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는 생혈(生血)의 비린내를 머금고 있었다. 훅,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살기는 피부를 에일 듯 차가웠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수십 자루의 만자도(彎字刀)가 백여 명의 속가무인들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뻗었다. 질풍처럼 짓쳐드는 사패천 최악의 유격 부대, 혈살대의 기습이었다.
"적습이다!"
"막아, 끄아아악!"
속가무인들의 비명이 자욱한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제대로 된 군진조차 짜지 못한 채, 사선의 최전방에 내몰린 이들의 육신이 맥없이 찢겨 나갔다. 살점이 튀고 뼈가 부러지는 파열음이 사방에서 고막을 때렸다.
허나 그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백무강의 눈동자만큼은 빙정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환정마경의 마기가 그의 기맥을 타고 들끓었다. 칠정반사의 희미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랐으나, 설화선이 달여 준 천명초의 약효가 가슴팍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오직 눈앞의 사냥감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스스스슥.
무강의 신형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사라진 듯하더니, 붉은 안개 속으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경의 절예 중 하나인 암야연잠(暗夜烟潛). 밤의 연기처럼 스며들어 적의 틈새를 잠식하는 신형보법이었다.
"어디를 보느냐."
귀곡성 같은 나지막한 음성이 혈살대원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이놈이……!"
혈살대 무인이 기겁하며 도를 뒤로 휘둘렀다. 쇠붙이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그러나 그의 칼날이 닿은 곳은 허공에 흩어지는 안개뿐이었다.
스각!
무강의 손가락이 날카로운 검기가 되어 적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굳건한 강체(剛體)의 힘으로 단련된 손끝이 혈살대원의 후두를 관통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적의 가슴팍으로 무강의 왼손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흡(吸).
찰나의 순간, 마경의 구결이 발동했다. 쓰러진 무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혼탁한 내력과 죽음에 직면한 망집이 무강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끈한 열기가 임독양맥을 타고 흘렀다. 전율이 척수를 자극했다. 죽음의 한복판이야말로 그에게는 가공할 영약의 밭이었다.
"저놈을 죽여라!"
무강의 이질적인 무위를 눈치챈 혈살대 무인 셋이 사방에서 합격을 전개해 왔다. 그들의 도 끝에서 붉은 도강이 피어오르며 그물을 짜듯 무강의 활로를 차단했다.
"하찮은 잔재주로군."
무강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화산의 검리인 줄 알았으나, 그 궤적은 지극히 변칙적이고 흉폭했다. 내력을 극도로 압축해 쏘아 보내는 강체의 파괴력이 도강의 그물을 정면에서 박살 냈다.
쾅!
철전이 부딪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혈살대원들의 도가 사방으로 부러져 나갔다. 반탄력에 무인들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무강의 신형이 유체(流體)의 흐름처럼 유연하게 꺾이며 그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파파팟!
세 번의 가벼운 타격음.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무강의 손끝에서 뿜어진 음유한 내경이 그들의 가슴뼈를 통과해 심맥을 직접 타격했다. 외상은 전혀 없었으나, 세 명의 혈살대원은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일시에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괴물…… 괴물 같은 놈!"
살육을 업으로 삼던 혈살대원들의 눈에 생전 처음 보는 공포가 서렸다. 그들이 아는 화산파의 검은 이토록 어둡고 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道)를 닦는 무인의 검이 아니라, 오직 살육만을 위해 벼려진 마도의 극의였다.
그때였다.
"무강!"
안개를 뚫고 맑고 강인한 기세가 전장으로 난입했다.
순백의 도포를 휘날리며 나타난 화산파 본산의 대제자, 현운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본산의 정예 도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혈살대의 측면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현운의 검은 엄정하고도 올곧았다. 매화의 검기가 허공을 수놓으며 혈살대원들의 살기를 지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몹시 어두웠다. 본산의 명숙이자 스승인 현안 도인의 억지스러운 명령으로 인해, 무고한 속가제자들이 이곳에서 소모품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챙! 챙!
현운이 세 명의 적을 연달아 베어 넘기며 무강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검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본산의 명을 수행하느라……."
"위선적이군."
무강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의 검 끝에서는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승의 추악한 야욕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도포자락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핑계를 대는 꼴이라니. 화산의 대제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나, 현운?"
"그것은……!"
현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쥐고 있는 시꺼먼 묵검(墨劍)으로 향했다.
그 검의 중간 부분에는 가느다랗지만 깊은 균열이 가 있었다. 마치 한 번 완전히 부러졌던 것을 억지로 이어 붙인 듯한 형상이었다.
무강의 예리한 안광이 그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환정마경의 안목은 흐트러진 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 검의 균열, 적의 보검에 부러진 것이 아니군."
"……!"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부러뜨린 균열이다. 검에 서린 기운이 안으로 꺾여 있어. 과거 스승의 위선적인 지시에 굴복해, 무고한 검수의 목을 베었을 때의 흔적인가?"
현운의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치욕이자 가장 거대한 심마였다.
과정은 가혹했다. 수년 전, 현안 도인은 문파의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마교의 첩자로 몰린 무고한 민간 검수 가문을 몰살하라 명했었다. 현운은 그것이 모함임을 알면서도 종문의 규율과 스승의 권위에 눌려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검수를 베는 순간, 그의 도심은 무너졌고 그 반동으로 정순하던 검기가 역류해 애검인 묵검을 부러뜨렸다. 그 후 억지로 이어 붙인 묵검을 들고 다니며 스스로를 징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아챘는가?"
현운의 음성이 떨렸다.
"무릇 무학이란 마음의 거울이다."
무강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생(相生)의 검을 논하면서, 그 손에는 썩어 문드러진 위선과 타협의 흔적을 쥐고 있지. 그런 검으로 어찌 하늘을 베고 땅을 다스리겠는가. 네놈이 지키고자 하는 그 화산의 명예라는 것이, 정작 산 아래 속가 식구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독초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가?"
"닥쳐라!"
현운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진 묵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사방의 안개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나 무강의 말은 송곳처럼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현안 도인의 명령으로 이 북쪽 구릉지로 향하는 속가제자들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스스로 느꼈던 그 깊은 혐오감을.
"우리는 이곳에서 죽지 않는다."
무강이 현운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네놈들이 버린 이 사지에서, 나는 나만의 도를 증명할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그 순간, 안개 너머에서 귀를 찢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
붉은 안개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한 사내를 중심으로 뭉쳐졌다. 혈살대의 대주였다. 전신에 피로 물든 갑주를 두른 그의 기세는 이미 초일류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화산의 애송이들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여기서 모두 내 도(刀)의 제물이 되리라!"
혈살대주가 대지를 박차며 쏘아져 왔다. 그의 만자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강기가 십여 장에 달해, 주변의 나무들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본산의 제자들이 그 가공할 살기에 질려 주춤거렸다. 현운 역시 검을 치켜세웠으나, 흔들리는 도심 탓에 검기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비켜라."
무강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기가 폭풍처럼 살포되었다. 환정마경의 진정한 힘이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혈살대원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원혼들의 망집이 무강의 뒤편에서 거대한 환영을 만들어 냈다.
"저, 저것은 대체……!"
현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파의 무공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오직 마(魔)의 극의에서만 발현될 수 있는 이질적이고도 압도적인 기세였다.
무강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정직하게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 단순한 궤적 안에는 강(剛)과 유(柔)의 극치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쿠구구구궁!
하늘이 울리고 대지가 뒤집히는 듯한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혈살대주의 핏빛 강기는 무강의 검 끝에 닿는 순간, 마치 얼음이 뜨거운 불을 만난 듯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유체의 흐름으로 적의 힘을 흘려보내고, 그 빈틈을 강체의 힘으로 완전히 분쇄하는 무학의 도리였다.
"이, 이럴 수가…… 사파의 내력이 어찌……!"
혈살대주는 자신의 도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파각!
무강의 검 끝이 혈살대주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의 신형이 무너지며,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커먼 원혼의 기운과 피에 젖은 내력이 무강의 단전으로 무섭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우!
전장에 가루를 뿌리듯 사파 고수들의 내력을 홀로 흡수하는 무강의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본산 제자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최하위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속가제자가 홀로 혈살대 전체를 압살하는 독무대를 연출한 것이다.
"하아…… 하아……."
무강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혈살대 대주의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독에 가까운 원혼의 감정들이 단전에서 폭발했다. 칠정반사(七情反噬). 죽은 이의 광기와 슬픔이 그의 도심을 찢어발기려 날뛰었다.
전신 맥락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무강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경의 심법을 운용해 간신히 그 폭주를 짓눌렀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스스스스…….
멀리서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질 때마다 사방의 안개가 기형적으로 갈라졌다. 그 위압적인 기세의 정체를 느끼는 순간, 현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결국…… 다 끝난 모양이구나."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
도포 자락을 단정히 정리한 채, 수하들을 거느리고 피 냄새를 쫓아 나타난 현안 도인이었다. 그의 음험한 눈빛이 혈살대의 무수한 사체들을 지나,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백무강의 얼굴에 멎었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