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후 피 묻은 소매를 털며 고개를 든 무강의 동공에, 저 멀리 노을 대신 붉은 연기와 검은 화마에 휩싸여 내려앉는 낙하원의 외경이 펼쳐진다.
백야령 정상의 빗줄기는 잦아들었으나, 허공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는 여전했다. 삼십여 명의 화산 집법대원들이 흘린 선혈이 진흙바닥에 스며들어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무강의 손끝에서 빗물과 함께 붉은 낙수가 뚝뚝 떨어졌다.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환정마경(幻情魔經)이 방금 전 삼킨 혼백들의 원한을 갈무리하며 요동쳤다. 칠정반사(七情反噬)의 이빨이 뇌리를 갉아먹는 환청이 들려왔으나, 무강은 어금니를 사려 물며 그 통증을 의식 밑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그 고통을 곱씹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낙하원(落霞院)이……."
낮게 읊조리는 무강의 목소리에 쇠가 긁히는 듯한 살기가 실렸다. 산 아래, 자신이 유일하게 온기를 느꼈던 가난한 구휼의 터전이 붉은 불길에 삼켜지고 있었다. 치솟는 불길은 밤하늘의 구름조차 붉게 태워버릴 듯 맹렬했다.
화산의 위선도, 집법대의 칼날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나 저 아래에서 타오르는 화마는 그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역린을 건드리고 있었다.
스스스스.
무강의 신형이 흐려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의 묘리가 마교의 신법인 천마동광보(天魔遁光步)와 뒤섞이며 기괴한 궤적을 그렸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허공에 잔상이 세 겹으로 겹쳤고, 다음 순간 그는 이미 수십 장 밖의 가파른 절벽을 미끄러지듯 하강하고 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파열음이 뒤를 따랐다. 젖은 풀잎과 바위틈을 밟고 도약할 때마다 흙먼지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칠정반사의 부담으로 맥락이 터져 나갈 듯 요동쳤으나, 무강은 내력을 아끼지 않고 단전을 쥐어짜 냈다. 혈살대주를 격살하고 흡수한 정순한 사파의 내력이 그의 경신을 채찍질했다.
산바람이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눈앞의 풍경이 뒤로 빠르게 밀려나며, 점점 더 짙어지는 매캐한 연기와 씁쓸한 약초 탄내가 코끝을 찔렀다. 낙하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귀를 찢는 비명과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크아악! 살려, 살려다오!" "이곳에 의원은 어디 있느냐! 환정마경의 행방을 아는 자를 대라!"
거친 사파 무인들의 고함이 낙하원의 고요했던 앞마당을 더럽히고 있었다. 무강이 낙하원의 목책을 넘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생지옥의 참상이었다.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환자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진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늘 은은한 약탕 냄새를 풍기던 가마솥은 뒤집혀 끓는 물이 사방에 흥건했고, 그 위로 붉은 피가 번져 나갔다. 사패천(邪覇天)의 휘장을 두른 흑의무인들이 횃불을 휘두르며 아직 무너지지 않은 약방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었다.
무강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쥐새끼들이 감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 심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수와도 같은 포효였다.
스윽.
무강의 신형이 가장 가까이 있던 사파 무인의 등 뒤로 솟아올랐다. 무인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묵검의 검신이 그의 목덜미를 정교하게 관통했다.
서걱.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선혈이 허공을 수놓았다. 무강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검신에 걸린 시신을 방패 삼아 앞으로 돌진했다. 몰려들던 세 명의 흑의무인들이 경악하며 무기를 치켜세웠으나, 무강의 손끝에서 뿜어진 기류는 이미 그들의 상체를 꿰뚫고 지나간 후였다.
철포삼을 익힌 사파 고수의 신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꺾였다. 강체(剛體)의 파괴력이 유체(流體)의 흐름을 타고 그들의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다.
"백무강이다! 그놈이 나타났다!" "막아라! 대주님께서 말씀하신 마경의 소유자다!"
적들의 외침 속에서 무강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낙하원의 중심, 설화선이 환자들을 돌보며 침을 놓던 사제 약방이었다. 그곳은 아직 화마가 완전히 덮치지 않았으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콰아앙!
무강은 약방의 판자문을 통째로 부수며 안으로 난입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씁쓸한 약초 향과 쇠비린내가 뒤섞여 숨을 막히게 했다. 붉게 타오르는 화로의 불빛이 어두운 약방 내부를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로의 그림자 뒤로, 두 개의 실루엣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더 가까이 오면 이 년의 목줄기를 끊어놓겠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화산 본산에서 역병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낙하원에 긴급 파견되었던 약제사, 송학이었다. 그의 평소 유약하던 안색은 간데없고, 눈에는 잔혹한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그의 거친 손은 설화선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 쥔 시퍼런 비수가 그녀의 하얀 살결을 파고들어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설화선은 입술을 깨문 채 신음 소리 마저 삼키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는 무강을 향했다. 그 눈빛에는 원망이나 공포 대신, 오직 무강의 안위를 걱정하는 깊은 애수가 담겨 있었다.
"무강아…… 오지 마라. 어서 피하거라." "시끄럽다, 년아! 얌전히 인질 노릇이나 해라!"
송학이 비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소매가 거칠게 걷어 올려지며, 손목 안쪽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이 백무강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검은 쇠사슬이 뱀처럼 손목을 감싸고 있는 형상.
사무희가 이끄는 마교 분파, 혈음천마(血陰天魔) 계열의 밀정임을 증명하는 낙인이었다. 과거 4화에서 낙하원에 들어올 때부터 품었던 의구심이 마침내 확연한 진실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이자가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고, 낙하원의 방어벽을 무너뜨린 밀정이었다.
"네놈이구나."
무강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격앙도 없었다. 오직 끝을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만이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내려앉았다.
"흐흐흐, 그래. 본산의 도사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더군. 내가 이 낙하원의 약재 속에 마기를 흐트러뜨리는 독을 섞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백무강, 네놈이 가진 환정마경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년의 머리통을 화로에 처박아 주마!"
송학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듯 비열하게 웃어댔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무강이 뿜어내는 기세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자였고, 은혜를 저버린 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단 한 푼도 남겨두지 않았다.
파앗!
대화는 없었다.
송학이 비수를 움직이려던 찰나, 무강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극상의 경신이었다.
"어, 어디……!"
송학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그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눈앞의 공간이 왜곡되며 검은 검선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뒤였다.
사각.
섬뜩하리만치 경쾌한 마찰음이 약방 내부에 울렸다.
"아……?"
송학은 자신의 손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멍하니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비수를 쥐고 있어야 할 오른손 목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사슬 문양이 새겨진 그의 손목은, 손가락들과 비수를 움켜쥔 채 허공을 날아 그대로 타오르는 화로 속으로 툭 떨어졌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과 피가 타들어 가는 비린내가 풍겼다.
"아아아아악! 내 손! 내 손이!"
뒤늦게 찾아온 극통에 송학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잘려 나간 손목 단면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제 약방의 바닥을 붉게 적셨다.
무강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왼손을 뻗어 설화선의 가냘픈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무강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늘 약초 향을 풍기던 그녀의 옷자락에서 매캐한 탄내와 피비린내가 섞여 나는 것이 무강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강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설화선을 감싼 손길만큼은 그 어떤 도가(道家)의 진기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강아…… 다치지 않았느냐? 네 안색이 너무나……." "괜찮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무강은 설화선을 자신의 등 뒤, 가장 안전한 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구르는 송학을 바라보았다.
"살려, 살려다오! 나도 시켜서 한 짓이다! 사무희 대주께서……!"
송학의 애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무강이 묵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검끝에서 뿜어진 한 줄기 묵직한 검기가 송학의 미간을 그대로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배신자의 신형이 바닥에 풀썩 꺾이며 절명했다.
사이다 같은 쾌감이 뇌리를 스쳤으나, 무강의 심상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진짜 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구!
갑자기 약방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붕 위의 기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둥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하늘을 뒤덮은 불길보다 더 붉고 가혹한 마기(魔氣)가 위에서부터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단전 속의 환정마경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칠정반사의 고통이 다시금 맥락을 찌를 듯 솟구쳤으나, 무강은 묵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왔는가."
우지끈! 콰앙!
약방의 천장이 붉은 기류에 완전히 파괴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쏟아지는 먼지와 불씨 사이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내려앉았다.
은은하게 휘날리는 검은 도포, 핏빛으로 물든 입술을 기괴하게 뒤틀며 웃고 있는 사내. 사패천의 대마두이자, 과거 마교의 잔재를 쫓는 학살자.
사무희(司無憘)였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주변의 불길이 마치 주인을 만난 기르던 개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대기를 붉게 물들이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으로 약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흐흐흐……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화산의 떨거지들이 보낸 집법대를 단신으로 몰살하고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오다니."
사무희의 목소리는 기괴한 공명을 일으키며 고막을 찔렀다. 그의 핏빛 눈동자가 무강의 등 뒤에 있는 설화선, 그리고 무강의 손에 들린 묵검을 차례로 훑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지 않느냐? 네가 그토록 아끼던 이 쓰레기장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아라. 이곳의 미천한 목숨들은 이미 내 수하들의 제물이 되었다."
무강은 대답 대신 검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렸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성적인 살기가 사무희의 마기와 부딪치며 팽팽한 불꽃을 일으켰다.
"말이 많군, 사파의 늙은 개가."
무강의 차가운 부르짖음에 사무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건방진 놈. 겨우 마경의 껍데기만 삼킨 애송이 주제에 누구에게 주둥이를 놀리느냐. 네놈이 삼킨 환정마경은 본래 우리 혈음천마의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그분의 유해(遺骸)와 붉은 옥패 또한 내 것이 될 운명이지."
사무희의 시선이 낙하원 바닥 아래, 화산 속가의 깊은 하수구 쪽을 향했다가 다시 무강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목소리에 탐욕과 광기가 가득 차올랐다.
"네놈의 단전을 찢고 마경을 회수하면, 나는 비로소 완전한 천마의 재림을 이룰 것이다. 정파의 위선자들도, 사파의 경쟁자들도 모두 내 발아래 무릎 꿇게 되겠지."
"꿈이 야무지구나."
무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등 뒤의 설화선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 전에 네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사무희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잔혹하고 타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학살자의 미소였다.
"재미있구나, 아주 재미있어! 그 오만이 어디까지 갈지 시험해 보마."
사무희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딱.
맑은 마찰음이 불타는 낙하원의 상공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낙하원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기이한 붉은 광주(光柱)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광주는 순식간에 수십 장 높이로 자라나더니, 이내 거대한 장막이 되어 낙하원 전체를 덮어씌웠다.
우우우웅!
장막의 표면에 수없이 많은 울부짖는 인간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혈음천마의 사마(邪魔) 주술이 만들어 낸 피의 결계였다. 외부의 그 어떤 기운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안의 그 어떤 생명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절대적인 단절의 지옥.
사방을 메운 불길이 결계의 핏빛과 섞이며 기괴한 자줏빛 어둠을 만들어 냈다.
"이곳이 네놈과 저 년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정파도, 사파도 침범할 수 없는 우리만의 정토(淨土)지. 흐흐흐…… 자, 시작해 보자꾸나."
사무희의 검은 도포가 폭풍처럼 휘날리며, 그의 손끝에서 붉은 마사(魔絲)들이 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무강은 묵검을 고쳐 쥐었다. 단전 속의 환정마경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최후의 결전을 종용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생사결의 문이 마침내 완전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