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 어라……? 강현우 씨?!"

귓가를 때리는 백설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어졌다.

눈앞이 완전히 암전됐다.

마치 포토샵에서 검은색 페인트 통을 화면 전체에 냅다 들이부은 것 같았다.

픽셀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암흑.

그 속에서 뇌를 찌르는 듯한 경고음이 고막을 찢고 들어왔다.

[WARNING! SYSTEM CRITICAL ERROR]

[심연의 침식도: 87.4%]

[뇌 신경망의 마력 전도율이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정신 오염 2단계: '일시적 실명' 디버프가 강제 적용됩니다.]

[남은 해제 시간: 167시간 59분]

'일주일 동안 장님으로 살라고? 장난하냐, 지금?'

안 그래도 귀찮은 세상인데, 앞까지 안 보이면 침대에 누워 폰 게임도 못 한다.

아니, 이 세계엔 스마트폰도 없으니 눕방조차 불가능하다.

그건 진짜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나는 억지로 혀를 깨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아직 내게는 세계의 인과율을 해킹할 '백도어 프로그램'이 남아 있었다.

"열려라, 치트키."

마음속으로 이중 상태창의 엔터 키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어둠 속에서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붉은색 에러 메시지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심연의 이중 상태창(Add-on Ver 1.4)을 활성화합니다.]

[인과율 에러 강제 삽입 기능을 가동합니다.]

'타겟은 나 자신. 디버프 조건값을 비틀어.'

[에러 코드 404: '실명' 디버프의 적용 타임라인을 강제로 유예시킵니다.]

[인과 법칙 왜곡 중…….]

[대가 측정: 사용자의 생명력 및 마력 순환 경로를 일시적으로 과부하 상태로 변조합니다.]

[경고: 침식도의 누적 속도가 1.5배 증가하며, 마력 회복 속도가 90% 감소합니다.]

[유예 시간: 24시간]

가슴을 짓누르던 타르 같은 통증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검게 물들었던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빛의 픽셀들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하아……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백설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내 옷자락을 꽉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갑자기 쓰러지셔서……."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극심한 저혈압이라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마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24시간.

그 안에 아르케 엘릭서를 구하지 못하면 진짜로 눈이 먼 채 기득권 놈들의 칼날을 받아내야 한다.

안락한 은둔이고 뭐고, 그대로 배드 엔딩 직행 열차를 타는 셈이다.

"설아 씨, 일단 영지 내부 방어선 안쪽으로 들어가서 사람들 대피시켜."

"하지만 주인님의 몸 상태가……."

"환자는 내가 아니라, 조만간 내 손에 털릴 원탁 놈들이니까 걱정 마."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레이 가든의 몽환적인 보랏빛 하늘 아래, 벌써 대기하고 있던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붉은색 단발머리에 헐렁한 연구원 가운을 걸친 연금술사.

엘리제 베르그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플라스크를 흔들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어, 신입생. 소문은 들었어. 원탁의 사냥개들을 아주 시원하게 털어버렸다며?"

"소문 참 빠르네. 그것보다 엘리제, 물건은 챙겼어?"

나는 품 안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3화에서 고대 유적을 탐사할 때 쟁여두었던 '해독 불가 구세대 연금술 일지 조각'이 들어 있었다.

엘리제의 눈이 그 조각을 보는 순간, 맹수처럼 번뜩였다.

"당연하지. 안 그래도 이 조각의 잃어버린 뒷부분 때문에 며칠 동안 밤을 새웠다고."

"그 뒷부분이 어디 있는지 드디어 알아냈어."

나는 씩 웃으며 아카데미 후방, 붉은 장벽으로 가로막힌 '유해 구역'을 가리켰다.

"저 지하 깊은 곳에 고대 황실의 비공식 연금술 조제실이 묻혀 있거든."

"거기 가면 아르케 엘릭서의 완제품은 물론이고, 제조법의 핵심 연동법까지 손에 넣을 수 있어."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긴 아카데미에서도 영구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위험 지대잖아. 함정이 득실거릴 텐데?"

"걱정 마. 내 전공이 바로 그 함정들을 '합법적'으로 해킹하는 거니까."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 생명줄의 타이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거리며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

아카데미 지하 유해 구역.

이곳은 과거 마력 폭주 사고로 인해 공간 자체가 비틀려 버린 버려진 미궁이었다.

사방의 벽면은 검붉은 점토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가 진동했다.

"콜록, 콜록! 무슨 공기가 이따위야? 폐가 썩는 기분인데."

엘리제가 코를 쥐어짜며 투덜댔다.

"엄살 부리지 마. 연금술사면 이런 독가스쯤은 자체 필터로 걸러 마셔야지."

"내가 무슨 정수기인 줄 알아?! 그보다 신입생, 저기 좀 봐."

엘리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석조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 표면에는 고대 황실의 상징인 '부러진 왕관'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양옆으로 붉은색 마력 회로가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저거…… 고대 황실의 '차원 단절 방어 장벽'이야. 억지로 건드렸다간 존재 자체가 지워져."

엘리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뛰어난 연금술사라도 공간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고대 마법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복잡한 마력 회로 위로 친근한 시스템 UI가 겹쳐 보였다.

[분석 완료: 고대 황실 조제실 보안 시스템]

[보안 등급: 최고 수준 (Lv.99)]

[현재 마력 경로에 '인과율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공백이 있다면 채워 넣는 게 인지상정이지.'

나는 문앞으로 걸어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신입생! 미쳤어?! 손 대면 소멸한다고!"

엘리제가 비명을 질렀지만, 내 손끝은 이미 붉은 마력 회로에 닿아 있었다.

찌르르한 전류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소멸은커녕, 내 손끝을 시작으로 청색의 에러 메시지들이 문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심연의 이중 상태창 가동.]

[대상: 황실 보안 장벽의 마력 전도 법칙]

[법칙 왜곡: '접촉 시 소멸'의 판정 기준을 '접촉 시 마력 충전'으로 변조합니다.]

[에러 코드 502: Bad Gateway 적용.]

화르륵!

붉은색으로 타오르던 장벽이 순식간에 청량한 푸른빛으로 변하더니, 오히려 내 마력 통을 가득 채워주기 시작했다.

[마력이 100% 충전되었습니다.]

[보안 시스템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쿠구구구둥!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먼지를 휘날리며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제는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마법 공식도 안 쓰고 어떻게 저 장벽을 해킹한 거지?"

"말했잖아. 난 그냥 좀 유능한 신입생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문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내부로 들어서자, 먼지 쌓인 연금술 도구들과 거대한 유리관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정교하게 세공된 순은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두꺼운 가죽 책 한 권이 보였다.

"찾았다."

나는 서둘러 책으로 다가갔다.

표지에는 고대 제국어로 '아르케 조율 일지'라고 적혀 있었다.

엘리제는 홀린 듯 달려와 책을 펼쳤다.

그리고 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일지 조각을 꺼내 대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이 구절, 그리고 이 연동 공식……!"

"왜? 뭐가 문제야?"

"문제 수준이 아니야! 이 일지에 적힌 연동법을 적용하면…… 우리가 만들던 아르케 엘릭서의 정제 효율이 최소 400%는 급증해!"

엘리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 어깨를 짤짤 흔들었다.

"이해가 안 가? 원래 엘릭서 한 병 만들 재료로 네 병을 만들 수 있다고! 게다가 부작용인 정신 오염 억제력도 두 배는 강해져!"

[복선 회수: '고대 구세대 연금술 일지 조각'의 연동법이 완벽히 해독되었습니다!]

[아르케 엘릭서 제련 효율이 400%로 영구 상승합니다.]

'나이스. 이래야 고생해서 던전 턴 보람이 있지.'

나는 씩 웃으며 순은 보석함을 열었다.

보석함 내부에는 영롱한 금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 세 개가 고운 비단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고대 황실의 정밀 정제 도구들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그레이 가든 내부에서 엘릭서를 자체 양산하는 기지를 구축할 수 있다.

더 이상 엘릭서 부족으로 눈이 멀까 봐 벌벌 떨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는 마치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시원하고 청량했다.

동시에, 내 몸을 갉아먹던 검은 침식 기운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르케 엘릭서 정수 복용 완료.]

[심연의 침식도가 급격히 감소합니다.]

[87.4% -> 42.1%]

[정신 오염 및 실명 디버프가 완전히 해제됩니다.]

"하아…… 살 것 같네, 진짜."

눈앞의 시야가 고화질 모니터를 켠 것처럼 선명하게 돌아왔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주변의 세부적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보석함에 든 정제 도구들을 보물 다루듯 품에 안고 감격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신입생."

"어라? 자본주의의 화신인 네 입에서 고맙다는 소리가 다 나오네?"

"너, 사실은 엄청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거지? 그 힘을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는 게 보여."

엘리제의 눈빛에는 이전의 가벼운 탐욕 대신, 깊은 신뢰와 묘한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인류 구원이니 뭐니 하는 위선자들보다, 자기 안위를 위해서라면서도 이렇게 묵묵히 길을 뚫는 네가 백 배는 나아."

"착각하지 마. 난 그냥 평생 침대에 누워서 숨만 쉬고 싶을 뿐이야."

나는 츤츤대며 유적 중앙의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 유적 전체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거대한 마력 핵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귀한 걸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나는 이중 상태창을 켜고 마력 핵의 구조를 해킹했다.

[인과율 왜곡 적용: 마력 핵의 고정 상태를 '탈착 가능'으로 비틀어 버립니다.]

위이이이잉!

제단에 고정되어 있던 고농축 마력 핵이 가볍게 툭 떨어지며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아이템 획득: 고농축 황실 마력 핵 (Rank: Epic)]

"자, 수확은 끝났으니 이제 퇴근……."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내 이중 상태창의 미니맵에 수십 개의 붉은 점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어라? 이 불청객들은 또 뭐야?"

화면을 확대하자, 낯익은 철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질서 원탁의 토벌 단장, 마르쿠스 크롤이 보낸 정찰 부대였다.

그들은 유적 입구의 장벽이 깨진 것을 감지하고 쥐새끼처럼 냄새를 맡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치사하게 머릿수로 밀어붙이네."

엘리제가 불안한 듯 내 옷자락을 잡았다.

"신입생, 어쩌지? 저 정도 규모면 정면 돌파는 힘들어."

"누가 정면으로 싸운대? 난 가성비 안 나오는 짓은 안 해."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내 손끝에서 시작된 왜곡의 파동이 우리가 걸어온 통로 전체로 뻗어 나갔다.

[인과율 왜곡: 유적 입구 통로의 마력 전도율을 1,000%로 증폭시킵니다.]

[물리 법칙 왜곡: 잔여 마력의 팽창 속도를 극대화합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우리가 지나온 통로가 무너지며 수천 톤의 암석들이 입구를 완벽히 봉쇄해 버렸다.

동시에, 유적 내부에 잠들어 있던 고대 방어 마물들이 폭발 소리에 깨어나 울부짖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우리는 개꿀잼 구경하면서 지름길로 퇴근한다."

나는 엘리제를 이끌고, 미니맵에만 표시되는 그레이 가든 연결 비밀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편에서 정찰 부대 기사들의 비명과 마물들의 포효 소리가 아련하게 울려 퍼졌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

그레이 가든의 아늑한 개인 연구실.

"심봤다! 진짜 심봤다고!"

엘리제는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고대 정제 도구들을 늘어놓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대 일지를 탐독하며 벌써 약재들을 솥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 도구들과 연동법만 있으면, 사흘마다 아르케 엘릭서를 대량으로 뿜어낼 수 있어! 으하하하!"

"시끄러워, 나 잘 거니까 조용히 해."

나는 연구실 소파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침식도도 내려갔고, 엘릭서 수급처도 확보했으니 이제 진짜로 눕방을 즐길 시간이었다.

'아, 이 안락함. 이 맛에 회귀했지.'

백설아도 무사히 피난민들을 영지 내부에 안정적으로 수용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그 안락한 단잠에 빠져들려던 바로 그 순간.

탁!

연구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비서관 레오폴드가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아카데미 행정처의 붉은 직인이 찍힌 양고기 가죽 포고문이 들려 있었다.

"강, 강현우 학생! 큰일 났습니다!"

"또 뭔데? 나 지금 무지하게 졸리거든?"

나는 눈을 감은 채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레오폴드는 사색이 된 얼굴로 포고문을 내밀었다.

"토벌 단장 마르쿠스가…… 그레이 가든 구역에 대한 '전면적 고립 봉쇄령'을 선포했습니다!"

"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식료품, 마력석, 생필품을 포함한 모든 물자의 그레이 가든 행 유입을 전면 차단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반역죄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지금 영지 주변을 원탁의 기사단이 겹겹이 에워싸고 물샐틈없이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폴드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레이 가든은 비옥한 토지를 가졌지만, 아직 자급자족 체계를 완벽히 갖추기 전이었다.

외부와의 교역이 완전히 끊기면 영지 내부의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우리도 굶어 죽을 판이었다.

마르쿠스 그 새끼가 힘으로 안 되니 사악한 경제 봉쇄 카드를 꺼낸 것이다.

나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 나직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감히 내 눕방을 방해해?'

이것들이 곱게 보내주니까 진짜 호구로 보이나 보다.

"레오폴드."

"네, 네?!"

"원탁 놈들이 독점하고 있는 던전 원자재 거래 장부 좀 가져와 봐."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칼싸움보다 무서운 게 뭔지,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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