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달아오른 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마차 유리창을 뿌옇게 흐렸다.
쇳소리 가득한 처단단장의 고함이 고요한 숲의 침묵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반역자 백설아를 넘겨라! 3초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놈의 영지째로 증발시켜 주마!"
마차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백설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파르르 떨렸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손가락이 부러진 검자루를 부서져라 움켜쥐는 게 보였다.
"……저 비겁한 원탁 놈들."
백설아는 당장이라도 마차 문을 부수고 나갈 기세로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면서 저러는 걸 보니, 확실히 회귀 전 대륙을 벌벌 떨게 했던 도살자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마차 안이다.
내 침대 시트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저러다간 진짜 시트 세탁비만 독박 쓰게 생겼다.
"야, 얌전히 있어라. 옷 더러워진다."
현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밤공기가 꽤 차가웠지만, 저 멀리서 이쪽을 겨누고 있는 마력 대포의 열기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어이, 거기 붉은 깃털 장식 머리에 얹은 아저씨."
현우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쩍 해 대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쇠파이프 같은 거 들고 짖어대면 소음공해로 신고당하는 거 모릅니까?"
처단단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원탁의 엄숙한 처단 명령을 앞에 두고 농담을 지껄이다니!"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들자, 마력 대포의 포신이 무시무시한 진동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마력의 공명음이 고막을 찔렀다.
일반적인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이 기세만으로도 오줌을 지리며 무릎을 꿇었을 터였다.
하지만 현우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시스템 에러 감지: 인과 왜곡 프로세스 기동 가능]
[그레이 가든 자치 영지 경계선 내부 진입 확인]
'그래, 바로 이거지.'
내 집 안마당까지 기어 들어온 놈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웰컴 드링크를 대접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현우는 마음속으로 가볍게 스위치를 올렸다.
'이중 상태창, 켜라. 그리고 이 구역의 법칙을 조금 손봐주지.'
[해킹 코드 입력 완료]
[물리 법칙 왜곡 적용: '마력 전도율' → 0.00%]
[영지 내부의 모든 마력 순환 및 전도 공식이 일시적으로 차단됩니다.]
띠링-! 하는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발사해라! 저 오만한 놈의 대가리를 날려버려라!"
처단단장이 기세등등하게 검을 내리치며 외쳤다.
포수가 대포의 격발 장치를 힘차게 당겼다.
콰아아아앙-! 하는 천지를 진동할 폭음이 터져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
하지만 들려온 것은 아주 작고 하찮은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퓨슉.
마치 바람 빠진 풍선에서 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포구에서 붉게 타오르던 마력의 불꽃이 거짓말처럼 연기 한 줌으로 변해 사라졌다.
"뭐, 뭐야? 격발 장치가 고장 났나? 다시 쏴라! 얼른!"
당황한 포수가 미친 듯이 마력 석판을 두들겨 댔다.
그러나 대포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고철 덩어리가 된 것처럼 차갑게 식어갈 뿐이었다.
"단장님! 마력이…… 마력이 전혀 흐르지 않습니다! 마력 전도율이 0입니다!"
"무슨 개소리냐! 제국산 최첨단 마력 대포가 왜 전도가 안 된다는 거야!"
기사들이 당황해 허둥대며 자신들의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문을 외울 때마다, 마력은 시전자의 손끝에서 촛불 꺼지듯 훅 사그라들었다.
"어라? 불이 안 붙네?"
현우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껄껄 웃었다.
"거기 형씨들, 라이터 고장 났으면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지 그래?"
이것이 바로 그레이 가든 내부에서 발동하는 절대적인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였다.
내가 정한 규칙 안에서는 제무덤을 파러 온 기사단의 무력 따위는 한낱 쇠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차 창문 너머로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지켜보던 백설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원탁이 자랑하는 파괴 병기가 터치 한 번 없이 무력화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현우는 굳어버린 처단단을 뒤로한 채 마차 안으로 쓱 머리를 밀어 넣었다.
"자, 상황 정리 대충 끝났지?"
백설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현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마법을 지워버린 거지?"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현우는 품 안에서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백설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우리 그레이 가든은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거든?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는 소리야."
"계약서……?"
"그래. 넌 방금 내 마차에 타면서 목숨을 건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백설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계약서 내용을 훑어내렸다.
[그레이 가든 임시 노역 계약서] [1조: 피고용인(백설아)은 영지 내 식량 사수 및 가구 조달, 잡무 일체를 군말 없이 수행한다.] [2조: 고용인(강현우)은 신변 보호 및 숙식을 제공한다. 단, 식사는 하루 두 끼로 제한한다.]
"이, 이게 무슨…… 난 원탁에 쫓기는 몸이다! 한가하게 밭이나 갈고 가구를 만들 시간 따윈 없다!"
"그럼 나가서 저기 쇠막대기 든 아저씨들이랑 칼싸움하든가."
현우는 가차 없이 마차 문을 가리켰다.
백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밖에는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된 원탁의 군세가 대기 중이다.
비록 지금은 마법이 막혀 당황하고 있지만,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고 계약서 맨 밑바닥에 서명했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내가 여기 머무는 순간, 원탁은 군대를 보내 이곳을 짓밟을 거다."
"짓밟히는 건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겠지."
현우는 계약서를 만족스럽게 회수하며 씩 웃었다.
"그나저나, 넌 왜 쫓기고 있었던 거냐? 원탁 놈들이 왜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널 죽이려 드는지 이유나 좀 알자."
백설아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품 안 깊숙한 곳에서 피 묻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푸르스름한 마력이 감도는 기밀 파일 뭉치였다.
"이게…… 내 가문이 목숨을 바쳐 빼낸 원탁의 '정화 대상 명단'이다."
"정화 대상 명단?"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카데미 내부의 골칫거리나 약자들을 청소하려는 원탁의 계획서지. 여기에는 청소 대상자들의 동선과 처단 구역, 그리고……."
백설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현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레이 가든 주변에 매장된 고대 유적의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현우의 뇌리에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었다.
'고대 유적 정보라고?'
회귀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레이 가든 지하 깊은 곳에는 고대 연금술사들의 유적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유적 안에는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아르케 엘릭서'의 제련 레시피가 숨겨져 있을 터였다.
백설아가 가져온 정보는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내 은둔 계획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이것 봐라, 꽤 쏠쏠한 걸 들고 왔네."
현우는 기밀 파일을 넘겨받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차 밖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법이 안 된다면 물리력으로 돌파한다! 전원, 검을 뽑아라! 저 장벽을 부숴서라도 반역자를 끌어내라!"
처단단장이 마력이 통하지 않는 장검을 치켜들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법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단단한 갑옷과 수적 우세를 믿고 억지로 영지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아, 진짜 끈질기네. 퇴근 시간 다 됐는데 눈치 없이 비벼대는 부장님 같으니라고."
현우는 한숨을 쉬며 마차 밖으로 완전히 걸어 나왔다.
"형씨들,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물리 법칙 왜곡 추가 적용: '중력 상수' → 400.00% 증가]
[영지 경계선 주변 10미터 구역에 초고중력 역장이 생성됩니다.]
쿠구구구궁-!
순간, 영지 경계선에 발을 디디려던 기사들의 무릎이 동시에 꺾였다.
"끄, 으아아악!"
"몸이…… 몸이 무거워……!"
사배나 강해진 중력의 무게가 그들의 전신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단단한 강철 갑옷은 이제 그들을 보호하는 방어구가 아니라, 온몸을 으스러뜨리는 무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진흙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기사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비명을 질러댔다.
처단단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대지에 처박힌 채 핏대를 세우며 현우를 노려보았다.
"이…… 괴물 같은 놈……! 원탁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원탁이 밥 먹여 줍니까? 난 내 침대에서 눕방 찍는 게 유일한 삶의 목표라니까요."
현우는 발끝으로 처단단장의 투구를 툭툭 쳤다.
"가서 느그 총장한테 전해라. 내 영토에 한 발자국만 더 들이밀면, 그땐 엉덩이에 화살을 박아주겠다고."
바닥에 엎드린 기사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현우를 우러러보았다.
원탁의 막강한 무력이 이 보잘것없는 아카데미 신입생의 손짓 한 번에 완벽히 분쇄된 것이다.
현우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기사들은 기어가듯 흙바닥을 뒹굴며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기사단의 위엄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쫓기는 들개 떼와 다름없었다.
"후우, 드디어 조용해졌네."
마차로 돌아가려던 현우의 시야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안광들이 포착되었다.
영지 주변의 소란과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심연의 마물들이었다.
"끝도 없이 기어 나오네, 진짜."
현우는 혀를 쯧 차며 이중 상태창을 다시 조작했다.
[대상 지정: 영지 주변 하급 마물 무리]
[인과율 왜곡 적용: '도발 대상' 수치 변조]
[마물들의 증오 대상이 '그레이 가든'에서 '퇴각 중인 처단단'으로 변경됩니다.]
숲속에서 굶주린 늑대 형상의 마물들이 크르릉거리며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영지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도망치던 처단단의 뒤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다시 한번 절규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현우의 알 바는 아니었다.
"자, 이제 진짜 들어가서 쉬자고."
현우는 마차 문을 열고 백설아를 향해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환영한다. 그레이 가든에 온 걸."
백설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레이 가든의 내부는 외부의 맹독 안개와는 달리, 은은한 인공 태양의 온기가 감도는 믿을 수 없는 낙원이었다.
하지만 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차 시트에 몸을 묻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치솟았다.
"……윽!"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고: 심연의 침식 수치 급상승!]
[현재 침식도: 87.4%]
[임계치 도달 임박! 정신 오염 및 일시적 실명 디버프가 발동합니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지더니, 마치 검은 잉크를 뿌린 것처럼 사방이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장…… 힘을 너무 몰아 썼나.'
주머니 속을 다급하게 뒤적였지만, 아르케 엘릭서 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기 직전, 현우는 제 얼굴 앞에서 당황해 소리치는 백설아의 흐릿한 윤곽을 겨우 볼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