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뒤덮은 황금빛 천칭 문양이 번쩍이자마자, 고막을 찢는 듯한 나팔 소리가 아카데미 후방을 난타했다.
아드리안의 그 잘나신 목소리가 언덕 너머 그레이 가든의 숲속까지 징그럽게 울려 퍼졌다.
"반역자 강현우라니, 진짜 억까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네."
나는 귓구멍을 후비며 가죽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빛 선언문이 하늘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꼴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드러누워서 꿀 빠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인 사람한테 반역자 프레임을 씌우다니, 총장 놈의 인성이 아주 훤히 보였다.
"현우야! 저거 장난 아닌데? 진짜로 다 죽이려고 작정하고 온 모양이야!"
엘리제가 연금술 도구들이 가득 담긴 가방을 끌어안은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땋아 내린 은발이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보단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군, 적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외곽 경계선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백설아가 검은 대검의 자루를 꽉 쥔 채 내 옆으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그레이 가든의 장막 너머로 빽빽한 금빛 물결이 밀려들고 있었다.
진짜로 온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의 절대 권력이자, 잘난 10%의 인류 보존을 부르짖는 아드리안의 광휘 기사단이.
쿠구구구둥─!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금빛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대열을 맞췄다.
그 수는 족히 수천.
그들은 그레이 가든을 둘러싼 왜곡 장막의 경계선 바깥에 정확히 3중 진형을 구축했다.
앞열의 방패병들이 거대한 타워 실드를 땅에 박아 넣어 철벽을 세웠다.
그 뒤로 마력 포를 짊어진 마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포신을 들어 올렸다.
철컥! 철컥! 철컥!
기계적인 금속음이 사방에서 공명하며 전장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토벌 기포, 조준 완료!"
"발사하라! 더러운 이단들의 요새를 정화하라!"
지휘관의 앙칼진 외침과 함께, 수십 문의 마력 포에서 일제히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대기를 찢는 포성과 함께 수십 발의 마력 포탄이 그레이 가든을 향해 빗발쳤다.
포탄들은 반공중에서 이리저리 휘어지며, 공간을 왜곡하고 있는 보랏빛 장막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구구궁! 콰아앙!
하늘이 무너져라 터지는 폭음 속에서 거대한 불꽃과 불꽃놀이 같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장막 내부의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입안에 사탕을 굴리고 있었다.
"야, 엘리제."
"어, 왜? 나 지금 엄청 바쁜데!"
"저 새끼들 마력 포탄 한 발에 얼마쯤 할 거 같냐?"
엘리제가 포탑 조율 장치를 만지다 말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 대략 한 발에 최소 500골드는 할 텐데? 왜 갑자기 그건 물어?"
"그냥. 눈앞에서 수만 골드가 공중분해 되는 걸 보니까 기분이 꽤 상쾌해서."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콰앙! 쾅!
장막에 부딪힌 마력 포탄들은 단 한 발도 그레이 가든 내부로 진입하지 못했다.
왜곡 장막은 수천 명의 피난민이 제공하는 생체 에너지와 내 상태창의 인과 조작으로 이미 규격 외의 방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포탄이 닿는 순간, 그 궤적과 운동에너지가 90도로 꺾여 허공으로 날아가 터질 뿐이었다.
"진짜 괴물 같은 방어력이네. 물리 법칙을 아주 껌처럼 씹어 드시는구나, 우리 영주님은?"
엘리제가 혀를 내두르며 자신이 준비한 병기들을 하나둘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직접 개조한 '베르그식 3연장 마력 포탑' 다섯 기가 철컥거리며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포탑의 총신에는 시퍼런 연금술 마력탄들이 체인처럼 촘촘하게 엮여 들어갔다.
"백설아, 네 쪽은 준비 끝났어?"
엘리제가 소리치자, 백설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뒤로 검은 제복을 입은 가문의 생존자들과 무장한 피난민들이 활과 마력 총을 꼬셔 잡았다.
"언제든 명령만 내리십시오. 저 오만한 위선자들의 목을 베어 주군께 바치겠습니다."
백설아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그녀의 가문을 멸문 지경으로 몰아갔던 기득권의 상징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상태창을 띄웠다.
띠링!
[심연의 이중 상태창(Abyss Dual Status)을 활성화합니다.]
[경고: 인과 에러율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재 심연의 침식도: 12%]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상태창과 그 뒤로 일렁이는 붉은색 에러 메시지들이 겹쳐 보였다.
나는 아드리안 기사단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황금빛 오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아드리안이 소지한 '질서의 성궤'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역 버프였다.
[대상 정보 분석 중…….] [분석 완료: '고정 신성 강화(Absolute Holy Blessing)' 적용 중.] - 효과: 모든 물리 및 마법 피해 80% 감소, 상태 이상 면역, 신성 속성 대미지 300% 증가.
"미친 버프 보소. 운영자 새끼가 대놓고 밀어주는 보스 몹 수준이네."
하지만 내 입꼬리는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갔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완벽하게 정형화된 시스템 버프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코드 누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붉은색 상태창의 명령줄에 직접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에러 코드: '인과 왜곡 - 데이터베이스 강제 스캔'을 실행합니다.]
[스캔 대상: 광휘 기사단 전체의 '고정 신성 강화' 네트워크.]
파지직!
내 눈앞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보랏빛 노이즈로 가득 찼다.
머릿속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찌릿했지만, 이 정도 통증은 가볍게 씹어 넘길 수 있었다.
[스캔 성공!] ['고정 신성 강화'의 인과율 접속 프로토콜을 확보했습니다.] [에러 주입 준비 완료. 대상을 지정하십시오.]
"좋아, 백도어는 확실하게 열어뒀고."
나는 품속에서 엘리제가 정제해 준 최고급 '아르케 엘릭서' 실린더를 꺼내 가볍게 들이켰다.
쌉싸름하면서도 머리를 맑게 해주는 마력이 전신으로 퍼지며 침식도를 다시 안정권으로 떨어뜨렸다.
이 비싼 엘릭서를 물 마시듯 써야 하는 게 좀 가슴 아프지만, 저놈들을 털어먹으면 몇 배로 회수할 수 있었다.
"어라? 저놈들 봐라? 포격이 안 통하니까 직접 기어들어 오는데?"
엘리제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포격으로 장막을 뚫지 못하자, 기사단의 대열이 좌우로 갈라지며 하나의 거대한 통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은빛 갑옷을 입고 거대한 철퇴를 든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바로 토벌 단장이자 아드리안의 충직한 사냥개, 마르쿠스 크롤이었다.
그는 그레이 가든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진입 통로인 숲길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곳은 왜곡 장막이 쳐져 있지 않아, 겉보기엔 아무 방비도 없는 평범한 오솔길처럼 보였다.
"흥, 겁쟁이 놈들. 장막 뒤에 숨어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더냐!"
마르쿠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 보잘것없는 숲길이 너희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전군, 진격하라! 반역자 강현우의 머리를 베는 자에게는 총장님의 특별 포상이 내릴 것이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황금빛 갑옷을 입은 수천 명의 기단원들이 숲길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고정 신성 강화'의 무적에 가까운 방어력을 맹신하고 있었다.
그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든, 자신들의 신성한 갑옷을 뚫을 수 없으리라 확신하는 오만함이 그들의 발걸음에 가득했다.
"저 지능 떨어지는 새끼들, 진짜 그냥 걸어 들어오네."
나는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그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현우야, 지금 쏠까? 지금 쏘면 완전 대박인데!"
엘리제가 포탑 발사 스위치를 움켜쥔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기다려. 아직 물고기들이 어망에 다 안 들어왔어."
나는 백설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설아 너는 마르쿠스 저 새끼 마력 순환 흐름만 계속 마킹해 둬."
"예, 주군. 이미 저자의 마력 순환 경로 상의 결함을 포착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하단의 마력 혈류가 비정상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백설아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6화에서 알아냈던 마르쿠스의 치명적인 약점.
그는 강력한 무력을 지녔지만, 과거의 부상으로 인해 마력 순환 경로에 고정된 결함을 품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성 버프로 억누르고 있지만, 내가 이중 상태창으로 그 버프를 뒤흔드는 순간 저놈의 몸뚱이는 스스로 폭발하는 마력 폭탄이 될 터였다.
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그레이 가든의 진입 통로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사방을 둘러싼 고요한 숲이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음?"
선두에 서서 걸어가던 마르쿠스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 아래에는, 내가 미리 심어둔 '인과 왜곡의 에러 덫'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놓여 있던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웰컴 투 그레이 가든, 이 자식들아."
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떨어지는 순간.
마르쿠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하고, 더는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철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잔머리를 굴려 보았자, 신성한 질서의 불꽃 앞에서는 먼지가 될 뿐이다!"
마르쿠스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그의 철퇴 끝에서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드리안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도를 넘은 광범위 섬멸 소멸 마법이었다.
지면 위에 거대하고 기괴한 마법 진이 그려지며, 그레이 가든의 숲 전체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그 파괴적인 에너지는 영지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것처럼 흉포하게 요동쳤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신 총장님이 내리신 질서의 심판이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라!"
마르쿠스의 광기 어린 포효와 함께, 하늘을 붉게 물들인 마법진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당장이라도 그레이 가든 전체를 증발시킬 기세로 짓눌러오는 마력의 압박감.
평범한 헌터라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을 연출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덜 떨어진 허점투성이 코드로 보일 뿐이었다.
"응, 어서 오고. 느그 집 안방에는 이런 치트키 없지?"
나는 코방귀를 뀌며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에러 코드: '물리 법칙 왜곡 - 마력 전도율 역전'을 선포합니다.]
[지정 영역: 그레이 가든 진입 통로 반경 100m.]
[효과: 해당 영역 내의 모든 마력 흐름을 -500%로 강제 역전시킵니다.]
파지직! 파지직!
붉은 마법진의 테두리에서 보랏빛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더니, 이내 회전 방향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하늘로 솟구치던 마력의 줄기들이 갈 갈이 찢기며, 오히려 시전자들에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마법진의 마력이 왜 우리 쪽으로 흐르는 거지?!"
선두에 서 있던 기단원들이 당황해하며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이건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인과율 자체를 비틀어버린 역류 현상이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6화에서 미리 따둔 마르쿠스의 숨겨진 결함 코드를 실행시켰다.
"백설아, 마킹해 둔 곳 좌표 찍어."
"예, 주군. 좌표 전송 완료했습니다."
백설아의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내 이중 상태창에 마르쿠스의 오른쪽 어깨 부위가 붉은 타겟팅 마크로 표시되었다.
[타겟 확보: 마르쿠스 크롤의 고정 결함 '우견 마력 혈류 폐색'.]
[강제 에러 주입: 해당 결함 부위의 마력 압력을 1,000%로 과부하합니다.]
콰지직!
갑자기 마르쿠스의 오른쪽 어깨 갑옷이 찌그러지며, 그 사이로 검붉은 피와 마력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내, 내 마력 순환이…… 왜 갑자기 멈춘……?!"
마르쿠스가 거대한 철퇴를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고정 신성 강화'의 황금빛 오라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버프가 흔들리자, 기사단 전체를 연결하고 있던 신성 네트워크에 치명적인 피드백 루프가 발생했다.
"에러 코드 추가 주입. 역류하는 마력의 연료로 기사단의 버프 에너지를 치환한다."
[인과의 에러가 강제 적용됩니다!]
[광휘 기사단 전체의 '고정 신성 강화'가 '마력 가속 폭주' 상태로 변질됩니다.]
"끄아아악! 몸이, 몸이 뜨거워진다!"
"마력이 제어가 안 돼! 으아아악!"
황금빛 무적의 버프를 믿고 기고만장하게 걸어 들어오던 기단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네트워크의 종착지인 마르쿠스의 몸으로 강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 발전기들이 하나의 거대한 폭탄에 전력을 공급하는 꼴이었다.
"와, 대박이다. 저 아저씨 완전 인간 풍선이 됐는데?"
엘리제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실제로 마르쿠스의 몸은 넘쳐나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괴할 정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10초 뒤에 기사단 절반과 함께 아주 화끈하게 폭발해 사라질 터였다.
완벽한 승기였다.
이대로 팝콘이나 씹으며 구경하면 끝나는 상황.
하지만 아카데미의 최종 보스인 아드리안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일 리가 없었다.
"우우우웅─!"
갑자기 마르쿠스의 품속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순백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황금색 상자의 파편이었다.
아드리안이 소지하고 있다는 전설적인 유물, '질서의 성궤'의 복제품 파편이었다.
"총장님……! 살려, 살려주십시오……!"
마르쿠스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자, 성궤의 파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거대한 질서의 역장을 형성했다.
[경고! 외계 인과율 '질서의 성궤'가 강제 개입을 시작합니다.]
[성궤의 강제 정화 프로토콜이 작동합니다. 영역 내의 모든 에러 코드를 소거하려 합니다.]
징이이잉─!
순백의 역장이 그레이 가든의 숲길을 쓸고 지나가자, 내 상태창의 에러 메시지들이 하나둘 강제로 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르쿠스의 몸에 누적되던 폭주 마력이 순식간에 정제되더니, 엄청난 밀도의 열에너지로 치환되었다.
"반역자 강현우……! 너와 네 요새를 통째로 정화하겠다!"
성궤의 힘으로 이성을 잃고 광신도가 된 마르쿠스가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불태우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의 화염이 그레이 가든의 방어 장막마저 녹여버릴 듯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사정없이 울려 퍼졌다.
[위험! 시스템 왜곡율이 임계치를 돌파했습니다!]
[심연의 침식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현재 침식도: 28% -> 49% -> 72%!]
"아, 윽……!"
순간적으로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며, 지독한 현기증이 내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흐려지고, 세상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이는 광증의 전조 증상이었다.
성궤의 억지력과 정면충돌하면서 발생한 과부하가 내 뇌를 직접 때린 것이다.
"현우야! 너 눈에서 검은 피가 흘러! 괜찮은 거야?!"
엘리제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 와중에 마르쿠스는 성궤의 힘을 두른 채, 대지를 녹이는 백색의 거인처럼 변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시야는 암전되어 가고, 적의 최종 파멸 일격은 코앞까지 닥쳐온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품속에 남은 마지막 엘릭서 실린더로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