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인장이 찍힌 서신은 마치 갓 베어낸 심장에서 흘러내린 선혈처럼 붉었다.

"본산에서…… 본산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낙하원을 포함한 하급 속가 구역의 모든 무인과 의원들은 즉시 전장의 최전선인 사패천 접경지로 이동하라는 강제 징집령입니다!"

전령의 수려하지 못한 절규가 낙하원의 고요한 마당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흙먼지로 범벅이 된 전령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고, 그가 들고 있는 붉은 서신은 석양의 잔광을 받아 기괴한 안광을 뿜어냈다.

두 천재의 소리 없는 충돌이 무색하게, 본산의 가주이자 탐욕스러운 정치가인 현안 도인의 직인이 찍힌 군부 징집령이 마침내 낙하원에 떨어졌다. 정파의 명숙이라는 탈을 쓴 자가 보내온, 가장 잔혹하고도 위선적인 제물 요구서였다.

백무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전령의 손에 들린 서신을 지나, 멀리 붉게 물든 화산의 능선으로 향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차가운 침묵이 소용돌이쳤다.

"풍락곡(風樂谷)이라……."

서신에 적힌 행선지를 나지막이 읊조리는 무강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풍락곡은 사패천과의 접경지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혈투가 벌어지는 고기방패들의 무덤이었다. 본산의 고고한 도사들은 뒤로 빠진 채, 산 아래의 속가제자들을 사지로 밀어 넣어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형적인 소모 전술의 핵심지였다.

"무강아, 이건 함정이다. 현안 그 늙은이가 너를 기어코 죽이려는 게야."

설화선이 무강의 소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대범하게 환자의 뼈를 맞추던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가지 마라. 차라리 지금 밤을 틈타 낙하원을 버리고 도망치자꾸나. 강호는 넓고 우리가 숨을 곳 하나 없겠느냐?"

무강은 화선의 손길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떼어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도망친다면 그 늙은이가 보낸 집법대의 칼날이 이 낙하원을 먼저 피로 씻어낼 것입니다. 명분을 쥔 자들의 칼은 도망치지 못하는 약자에게 가장 맹렬히 쏟아지는 법이니까요."

그는 품속에서 환정마경의 마기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기운이 맥락을 타고 흐르며 차가운 살기를 충동질했다. 현안 도인의 음모는 명백했다. 징집에 응하지 않으면 반역의 무리로 몰아 멸문할 것이고, 응한다면 전장에서 합법적으로 죽일 터였다.

"피할 수 없다면, 그들이 준비한 사투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강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야수와도 같은 미소였다.

사지로 향하기 전날 밤, 낙하원의 부엌에서는 어김없이 씁쓸한 약초 향이 뿜어져 나왔다. 화선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짙은 갈색의 약탕을 묵묵히 달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약탕기를 젓는 손길만큼은 정성스러웠다.

"마셔라."

화선이 건넨 가죽 주머니에는 뜨거운 약탕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강은 묵묵히 주머니를 받아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평소보다 배는 더 쓰고 아린 맛이 혀끝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약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단전에 닿는 순간, 무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요동치던 환정마경의 음한한 마기가, 약탕의 온기가 닿자마자 기적처럼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성난 파도 위에 무거운 기름을 부은 것처럼, 날뛰던 칠정반사의 광기와 슬픔의 망집들이 일순간에 정화되며 정순한 내력으로 화해 맥락에 안착했다.

무강은 단전을 내시하며 전율했다.

'천명초(天命草)…….'

단순한 보혈 약재인 줄 알았던 이 씁쓸한 약탕에 들어간 천명초가, 사실은 마경의 극독과도 같은 한기를 억제하고 날뛰는 심마를 진정시키는 결정적인 결속구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선은 무강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기형적인 마도의 흐름을 은연중에 눈치채고, 그를 살리기 위해 매일 밤 이 약탕을 달여왔던 것이 분명했다.

"하루에 세 번, 한 방울도 거르지 말고 마셔야 한다. 내력이 뒤엉켜 미치고 싶지 않다면 내 말을 명심해라."

화선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녀는 무강이 마도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가 괴물이 되어 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의술로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무강은 가죽 주머니를 품에 소중히 가두었다. 차가운 얼음 같던 그의 가슴속에 묵직한 온기가 자리를 잡았다. 이 여인과 낙하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했다.

마당으로 나온 무강은 짐을 정리하던 중, 본산에서 낙하원의 약재 수송을 돕기 위해 긴급 파견되었다는 약제사 일손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중 먼지 낀 작업복을 입고 묵묵히 궤짝을 나르는 사내 하나가 무강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가 궤짝을 들어 올리는 순간, 헐거워진 소매 사이로 그의 손목이 드러났다.

무강의 안광이 번쩍였다. 사내의 손목 피부 깊숙이 새겨진, 검게 변색된 사슬 모양의 흉터. 그것은 단순한 상흔이 아니었다. 사패천의 잔혹한 대마두 사무희가 자신의 직속 척후들에게 낙인찍는 '흑사련(黑蛇漣)'의 표식이었다.

'쥐새끼가 벌써 둥지 안까지 들어와 있었군.'

무강은 즉시 검을 뽑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면 징집령의 명분을 해치고 낙하원이 먼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는 살기를 철저히 감춘 채, 사내의 얼굴을 뇌리에 깊이 새겨두었다.

"출정이다!"

이튿날 아침, 낙하원의 식구들과 하급 속가 무인 백여 명은 사풍이 몰아치는 최전방, 풍락곡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흘간의 강행군 끝에 도착한 풍락곡은 그야말로 지옥의 초입이었다.

골짜기 전체에 짙은 안개와 함께 썩은 철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사방에 흩어진 깨진 보검의 잔해들과 주인 없는 백골들이 이곳이 얼마나 참혹한 사투장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속가의 천한 무리들이 드디어 기어왔군."

풍락곡 중앙 군영에 들어서자마자, 본산의 직계 제자들이 가득한 장막 앞에서 오만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산파의 상징인 청정한 매화가 수놓아진 백색 도포를 입은 대제자 상진(尙進)이 비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의 뒤편에는 본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완성형 천재, 현운(玄雲)이 묵묵히 서 있었다. 현운의 손에는 여전히 날이 무디고 금이 간 묵검(墨劍)이 쥐어져 있었다. 과거 현안 도인의 위선적인 명령에 의해 무고한 검수를 베고 부러져 버렸던, 그의 마음의 짐을 상징하는 검이었다.

"낙하원의 약쟁이들과 속가의 잡배들이 이 엄숙한 전장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본산의 자비로운 명이 있었으니 쓰임새를 찾아주마."

상진이 지도 위의 한 곳을 가리켰다.

"북쪽 구릉지, 전방 3리 지점이다. 그곳의 험준한 초소를 너희 속가 무인들이 선점해라. 본산의 정예들이 뒤를 받쳐줄 테니, 뼈를 깎는 충성심으로 사패천의 진격을 막아내도록."

그것은 노골적인 사지(死地) 배치였다. 북쪽 구릉지는 엄폐물이 없고 사패천의 기습 유격 부대가 가장 먼저 들이닥치는 최악의 사투장이었다. 본산 제자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속가제자들을 고기방패로 던져버리려는 것이다.

"상진 사형,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묵묵히 서 있던 현운이 한 걸음 나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북쪽 구릉지는 방어 진지가 구축되지 않은 곳입니다. 무공이 깊지 않은 속가제자들을 그곳에 배치하는 것은 죽으라고 떠밀어 넣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운 사제! 자네는 본산의 대들보로서 문파의 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하네. 천한 자들의 목숨 몇 개 아끼려다 본산의 직계 정예들이 상한다면, 화산의 영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상진의 다그침에 현운은 입술을 깨물며 묵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규율과 명분, 그리고 스승인 현안 도인의 무거운 압박 속에서 그의 고결한 양심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현운은 무강을 바라보았으나, 무강의 얼굴에는 그 어떤 원망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무강의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지라고?'

무강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남들에게는 뼈를 묻을 무덤이겠지만, 환정마경을 품은 그에게 이 핏빛 전장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노다지였다. 죽은 무인들의 한과 원혼이 가득한 이곳수많은 일류 고수들의 사체가 뒹굴 이 전장이야말로 마경의 힘을 폭발적으로 격상시킬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본산의 위선자들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쾌재를 부를 때, 무강은 그들이 제공한 사투장에서 오롯이 강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꺼이 가도록 하지."

무강의 굵직한 음성이 군영의 장막을 흔들었다.

"우리는 북쪽 구릉지로 향한다. 본산의 대단하신 도사님들은 부디 그 고결한 도포에 피 한 방울 묻히지 말고 뒤에 편히 숨어 계시기를."

"이, 건방진 놈이……!"

상진이 분노로 얼굴을 붉혔으나, 무강은 이미 뒤를 돌아 속가 무인들을 이끌고 북쪽 구릉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운은 떠나가는 무강의 등 뒤를 바라보며, 부러진 묵검을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북쪽 구릉지로 향하는 길은 짙은 안개로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마다 뼈가 시려왔다. 무강은 단전을 조율하며 천명초 약탕의 기운이 전신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칠정반사의 고통은 완전히 제어되어 있었고, 그의 감각은 야수처럼 예리하게 곤두서 있었다.

스스스스…….

갑자기 사방의 바람이 멎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고요함이 내려앉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닌 극도의 살기가 빚어낸 진공 상태였다. 백여 명의 속가 무인들이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쿠구구구…….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방의 흰 안개가 순식간에 붉은색 핏빛 안개로 물들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기괴하고도 잔혹한 혈향(血香)이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온다."

무강이 검자루를 잡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스륵, 스스슥!

안개를 뚫고 나타난 형체들. 그들은 전신에 붉은 가죽 갑주를 걸치고, 기괴하게 휜 도(刀)를 든 사패천 최악의 척살 부대, '혈살대(血殺隊)'였다. 사체의 피로 도를 벼린다는 그들의 안광은 굶주린 늑대처럼 번뜩였다.

붉은 안개 속에서 혈살대의 대장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도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수십 명의 혈살대 무인들이 속가제자들을 향해 폭풍처럼 쏘아져 내려왔다. 죽음의 포위망이 그들의 목덜미를 조여오는 그 찰나, 무강의 손이 검자루에서 번개처럼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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