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검붉은 선혈이 진흙바닥을 적셨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날뛰는 원혼들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칠정반사(七情反噬). 혈살대주의 뒤틀린 한과 살의가 혈맥을 역류하며 전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백무강은 이를 악물고 환정마경의 구결을 돌려 폭주하는 내력을 억눌렀다.
그때, 안개를 뚫고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결국…… 다 끝난 모양이구나."
도포 자락을 단정히 정리한 채, 수하들을 거느리고 피 냄새를 쫓아 나타난 화산파의 명숙, 현안 도인이었다. 그의 음험한 눈빛이 혈살대의 무수한 사체들을 지나,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백무강의 얼굴에 멎었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속가제자의 신분으로 이토록 참혹한 살겁을 부리다니. 정파의 명숙 아래에서 자란 자가 부릴 무공이 아니구나. 무강, 네 놈이 사패천의 마공을 익혀 화산을 더럽힌 것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현안 도인의 목소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걸림돌을 합법적으로 치워버리겠다는 탐욕스러운 확신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끝이 서서히 검자루로 향했다. 명분을 앞세워 즉결처형을 단행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백무강은 비틀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가슴팍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늑대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툭 던지지 않았다. 대신, 왼손에 움켜쥐고 있던 피투성이 물건을 현안 도인의 발밑으로 거칠게 던졌다.
데굴데굴.
진흙 범벅이 된 채 굴러간 것은 다름 아닌 혈살대주의 수급이었다. 사패천에서도 악명 높은 대마두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현안의 신발코 앞에 멈춰 섰다.
"마공이라 하셨습니까."
백무강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본산의 고고하신 도사들께서 안개 뒤에 숨어 형세를 관망하시는 동안, 이 더러운 속가의 쓰레기들은 사지의 최전선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사천(邪天)의 무리가 목을 겨누는데, 정파의 고결한 검로만을 고집하다 개처럼 죽어가는 것이 화산이 말하는 상생(相生)입니까?"
"이놈이 감히……!"
현안의 수하들이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백무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현안의 뒤편, 넋을 잃고 서 있는 수십 명의 속가제자들과 본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가르침은 공명정대(公明正大)라 들었습니다. 여기 굴러다니는 사패천 혈살대의 시체들이 그 증거입니다. 적의 괴수를 베고 아군의 목숨을 구한 전공을, 그저 무공의 기형성을 핑계 삼아 마공으로 몰아 처단하려 하시다니요. 만약 이것이 정파의 법도라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더는 화산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주변에 모여든 속가제자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침묵은 무언의 동조였다. 무강의 말은 뼈를 찌르는 진실이었기에, 누구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현안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아끼는 그로서는, 수많은 제자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무강을 마두로 몰아 죽이는 것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대제자 현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은 늘 쥐고 다니던 금이 간 묵검(墨劍)의 자루에 얹혀 있었다.
"도사님. 백 사제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혈살대의 기습을 막아낸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 과정에서 보여준 무학은 비록 이질적이나 사패천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현운, 네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현안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백무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현운이 쥔 묵검을 똑바로 응시했다. 검신에 길게 가 있는 균열. 그것은 단순한 전투의 흔적이 아니었다.
"현운 사형."
무강의 나직한 부름에 현운의 시선이 닿았다.
"그 검의 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지 않으십니까. 과거 현안 도인께서 '문파의 대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내리신 밀명. 그것을 받들어 무고한 검수의 가슴을 뚫었던 날, 사형의 도심(道心)과 함께 부러졌던 흔적이 바로 그 검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
현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묵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것은 현운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마음의 짐이자, 현안 도인의 위선을 증명하는 비밀스러운 치부였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현안 도인의 얼굴에서 마침내 여유로운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살기등등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방자한 입놀림이 도를 넘었구나."
현안은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소매를 펄럭이며 무강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무강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스윽.
겉보기에는 가벼운 격려나 제압의 몸짓이었으나, 무강의 어깨뼈 깊숙한 곳으로 얼음처럼 차갑고 바늘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붉은 낙인(赤印)의 추적 술법이었다.
"네 전공은 인정하마. 그러나 네 무공의 출처는 본산의 집법당에서 철저히 규명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전장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현안이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그의 넓은 도포 소매 틈새로 기묘한 붉은빛이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무강의 영토인 환정마경이 그 기운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것은 사패천의 대마두, 사무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붉은 옥패'의 기류와 정확히 일치했다.
‘저 늙은 도둑놈이 사패천의 물건을 품고 있다니.’
백무강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정파의 명숙이라는 자가 뒤로는 사파의 기물과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현안은 제자들을 이끌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현운 역시 무거운 침묵 속에서 무강을 한 번 돌아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전장에는 피비린내와 차가운 바람만이 감돌았다.
***
그날로부터 석 달의 세월이 흘렀다.
풍락곡의 전선은 소모적인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체가 쌓여갔고, 정파와 사파의 경계는 오직 피로 물든 참호의 깊이로만 구분되었다.
그 지옥 같은 북풍의 전장에서 백무강은 살아남았다. 아니, 강해졌다.
매일 밤, 모두가 지쳐 잠든 시각. 백무강은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환정마경의 세계로 침잠했다.
우웅!
정신 영토를 가득 채운 것은 전장에서 쓰러져 간 사파 고수들과 혈살대원들의 원혼이었다. 그들의 망집과 광기가 붉은 안개가 되어 무강의 영혼을 갉아먹으려 달려들었다.
"크윽……!"
전신 맥락이 찢어지는 고통에 백무강의 피부 위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칠정반사의 위협은 매 순간 그의 목을 겨누는 비수와 같았다. 도심이 단 한 치만 흐트러져도 마해(魔海)에 빠져 전신맥락이 파열될 자멸의 위기였다.
그러나 무강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올 테면 와라. 전부 씹어 삼켜 줄 테니."
그는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와 고립감을 오히려 심마를 억누르는 방벽으로 삼았다. '나를 지키고, 내 사람들을 지킨다'는 단 하나의 지독한 갈망만이 그의 정신을 단단하게 결속하는 벼리였다.
쉬이이익!
그의 정신세계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의 상생 검의 원리가 마경의 기운을 유체(流體)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광포하게 날뛰던 원혼들의 기운이 이내 정순한 내력의 흐름으로 정련되어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완벽한 조화.
석 달 동안의 사투 끝에 무강의 내력은 세 단계를 뛰어넘어 마침내 화경(化境)의 문턱을 두드리는 초입에 도달했다. 이제 그의 검은 단순히 빠르고 강한 것을 넘어, 바람의 흐름을 타고 적의 경기를 흘려보낸 뒤 뼈를 부수는 무서운 경지에 이르렀다.
전장에서 무강이 이끄는 소규모 속가제자 부대는 '귀영대(鬼影隊)'라 불리며 사패천의 사신으로 군림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사파 무인들의 싸늘한 시체만이 남았다. 현안 도인이 그를 사지로 밀어 넣었으나, 무강은 오히려 그 사지를 자신의 가장 강력한 수련장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낙조가 붉게 물드는 저녁.
백무강은 참호 옆 바위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석 달의 세월은 그의 얼굴을 더욱 날카롭고 서늘하게 만들었다.
사락.
수풀을 헤치고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귀영대의 정찰을 담당하던 속가제자 한 명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무강의 앞으로 쓰러졌다.
"대, 대주님……!"
무강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즉시 사제의 혈도를 짚어 기혈을 안정시켰다.
"무슨 일이냐. 낙하원 근처의 경계선에 가 있던 놈이 왜 이 몰골이지?"
사제는 숨을 헐떡이며 품에서 붉은 검은 사슬 문양이 찍힌 가죽 서신을 꺼내 밀었다. 무강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그것은 낙하원에 긴급 파견되었던 본산 약제사의 표식이자, 지난날 그가 감지했던 사패천 첩자의 흔적이었다.
"낙하원에…… 사패천의 최정예 첩자가 침투했습니다. 지금 의원 전체가 포위당했고, 설 의원님과 식구들이…… 낙하원이 완전히 폐쇄당할 위기입니다!"
검을 닦던 무강의 손길이 멈추었다. 사방을 채우던 바람마저 그의 살기에 짓눌려 숨을 죽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마광(魔光)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마광(魔光)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신을 쥔 무강의 손가락끝이 잘게 떨렸다. 분노가 아닌, 전신의 피가 일시에 차갑게 식어 내리는 극도의 살의 때문이었다. 설화선. 그 이름 석 자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단전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마경의 기운이 족쇄를 풀고 꿈틀거렸다.
"살아 돌아왔으니, 네 몫의 명줄은 건진 셈이다. 누워 있거라."
무강의 목소리에는 단 한 자락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참호를 벗어났다. 낙하원으로 향하는 좁은 협곡의 어귀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어둠이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협곡의 출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스릉.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현운이었다. 그의 손에 쥔 묵검(墨劍)의 균열이 흐릿한 달빛을 받아 기괴하게 일렁였다.
"백 사제, 멈춰라."
현운의 목소리는 무거웠고, 그 안에는 깊은 고뇌와 서글픔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금 전선을 이탈하는 것은 명백한 탈영이다. 도사님께서 너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즉참할 명분을 제 발로 쥐여주는 격이야. 참아야 한다. 이것 또한 화산의 대의를 위한……."
"대의?"
무강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실소가 어둠 속에 낮게 깔렸다.
"그 고결한 대의라는 위선 아래, 사형은 이미 스스로의 검을 부러뜨리지 않았나. 무고한 이의 피를 묻히고 균열이 간 그 검을 쥐고서, 내게 또다시 참으라 말하는가?"
현운의 어깨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에 맞은 듯 크게 들썩였다. 과거의 치부를 정면으로 관통당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묵검의 자루를 고쳐 잡았다.
"너를 보낼 수 없다. 그것이 대제자인 내게 주어진 책무다."
"그 책무, 검으로 증명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운의 묵검이 허공을 갈랐다.
스어어억!
묵직하고도 정대한 화산의 강체(剛體)가 협곡의 공기를 찢으며 밀려들었다. 본산 대제자로서의 위엄이 담긴, 일말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벽 같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석 달 동안 사지에서 구르며 마경의 극의를 체득한 무강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무강의 신형이 기이하게 흐려졌다. 유체(流體)의 흐름을 탄 그의 신법은 마치 한 자락의 연기처럼 현운이 뿜어낸 강한 기류의 틈새를 유유히 파고들었다.
챙!
강(剛)과 유(柔)가 맞물리는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무강의 검 끝이 정확히 현운의 묵검에 나 있는 균열의 중심을 때렸다.
"윽!"
현운의 손목을 타고 뇌전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사파 고수들의 정수를 흡수하여 화경(化境)의 문턱에 도달한 무강의 정순한 내력은, 현운의 상상을 초월하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흔들리는 도심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무강은 검을 거두며 현운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냈다.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선 현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악과 함께 묘한 패배감이 감돌았다.
"사형의 검로는 여전히 곧으나, 사형의 도심은 이미 부러져 있소. 흔들리는 검으로는 나를 막지 못해."
무강은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스스스!
바람을 가르며 낙하원이 있는 서쪽을 향해 쾌속하게 신법을 전개하던 무강의 안색이 별안간 굳어졌다.
오른쪽 어깨뼈 깊은 곳에서, 석 달 전 현안 도인이 심어두었던 붉은 낙인(赤印)이 마치 불타는 달군 인두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신 맥락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내력 운용을 강하게 방해했다.
"크윽……!"
무강이 비틀거리며 나무 기둥을 짚었다. 칠정반사의 통증과는 결이 다른, 뼛속을 파고드는 지독한 추적의 낙인이었다.
그때, 하늘을 가리던 울창한 나뭇가지 위에서 대여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하강했다.
스스스슥!
그들은 화산파의 상징이 새겨진 흑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오직 문파의 추악한 비밀을 처리하고 반역자를 처단하는 본산의 집법대(執法隊)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무강의 사방을 가로막아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 어둠이 짙게 깔린 고목의 그늘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친히 사냥감을 꾀어내기 위해 미끼를 던졌거늘, 굶주린 짐승처럼 제 발로 개구멍을 나서는구나."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자는 현안 도인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음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군령을 어기고 탈영한 자는 그 자리에서 즉참(卽斬)하는 것이 강호의 오랜 법도. 백무강,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의 마공을 폐하고, 화산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처음부터 덫이었다. 현안 도인은 무강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사패천과 내통하여 낙하원의 정보를 흘리고 그를 사지 밖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타오르는 어깨의 통증 속에서, 무강은 자신을 에워싼 집법대의 시퍼런 검날과 현안 도인의 교활한 눈빛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멀리 떨어진 낙하원의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듯한 환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