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전, 현안 도인이 쳐놓았던 본산 집법대의 촘촘한 그물망을 붉은 피로 찢어발기고 풍락곡의 진창으로 스스로를 유배한 지 백일의 세월이 흘렀다.
화산파 최악의 사지라 불리는 풍락곡 북쪽 최전선. 그곳에서 백무강은 아군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자, 사패천에게는 검은 사신으로 통하는 소부대의 장(長)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화산의 푸른 도포 대신 사방에서 튄 핏물과 흙먼지로 검붉게 변해버린 무복을 걸친 채, 그는 매일같이 죽음을 삼키고 살(殺)을 토해냈다.
쿠르릉!
풍락곡의 하늘이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장대 같은 폭우가 대지를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가죽 막사의 낡은 천막을 뚫을 기세로 쏟아졌고, 사방에서 흘러든 흙탕물이 무강의 가죽 장화 끝을 적셨다.
막사 한가운데,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탁자 위로 한 장의 밀서가 놓여 있었다. 낙하원 인근에 심어두었던 정찰견이 목숨을 걸고 보내온 급전(急傳)이었다.
[의원에 사패천 최정예 첩자 침투. 낙하원 폐쇄 위기. 설 의원 신변 극히 위험.]
밀서를 바라보는 무강의 눈매가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차가운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낙하원. 그 씁쓸한 약탕 향과 붉은 노을이 내리던 평상. 그리고 자신의 가시 돋친 독설 속에서도 말없이 미소 짓던 설화선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쳤다. 위선으로 가득 찬 강호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온전히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그 구휼의 땅이 지금 사패천의 더러운 발길질 아래 짓밟히려 하고 있었다.
스스슥.
그때 막사의 가죽 휘장이 젖혀지며, 화산 본산의 문양이 새겨진 도포를 입은 전령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전령의 손에는 본산의 도장이 찍힌 황색 서신이 들려 있었다.
"백 조장, 본산의 현안 장로님께서 내리신 엄명입니다. 사패천의 대공세가 임박했으니, 풍락곡의 전선을 이탈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군령에 의거하여 반도(叛徒)로 규정, 그 자리에서 즉참에 처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낙하원 지역은 본산의 정예가 관할할 터이니 사사로운 일로 움직이지 말라 하십니다."
현안 도인의 서신. 그것은 친절을 가장한 족쇄이자, 무강의 발을 묶어 낙하원을 고립시키려는 명백한 음모였다. 본산의 정예가 관할한다는 말은 곧, 낙하원을 사패천의 먹잇감으로 방치하여 무강의 유일한 역린을 도려내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군령이라……."
무강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는 전령이 건넨 황색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서신을 읽지도 않은 채,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화아악!
무강의 손바닥에서 정순하면서도 기괴한 흑적색의 진화(眞火)가 피어올랐다. 본산의 옥인이 찍힌 서신은 비명 횡사하듯 순식간에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꽃이 무강의 차가운 눈동자에 영적(靈的)인 광채를 더했다.
전령의 안색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본산 장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눈앞에서 태워버리는 초법적인 행태에,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돌아가 전하라."
무강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내압에, 막사 사방의 가죽 벽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화산의 법이 내 법이 아니요, 정파의 대의가 내 생명이 아니다. 내 갈 길은 오직 내가 정할 뿐."
"백, 백 조장! 이것은 명백한 탈영이자 반역입니다! 본산의 집법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전령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무강은 이미 검을 허리에 차고 막사 밖으로 신형을 날린 뒤였다.
콰아아앙!
번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갈라놓으며 풍락곡의 대지를 하얗게 밝혔다. 그 빛 속에서, 오직 은인의 터전인 낙하원을 향해 단독으로 회군을 감행하는 백무강의 신형은 한 마리의 거대한 흑응(黑鷹)과도 같았다. 자신을 묶어두려는 추악한 군령 따위는 비웃으며 부수어 버리는, 거침없는 독자 노선의 쾌의(快意)가 폭우 속으로 사정없이 흩뿌려졌다.
***
비를 뚫고 산맥을 달리는 무강의 신접은 가히 광풍과 같았다.
화산의 하급 속가 구역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백야령(白夜嶺)을 넘는 것이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칼날 같은 암석들이 늘어선 험로. 평범한 무인이라면 낮에도 발을 디디기 힘든 그곳을, 무강은 어둠과 폭우 속에서 오직 육감과 기의 흐름만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무강의 발끝이 젖은 바위를 차고 오를 때마다, 백색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극의에 달한 이기어검의 신법이 대지를 가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질주가 시작된 지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무강의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이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궁-!
심장이 마치 무거운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크게 요동쳤다.
"크윽……!"
무강의 신형이 허공에서 비틀거리며 젖은 흙바닥으로 착지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전신의 혈도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난 백일 동안, 무강은 풍락곡의 전장에서 수많은 사파 고수들과 혈살대원들을 베어 넘겼다. 그리고 그들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마다, [환정마경]의 기능을 통해 그들이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정순한 내력과 무학의 정수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그 덕분에 무강의 공력은 단기간에 본산의 기라성 같은 장로들에 필적할 만큼 격상되었으나, 대가 없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죽은 자들의 마지막 망집과 원한, 억울함과 분노가 정제되지 못한 채 그의 정신 영토인 마해(魔海)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정련해야 했을 그 거대한 음기가, 낙하원의 위기라는 정신적 충격과 급격한 신법 전개로 인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칠정반사(七情反噬)]가 시작되었다.
"아아아아윽!"
무강의 입에서 짐승의 것과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귓가에는 전장에서 자신이 목을 베었던 자들의 비명과 저주가 환청이 되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네놈도 우리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화산의 사냥개 녀석, 낙하원도 결국 피바다가 되리라!'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전신의 맥락을 타고 흐르는 내력이 역류하며,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툭. 투두둑.
무강의 눈과 코, 그리고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칠공유혈(七孔流血). 내력이 폭주하여 전신의 미세한 혈관들이 터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심이 꺾이는 순간, 전신 맥락이 파열되어 자멸하게 되는 가혹한 제약. 마해의 붉은 파도가 그의 의식을 집어삼키려 촉수를 뻗어왔다. 정신세계 속에서 끝없는 어둠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그를 유혹했다.
'편해져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기에 몸을 맡겨라.'
"시끄럽다……!"
무강은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악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붙잡아 줄 단 하나의 이정표를 떠올렸다.
가장 비참하게 버려져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 죽어가던 자신을 거두어 준 곳. 지독한 약탕을 끓이며,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상처를 닦아주던 설화선의 따뜻한 손길.
'괴물이 되지 마라, 무강아.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의 원혼들의 비명을 뚫고 그의 심장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그 따뜻한 기억은 광포하게 날뛰는 마해를 묶어두는 견고한 쇠사슬이 되었다. 도심이 흔들리려는 찰나, 설화선과 낙하원에 대한 집착 어린 갈망이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잡아맸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무강은 가슴을 쥐어짜며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전신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의 신형은 벼락처럼 빠른 속도로 령의 오르막길을 박차고 올라갔다. 고통으로 인해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 흉포하고 야성적인 귀기(鬼氣)로 번뜩이고 있었다.
***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굵어져, 이제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세차게 대지를 때리고 있었다.
백야령의 정상으로 향하는 외길. 양옆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오직 한 줄기 가도만이 허용된 협곡의 초입이었다.
무강의 신형이 돌연 멈춰 섰다.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감각망에, 빗소리를 뚫고 이질적인 기운이 걸려들었다.
스으으으…….
그것은 전장에서 마주하던 사패천 무리들의 거칠고 탁한 살기가 아니었다. 지극히 정순하고, 얼음처럼 차가우며, 도가(道家)의 깊은 연원을 담고 있는 정체(正體)의 기운.
협곡의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검광이 하나둘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슥. 스스슥.
빗줄기를 가르며 나타난 자들은 백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검을 쥐고 있는 자들. 화산 본산의 규율을 집행하고 반역자를 단죄하는 최정예 무력 단체, 집법대(執法隊)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대략 삼십여 명.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넓게 퍼져, 무강이 지나가야 할 유일한 가도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지형지물과의 조화는 화산파의 비전 검진인 '칠성매화검진(七星梅花劍陣)'의 변형이었다.
"과연 장로님의 예측대로군."
검진의 선두에 선 중년의 집법대주가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의 검끝은 정확히 무강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백무강. 군령을 어기고 전선을 이탈한 죄는 즉참이거늘, 네놈은 본산의 명을 거역하고 사사로이 움직였다. 게다가 네 몸에서 풍기는 그 흉포한 마기는 무엇이냐? 필시 사패천과 내통하여 마공을 익힌 것이 분명하도다."
위선.
무강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현안 도인은 처음부터 무강이 낙하원의 위기를 듣고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설화선을 인질로 잡고, 무강이 군령을 위반하도록 유도한 뒤, 합법적인 명분을 세워 이곳 백야령에서 그를 완전히 매장하려 한 것이다. 정파의 명숙이라는 자들이 부리는 얄팍한 수치고는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집법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빗줄기가 검날에 부딪혀 사방으로 비산했다.
"화산의 정기를 더럽히는 마도(魔道)의 싹을 오늘 이 자리에서 잘라내겠다. 검진을 전개하라!"
삼십여 자루의 검이 뿜어내는 푸른 검기가 폭우 속에서 만개하는 매화처럼 찬연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무강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겠다는 잔혹한 살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무강은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넓히며, 검자루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칠정반사의 고통으로 전신 맥락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화산의 이름으로 나를 벤다라……."
무강이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릉-!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흑적색의 마기가 빗물과 만나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수증기를 뿜어냈다.
"길을 막는다면, 그 대상이 화산의 도사들이라 할지라도 남김없이 베어 넘길 뿐이다."
뇌전이 다시 한번 하늘을 갈라놓으며, 백야령 정상에 팽팽한 살막(殺幕)이 쳐졌다. 삼십여 명의 집법대 고수들이 자아내는 거대한 검진의 벽 앞에서, 피를 흘리는 고독한 마(魔) 백무강의 검이 기이한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