진흙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타닥. 타닥.

하늘의 먹구름이 걷히며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백야령 정상은 삼십여 명의 집법대원들이 흘린 피로 물들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시신들 사이에서, 오직 백무강만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백색 도포는 빗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 기묘한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무강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단전 내부에 자리 잡은 환정마경의 기운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하고 강대해져 있었다. 칠정반사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의 맥락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가 혹한 시련을 극복해 내고 마침내 자신만의 도를 흔들림 없이 확립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압도적인 성취였다.

"썩어 빠진 화산의 관례는 여기서 끝이다."

무강은 검에 묻은 피를 빗물에 씻어내며 검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철커덕 하는 맑은 금속음이 백야령에 울려 퍼졌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자신이 온 길, 산 아래의 낙하원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모든 장애물은 치워졌다. 현안의 음모도, 자신을 억죄던 심마도 모두 베어 넘겼다. 오직 은인 설화선이 기다리고 있는 그 따뜻한 둥지로 복귀하는 일만 남은 터였다.

그러나 산 아래를 바라보던 무강의 두 눈이 일순간 사정없이 흔들렸다.

멀리 산자락 끝, 낙하원이 위치한 구역에서 기이한 붉은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노을의 빛깔이 아니었다.

폭우가 그쳐가는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

낙하원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검은 연기둥이 밤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고 있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불씨들이 멀리 백야령 정상에 서 있는 무강의 동공에 잔인하게 투영되었다.

침묵이 흘렀다.

무강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검자루를 꽉 쥐었다. 그의 턱뼈가 으스러질 듯 힘이 들어갔고, 온몸에서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흉포한 야성적 살기가 백야령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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