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마저 얼어붙는 찰나였다.

현운의 손에서 쏘아진 묵검이 허공을 가르며 푸른 궤적을 그렸다. 화산파 본산이 자랑하는 정순한 도가의 진기가 푸르스름한 검광을 띠며 백무강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었다. 살수(殺手)가 아니었다. 그러나 피하지 못한다면 목뼈가 산산조각이 나거나 기혈이 뒤틀려 폐인이 될 것이 자명한 일격.

백무강의 턱끝이 서늘한 기파에 찔려 찌르르 떨렸다.

‘빠르다.’

본산 대제자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검 끝이 시야에 닿기도 전에, 살을 에는 듯한 검압이 먼저 숨통을 조여 왔다. 피할 곳은 없었다. 퇴로를 고집하는 순간 검기가 심장을 꿰뚫을 터였다.

그 순간, 백무강의 단전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환정마경(幻情魔經)이 사납게 요동쳤다.

쿠구구구!

핏빛 마기가 맥락을 타고 역류했다. 뇌해(腦海) 속에서 정체불명의 원혼이 지른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파일류 검수의 망집(妄執)이 무강의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붉은 선으로 그려진 기괴한 검로가 번뜩였다.

"합(哈)!"

무강의 입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가 쥐고 있던 투박한 철검이 사선으로 치솟았다. 화산의 정종 검법인 매화검결과는 궤를 달리하는, 오직 생존만을 위해 바닥에서 길러진 진흙탕의 살수였다. 검 끝이 현운의 묵검 측면을 사납게 들이받았다.

깡-!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가 낙하원의 고요를 산산조각 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무강의 철검을 타고 흘러든 붉은 마기가 톱니바퀴처럼 현운의 푸른 검기를 물고 늘어졌다. 뒤틀고, 짓이기고, 기어이 방향을 꺾어버리는 파괴적인 역력(逆力)이었다.

"이것은…!"

현운의 단정한 미간이 처음으로 크게 구겨졌다.

자신의 정순한 도가 진기가 정면에서 상쇄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궤적에 휘말려 옆으로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현운의 묵검이 허공으로 빗겨 나갔다.

퍼어어억!

빗겨 나간 푸른 검기와 무강의 붉은 진기가 마당 바닥에 처박혔다.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단단하게 다져져 있던 낙하원의 앞마당이 마치 거대한 괴수의 발톱에 할퀸 것처럼 사정없이 뒤집히며 깊은 도랑을 만들어냈다. 사방으로 튀는 돌멩이들이 흙벽을 때리며 타다닥 소리를 냈다.

무강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흙바닥에 깊은 발자국이 패였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철검의 검신에는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맞닿은 손아귀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자루를 적셨다.

하지만 현운 역시 제자리에 서 있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반 걸음 뒤로 밀려났다. 본산의 대제자가, 고작 속가의 이름 없는 제자의 반격에 중심을 잃고 밀려난 것이다.

"화산의 검이 아니다."

현운이 묵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차가운 눈으로 무강을 응시했다.

"그 질척이고 흉포한 기운은 필시 사마(邪魔)의 것. 너는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손에 넣은 것이냐? 속가의 무공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본산의 고귀하신 눈에는 모든 힘이 사악하게만 보이겠지요."

무강이 이죽거렸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그는 검자루를 더욱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의 도발적인 언사와 달리, 내부는 이미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으윽…!’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환정마경을 강제로 끌어다 쓴 대가가 즉각적으로 전신을 덮쳤다. 단전을 가득 채운 붉은 마기가 통제를 잃고 중정(中庭)을 향해 미친 듯이 치솟았다. 칠정반사(七情反噬)의 이빨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 억울하다!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이냐! - 다 죽여라! 저 선풍도골을 한 위선자들의 목을 전부 따버려!

수많은 원혼의 망집이 머릿속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무강의 눈동자가 점차 초점을 잃고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안구의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시야가 붉게 변했다. 귀안(鬼眼)이 열린 것이다. 전신의 피부 밑으로 검푸른 혈관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심마(心魔)가 그의 도심을 꺾고 육신을 차지하려 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 무강의 무릎이 꺾이려 했다.

"무강아!"

그때, 흙먼지를 뚫고 맑으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설화선이었다. 그녀는 두 고수의 진기 충돌로 여전히 여파가 남아 있는 마당 안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늘 불 위에 올려두었던, 검게 그을린 옹기 사발이 들려 있었다.

"물러서십시오, 설 의원! 그자는 지금 마기에 잠식되어 가고 있소!"

현운이 경고하며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화선은 현운의 서늘한 기파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강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숨을 헐떡이며 자멸해 가는 환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비켜요! 내 환자예요!"

화선이 소리치며 무강의 빰을 감싸 안았다.

무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을 검게 그슬렸지만, 화선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는 옹기 사발을 무강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마셔. 어서 마셔, 무강아!"

사발 안에서 풍겨 나오는 것은 코를 찌를 듯이 시큼하고 씁쓸한 약취(藥臭)였다.

무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머릿속의 마기가 그 약탕을 거부하라고, 그것을 마시는 순간 자신들이 소멸할 것이라고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선의 단호한 손길이 무강의 턱을 꽉 움켜쥐었다.

"살고 싶으면 삼켜!"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고집스러운 청년을 살려내겠다는 강인한 의지였다.

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꿀꺽, 꿀꺽.

뜨겁고 씁쓸한 약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단전으로 흘러내려 갔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단전을 광란하듯 휩쓸던 붉은 마기가, 약탕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어 내리기 시작했다. 전신을 불태울 것 같던 열기가 가라앉고, 뼈마디를 시리게 만들던 환정마경의 혹독한 한기가 약탕의 온기에 녹아내렸다.

‘이것은… 천명초(天命草)?’

무강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가 며칠 전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며 캐왔던 씁쓸한 잡초. 설화선이 매일 밤 정성스레 달여 주던 그 약탕에 들어간 천명초가, 사실은 환정마경의 폭주를 억제하고 맥맥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한기 억제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초로 분류되어 아무도 쓰지 않던 그 풀이, 마교의 금단 심법을 다스리는 유일한 영약이 되어 그의 혈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하아…… 하아……."

무강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었다.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다시 검고 깊은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피부 위로 솟구쳤던 검푸른 혈관들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무강은 옹기 사발을 내려놓으며 설화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독설을 입에 담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느냐?"

화선이 땀방울이 맺힌 무강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신세를 졌군."

무강이 퉁명스럽게 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다시 현운을 향해 섰다. 비록 내력은 안정되었으나 전신에 쌓인 피로는 지울 수 없었다. 만약 현운이 다시금 검을 뽑아 든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대적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현운은 더 이상 검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그는 묵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철컥하는 맑은 쇠붙이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어째서 검을 거두는 것입니까?"

무강이 날을 세워 물었다.

현운은 묵검의 자루를 어루만지며 무강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무강의 손에 들린 균열 간 철검과, 조금 전 그가 펼쳐 보인 검로의 흔적이 남은 바닥으로 향했다.

"네 검에는 사악한 기운이 깃들어 있으나, 그 끝에는 삶을 갈망하는 처절함이 있었다. 진정 도심을 잃고 마(魔)에 물든 자라면, 방금 전의 일격에 내 목을 취하려 살수를 뻗었을 터. 하지만 너는 내 검을 흘려보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현운의 목소리에는 고집스러운 규율 대신, 한 명의 검수로서 느끼는 기이한 경외와 쓸쓸함이 묻어났다.

"너는 괴물이 아니다. 그저 이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금기(禁忌)를 삼킨 가련한 무인일 뿐이지."

"동정은 필요 없습니다."

"동정이 아니다. 인정이다."

현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본산의 대제자로서가 아니라, 화산의 검을 잡은 자로서 너를 정당한 상대로 인정하겠다. 속가의 제자라 하여 네가 이룩한 무학의 깊이까지 무시당할 이유는 없다."

현운의 양심은 정직했다. 그는 종문의 규율과 위선적인 명분 아래 신음하는 속가제자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강의 반항적인 태도 이면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도심(道心)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현운의 표정은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명심해라, 백무강."

그가 엄숙한 고어로 경고했다.

"내가 너를 인정한다 한들, 산 위의 이빨들은 멈추지 않는다. 다가오는 정사대전의 폭풍은 본산의 상층부마저 광기로 몰아가고 있다. 특히 현안 도인께서는 문파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속가의 피 따위는 강물처럼 흘려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아니, 너는 아직 모른다. 본산의 팽창 압박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자비하고 치밀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곳 낙하원 역시 그 폭풍우를 피할 수 없을 터다. 부디 네가 삼킨 그 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힘이 너와 네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가장 먼저 집어삼킬 것이다."

현운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넓은 어깨에 얹힌 본산 대제자의 책임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그는 부러진 묵검의 흔적을 품은 채, 쓸쓸한 걸음걸이로 낙하원의 사립문을 향해 걸어갔다.

무강은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비록 적대적인 입장으로 마주했으나, 현운이라는 인물이 가진 정당한 신념과 고결한 양심만큼은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잠깐만요."

화선이 떠나는 현운의 뒤에 대고 약포지를 내밀었다.

"손가락에 상처가 났어요. 본산의 훌륭한 약이 많겠지만, 우리 낙하원의 약초도 제법 잘 듣는답니다."

현운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화선이 내민 약포지를 조용히 받아들었다. 그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따뜻한 호선이 그려졌다.

"고맙소, 설 의원."

현운의 신형이 낙조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싸움은 끝났고, 폭풍은 한차례 비껴간 듯했다. 마당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가라앉으며, 씁쓸한 약초 향만이 노을빛 아래 잔잔하게 흩날렸다.

무강은 가만히 단전을 내시(內視)했다.

천명초 약탕의 효능 덕분에 날뛰던 마기는 완전히 진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칠정반사의 고통을 극복해 내자, 환정마경의 내력이 한 단계 더 정순하게 정화되어 그의 맥락에 완전히 안착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그의 무공 내력이 한층 더 깊고 단단해진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화선이 무강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쿡 찔렀다.

"내가 준 약을 제때 안 먹으니까 이 사달이 나지. 다음부터는 하루에 세 번,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셔.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 가보십시오. 피곤합니다."

무강이 툴툴거리며 검을 챙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준 이 여인과, 이 허름한 낙하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노라고, 그는 마음속 깊이 맹세했다.

그 평화로운 다짐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타다다다닥!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전령의 급박한 발소리가 낙하원의 고요를 무참히 깨뜨렸다.

사립문이 거칠게 열리며,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속가 전령 한 명이 마당으로 굴러들어 왔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에는 황급히 쥐고 온 통신통이 들려 있었다.

"백… 백 형님! 큰일 났습니다!"

전령이 바닥에 엎어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무강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전령은 떨리는 손으로 통신통을 열어, 그 안에서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인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 서신의 겉면에는 붉은 인장(印章)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파의 공문이 아니었다. 화산파 본산의 가주이자, 무자비한 권력가인 현안 도인의 개인 직인이 찍힌 붉은색 군부 징집령(徵集令)이었다.

"본산에서… 본산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낙하원을 포함한 하급 속가 구역의 모든 무인과 의원들은 즉시 전장의 최전선인 사패천 접경지로 이동하라는 강제 징집령입니다!"

전령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거부하는 자는 문파의 반역자로 규정하여 그 자리에서 멸문(滅門)에 처하겠다고 하십니다!"

붉은 서신이 낙조의 붉은 빛을 받아 마치 피에 젖은 것처럼 번뜩였다.

현안 도인의 음모가, 마침내 낙하원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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