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선을 넘네."

나는 레오폴드가 내민 붉은 직인의 포고문을 뺏어 들었다.

양고기 가죽으로 만든 포고문은 빳빳했고, 마르쿠스의 마력이 서려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열감이 전해졌다.

내용은 단순 명료했다.

그레이 가든으로 향하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흙 한 줌, 물 한 방울조차 유입을 금지한다는 초강수.

"아니, 내 눕방 라이프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굶겨 죽이겠다고?"

참신하게 미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레이 가든을 어떻게 만들었는데, 감히 이 안락한 요람에 똥물을 뿌리려 들어?

"강, 강현우 학생!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원탁의 기사단이 벌써 남쪽 진입로에 목책을 세우고 통행을 통제하고 있어요!"

레오폴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미끈한 이마에 핏대가 선 것을 보니 상황이 제법 쫄깃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진정해, 레오폴드. 쟤들이 문을 잠그면, 우리는 지붕을 뚫으면 되는 거야."

나는 턱을 괴고 씨긋 웃었다.

"엘리제, 아까 그 고대 일지 조각 가져와 봐."

"응? 이거? 그 해독 불가능하다던 구세대 쓰레기 종이 쪼가리?"

엘리제가 구석에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죽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누런 종이 조각을 꺼냈다.

3화에서 고대 유적을 털 때 슬쩍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이거 글자가 죄다 뭉개지고 고대 제국 어법이라 아카데미 교수들도 해독 포기한 거래매?"

엘리제가 콧방귀를 뀌며 종이를 흔들었다.

"응, 걔들은 멍청해서 못 한 거고. 나한테는 치트키가 있잖아."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심연의 이중 상태창을 활성화합니다.]

[특수 기능: '인과의 에러(Error)'를 실행합니다.]

[대상: 구세대 연금술 일지 조각 (파손율 87%)]

[에러 코드 404: 데이터 손실 구역의 인과를 강제 복구합니다. 물리적 마모도를 영(0)으로 고정합니다.]

파지직!

공중에 뜬 보라색 시스템 이펙트가 누런 일지 조각을 감싸 안았다.

타버린 재처럼 거뭇하던 종이 표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탈색되며, 기괴한 고대 문자들이 정렬하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스스로 위치를 찾아가며 완벽한 정제 공식으로 재조립되는 광경이었다.

"어…… 어어?!"

엘리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복구된 일지의 내용을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갔다.

"이, 이건…… 단순한 일지가 아니야! 고대 연금술사들이 아르케 엘릭서를 정제할 때 쓰던 '역방향 여과 공식'이잖아?!"

"가독성 달달하지? 해석해 봐."

"미쳤어! 진짜 미쳤다고! 기존의 정제법은 마력의 80%가 대기 중으로 비산해서 효율이 똥망이었는데…… 이 공식을 대입하면 마력 손실률이 제로에 수렴해!"

엘리제가 흥분으로 얼굴을 붉히며 내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현우야! 이거 쓰면 아르케 엘릭서 제련 효율이 최소 400% 급증해! 4배라고, 4배!"

[복선 회수 완료: 고대 유적의 일지 해독으로 아르케 엘릭서 제련 효율 400% 증가!]

"거봐, 내가 뭐랬어. 대기업 놈들이 골목상권 쥐어짜려 할 때가 가장 털어먹기 좋은 타이밍이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마르쿠스 그 멍청한 자식은 자기가 우리 목줄을 쥐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 뭔지 아는가?

대체 불가능한 독점 기술을 가진 판매자를 상대로 유통망 봉쇄를 거는 것이다.

"엘리제, 바로 시제품 뽑아 봐. 가장 싸구려 약초에 이 공식을 얹어서 '초고농축 안정 엘릭서'로 둔갑시키는 거야."

"흐흥, 사기극 하나 벌이시겠다? 내 전공이지. 단가는 10골드도 안 들 텐데, 얼마에 팔 거야?"

"무슨 소리야. 공짜로 풀 건데."

"……하?"

엘리제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레오폴드마저 턱이 빠질 듯한 얼굴로 침묵했다.

"공짜? 야, 너 머리 다쳤어? 400% 효율 뽑아놓고 기부천사 코스프레라도 하겠다는 거야?"

"기부는 무슨. 낚시할 때 미끼 아끼는 어부 봤어?"

나는 포고문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원탁 놈들이 하층민들 통제하는 수단이 뭐지? 던전 오염을 치료해 준답시고 파는 그 조잡한 '성수 물약'이잖아."

독과점 시장의 폐해는 늘 가격 거품과 성능 저하로 나타난다.

원탁은 하층민들에게 쓰레기 같은 물약을 비싼 값에 팔며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장을 우리가 무료 나눔으로 아주 개박살을 내버리는 거지."

***

사흘 뒤.

아카데미 하층 구역, 일명 '버려진 슬럼가'라 불리는 서부 지구의 광장.

원탁의 기사단이 그레이 가든을 겹겹이 포위하고 교역을 차단했다는 소식에 하층민들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그레이 가든마저 무너지면 우린 진짜 끝이야……."

"원탁의 맛없는 오염 방지 물약은 갈수록 비싸지는데, 이제 어쩌지?"

절망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광장 한구석.

백설아가 이끄는 상단이 커다란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수레 위에는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정갈한 유리병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레이 가든의 영주, 강현우 님의 명입니다."

백설아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원탁의 불법적인 봉쇄령으로 고통받는 아카데미 주민들을 위해, 저희 가든에서 직접 정제한 '초고농축 안정 엘릭서'를 무상으로 배포합니다."

"무, 무상이라고?!"

"말도 안 돼! 저 귀한 연금술 시약을 그냥 준다고?"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몸에 마력 중독 증세가 심해 피부가 썩어가던 한 노인이 약을 받아 마셨다.

꿀꺽.

노인의 목구멍으로 푸른 액체가 넘어가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

파아앗!

노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거무죽죽한 오염의 기운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짓물렀던 피부가 뽀얗게 새살로 돋아나고, 흐릿하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 어어?! 내, 내 호흡이 편해졌어! 통증이 전혀 없어!"

노인이 제 자리에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이건 원탁이 팔던 성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돼! 마시자마자 온몸의 마력이 정화되는 게 느껴져!"

순식간에 광장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나도 주시오! 제발 한 병만!"

"우리 아이가 마력 열병에 걸렸습니다! 제발!"

백설아는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엘릭서를 나누어 주며 덧붙였다.

"이 약은 오직 그레이 가든의 기술로만 제작됩니다. 비록 지금은 원탁의 억압으로 유통이 어렵지만…… 저희는 끝까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한마디에 하층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실질적인 이익.

그리고 목숨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성능.

원탁이 그동안 자신들을 착취해 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은 이들에게, 이제 그레이 가든은 단순한 영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구원의 땅'이자 마지막 방주였다.

"원탁 이 개새끼들! 지들이 뭔데 그레이 가든을 봉쇄해?!"

"우리 살 길을 막는 놈들이 진짜 악마다!"

민심의 흐름이 무서운 기세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아카데미 중앙 원탁 의사당.

탁! 탁! 탁!

분노에 가득 찬 주먹질이 고급 대리석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설명해 봐라, 마르쿠스!"

원탁의 고위 의원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마르쿠스 크롤은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그게…… 그레이 가든 쪽에서 정체불명의 고성능 엘릭서를 하층 구역에 무상으로 살포하고 있습니다."

"무상 살포?! 미쳤나? 그 아까운 연금술 시약을 공짜로 푼단 말인가? 재정이 버텨낼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조사 결과, 그들이 배포하는 엘릭서의 정제 효율이 우리 원탁의 귀족 연금술사들이 만드는 것보다 최소 대여섯 배는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뭐라?!"

의사당 내부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게다가…… 하층민들이 우리 기사단이 독점하던 오염 제어 물약을 더 이상 사지 않습니다. 불매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어요!"

"하루아침에 물약 판매 대금이 십분의 일 토막이 났습니다! 이대로 가면 원탁의 이번 분기 국고 운영에 심각한 차질이 생깁니다!"

독점 시장의 붕괴.

그것은 단순한 재정적 타격이 아니었다.

하층민들을 통제하던 가장 강력한 목줄이 끊어졌음을 의미했다.

마르쿠스가 이끄는 토벌대가 검을 들고 통제하려 해도, 목숨이 걸린 엘릭서를 얻기 위해 하층민들은 은밀하게 그레이 가든의 첩보원이자 조력자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봉쇄령은 허울뿐인 껍데기로 전락했다.

오히려 봉쇄를 유지하기 위해 기사단을 배치하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원탁의 재정을 갉아먹는 독약이 되고 있었다.

***

그레이 가든, 지하 정밀 조제실.

위이이잉-!

고대 마법 공학 장치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투명한 에테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공중에는 화려한 시스템 홀로그램이 쉴 새 없이 갱신되며 초록색 메시지를 띄웠다.

[축하합니다! 고대 연금술 일지를 기반으로 한 '정밀 조제실(등급: 전설)'이 성황리에 완공되었습니다!]

[특수 효과: 영지 내 엘릭서 제련 성공률 +100%, 소모 재료 -50%]

[알림: 대량의 아르케 엘릭서가 성공적으로 환원 및 정제되었습니다.]

"캬, 가성비 달달하다 못해 이가 썩겠네."

나는 정제실 중앙의 편안한 가죽 소파에 누워 갓 추출된 아르케 엘릭서를 와인 잔에 담아 흔들었다.

달콤한 박하 향이 코끝을 스쳤다.

한 모금 들이키자, 가슴 속을 짓누르던 검붉은 탁한 기운이 눈 씻은 듯이 씻겨 내려갔다.

[체크: 심연의 침식도를 스캔합니다.]

[현재 침식도: 2.81% (안전 범위 극히 양호)]

[정신 오염 디버프가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아, 편안하다. 이게 섹스고 이게 은둔이지."

눈앞이 흐려지던 실명 증상도,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도 싹 사라졌다.

침식도 3% 미만.

이제 당분간은 이중 상태창을 마음껏 휘둘러도 끄떡없는 안전지대에 도달한 것이다.

돈은 돈대로 벌고, 몸은 몸대로 건강해지고, 영지의 방어벽은 한층 더 완벽해졌다.

"현우야, 이번에 하층 구역 암시장을 통해 들어온 순수익 정산서야. 한번 볼래?"

엘리제가 두꺼운 금빛 장부를 품에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볼 필요도 없지. 원탁 놈들, 지금쯤 피똥 싸고 있겠네?"

"피똥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장이 뒤틀렸을걸? 지들이 독점하던 물약 시장이 완전히 망해서, 기사단 유지비도 감당 못 할 수준이래."

엘리제가 깔깔거리며 내 옆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진짜 사악하다. 겉으로는 무상 배포하면서, 뒤로는 하층민들이 가져오는 던전 고급 부산물들을 헐값에 독점 매입해서 차액을 남기다니."

"정당한 거래야. 걔들은 목숨을 구했고, 나는 재료를 얻었지. 윈-윈이잖아?"

나는 붉은 엘릭서를 머금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마르쿠스가 아무리 외교적으로, 물리적으로 우리를 옥죄려 해도 결국 자본의 흐름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전쟁은 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지갑을 찢어발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확실한 파멸법이지.

그때, 조제실의 육중한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백설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이례적인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영주님, 원탁 중앙 기사단 내부의 첩보원으로부터 긴급 비보가 도착했습니다."

"응? 왜, 원탁이 파산 신청이라도 했대?"

내가 장난스레 묻자, 백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재정 파탄에 직면한 아드리안 총장이…… 결국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양장 보고서 표지에는 붉은색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제2차 약자 대정비 작전 계획서]

"자금줄이 막히자, 원탁은 아예 하층 구역의 무능한 인구 90%를 마물 침공을 빌미로 즉각 '소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설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영지 외부의 봉쇄를 풀고, 마물들을 하층 슬럼가로 유도해 자연사로 위장한 대학살을 자행할 계획입니다. 소집령이 방금 정식 발효되었습니다."

내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이것들이 기어코 판을 엎으시겠다?"

안락한 눕방을 방해하는 귀찮은 벌레들이, 이제는 아예 정원 자체를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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