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그러니까…… '그레이 가든 원예부' 신청서라고?"
아카데미 본관 3층, 총장 행정실의 수석 비서관 레오폴드가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들린 종이는 방금 전 강현우가 내민 동아리 신설 신청서였다.
아카데미 가이드북 뒷장을 대충 찢어 발긴 종이 쪼가리.
거기에 삐뚤삐뚤하게 적힌 조잡한 글씨와 엘리제 베르그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서명까지.
레오폴드는 눈앞의 신입생을 마치 당장 정신병원에 격리해야 할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그 오염된 불모지를 자치 구역으로 쓰겠다고? 자살하고 싶다면 굳이 이런 복잡한 서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될 텐데. 거긴 마력 폭주로 땅 자체가 썩어 문드러진 곳이다."
"썩은 땅이니까 개간하는 맛이 있죠. 원예부라는 이름에 딱 맞지 않습니까?"
현우는 행정실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레오폴드의 책상 뒤편에 놓인 아카데미 영토 대장과 법률 서적들로 향해 있었다.
"게다가 규정상 아무 문제 없을 텐데요. 학칙 제32조. 미사용 부지는 정식 등록된 동아리의 자치 구역으로 신청 및 점유할 수 있다. 인원은 나랑 여기 엘리제까지 딱 2명. 조건은 완벽하게 충족했습니다."
"하!"
레오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방귀를 꼈다.
옆에 서 있던 엘리제는 이 엄숙한 행정실 분위기에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현우의 뻔뻔함에 기가 찼는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현우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하지만 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서류를 데스크 위에 툭 던지며 거만한 태도로 펜을 굴렸다.
"좋다. 어차피 쓰레기통에 처박아 둘 땅이다. 누가 들어가서 죽든 아카데미가 책임질 일은 없으니까. 등록은 해 주지."
그는 그레이 가든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붉은 독무가 흐르고, 마력의 사각지대라 마법사들은 마력 한 줌도 제대로 쓰지 못해 폐사하는 지옥.
그곳을 제 발로 들어가겠다니, 기득권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레오폴드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불순분자 하나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는 꼴이었다.
"하지만 자치 구역으로 인정받는 순간부터, 그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고와 세금, 유지비는 전적으로 너희 동아리가 부담한다. 원탁의 지원금은 단 1쿠퍼도 없을 줄 알아라."
"바라지도 않습니다. 대신 여기 특약 사항 하나만 추가해 주시죠."
현우가 미리 준비해 온 낡은 양피지 한 장을 추가로 밀어 넣었다.
레오폴드가 인상을 쓰며 그 내용을 읊조렸다.
"……'자치 구역 내의 모든 물리적, 마법적 소유권은 해당 동아리에 귀속되며, 아카데미 및 제3의 세력은 동아리 부장의 명시적 허가 없이 무단으로 진입하거나 점거할 수 없다. 위반 시 사유지 침해로 간주하여 자치 방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레오폴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방위권?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그 썩은 땅에 방위권이라니. 지나가던 고블린이 웃겠군."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니까요. 사인만 해 주시면 조용히 나가 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며칠 뒤면 시체가 되어 실려 나올 테니."
*쾅!*
결재 도장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인가서 위에 찍혔다.
그 순간, 현우의 귓가에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시스템 알림음이 맑게 울려 퍼졌다.
[띠링!] [인과율의 왜곡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수 영토 '그레이 가든'의 법적 소유권이 사용자 '강현우'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영지 방위 시스템의 기초 뼈대가 형성됩니다. 현재 외부 침입 차단율: 0% (설비 미비)]
'나이스.'
현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탁 놈들이 나중에 그레이 가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침을 흘리며 달려들어도, 이제 이 도장이 찍힌 서류 한 장이면 법적으로 그들의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버릴 수 있었다.
합법적인 약탈만큼 짜릿한 건 세상에 없는 법이다.
행정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엘리제가 현우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불안과 경악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방금 그 서류에 서명하면 우린 이제 아카데미의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해! 마르쿠스 그 인간이 사뿐히 즈려밟고 들어와서 우릴 죽여도 법적으로 따질 곳이 없다고!"
"엘리제."
현우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차가워서,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원탁의 보호? 걔들이 언제 은혜를 베푸는 거 봤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지? 그 법을 만드는 게 원탁인데?"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살 길은 하나뿐이야. 저놈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요새를 만드는 것. 그리고 저놈들의 명줄인 돈줄을 우리가 쥐는 것."
현우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아까 쓰러뜨린 집행관들의 품에서 악착같이 털어낸 고급 마석들과 골드였다.
그가 그것을 엘리제의 손바닥 위에 툭 떨어뜨렸다.
"이걸로 네가 원하는 연금술 플라스크든, 금기 가공 촉매든 마음대로 사."
"……!"
"내가 약속했지. 네 연구는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한다고. 이건 시작에 불과해. 다음 주부터는 골드를 아주 트럭으로 부어 줄 테니까."
엘리제는 손바닥에 닿는 마석들의 찌릿찌릿한 마력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
최하급 마석도 아니고, 집행관들이 쓰던 고순도의 정제 마석들이었다.
그녀의 이성은 이 위험한 남자와 엮이면 언젠가 파멸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뼛속까지 흐르는 연금술사로서의 탐욕이 그 경고를 가볍게 씹어 삼켰다.
"……정말로 다 지원해 주는 거지? 내가 뭘 하든 간섭 안 하고?"
"당연하지. 네가 연금술로 폭탄을 만들든, 마약을 만들든 내 알 바 아니야. 내 침대만 안 건드리면 돼."
"좋아. 계약 성립이야. 이 자본주의 노예가 기꺼이 네 가든의 정원사가 되어 주지."
엘리제가 마석 주머니를 품에 소중히 안으며 마침내 활짝 웃었다.
철저한 수지타산의 일치.
이것이야말로 위선적인 정의감보다 훨씬 단단하고 믿을 만한 유대였다.
두 사람이 본관을 내려와 전공 박람회와 동아리 홍보로 북새통을 이루는 아카데미 중앙 광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수많은 신입생이 화려한 깃발을 내건 대형 파벌들의 부스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원탁 산하 '성검 기사단' 신입 단원 모집! 입단 즉시 던전 프리패스권 증정!" "마법 학회 '에테르 링'! 원탁의 공식 후원을 받는 유일무이한 학회입니다!"
화려한 마법 불꽃이 공중에서 터지고, 삐까뻔쩍한 갑옷을 입은 선배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들의 오만한 목소리 사이로, 현우는 광장 한편에 세워진 거대한 연금술 연합 상회의 시세판을 주목했다.
[던전 원자재 거래 시세표] - 마력 철광목 (1등급): 150골드 (▲ 12% 상승) - 마력 철광목 (2등급): 90골드 (▲ 8% 상승) *공지: 원탁의 자원 관리 지침에 따라, 철광목의 학내 유통량은 제한됩니다.*
"미친, 철광목 가격이 또 올랐어? 저번 주보다 훨씬 비싸잖아!" "이러면 다음 주 던전 실습용 방패는 어떻게 맞추냐고……." "싫으면 원탁 상회에 빚이라도 져야지 별수 있냐?"
신입생들의 탄식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원탁은 던전에서 생산되는 기초 장비 원자재인 '철광목'의 공급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을 조여 가격을 폭등시킨 뒤, 하층 학생들에게 고금리 대출을 알선해 자신들의 노예로 부려 먹는 아주 전형적이고 더러운 착취 구조였다.
"양아치 놈들. 아주 대놓고 빨대를 꽂아 놨네."
현우가 핏 웃음을 흘렸다.
그의 뇌리에 회귀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카데미 지하 던전 제4구역 '비명의 숲'.
그곳 깊은 곳에는 마력 전도율 왜곡 에러 포인트가 숨겨져 있었다.
그 에러를 자극하면, 던전의 물리 법칙이 왜곡되면서 철광목의 드랍율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게 된다.
현우는 슬며시 이중 상태창을 켰다.
`[심연의 이중 상태창 활성화]` `[인과의 에러 탐색 기능 가동]` `[현재 좌표: 아카데미 중앙 광장]` `[연결 가능 에러 포인트 감지: 지하 던전 제4구역 - 에러 코드 ERR_WOOD_TRANS_9921]` `[분석 결과: 해당 에러 발동 시, 제4구역의 마력 전도율이 400% 왜곡되어 철광목 드랍율이 일시적으로 1,200% 증가함]`
'완벽해.'
과거의 기억과 상태창의 에러 코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철광목은 원탁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핵심 자원 중 하나였다.
그 가격을 폭락시킬 수만 있다면, 원탁의 하부 재정망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막대한 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엘리제."
"응? 왜 그렇게 음흉한 표정으로 날 봐? 기분 나쁘게."
"지금 가지고 있는 돈 전부 털어서 원탁 상회에 '철광목 하락' 쪽으로 금융 계약서 써라."
"뭐? 하락?! 미쳤어? 지금 철광목은 공급이 부족해서 부르는 게 값이야!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있는데 거기다 쇼트(Short)를 치라고?"
엘리제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현우는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시장에 물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면 가격은 어떻게 되지?"
"그야…… 폭락하겠지. 하지만 원탁이 유통망을 꽉 쥐고 있는데 어떻게 물건이 쏟아져 나와?"
"내가 쏟아지게 만들 거니까."
현우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원탁 놈들이 가격을 올리려고 장난쳐 놓은 거품, 내가 아주 기분 좋게 터뜨려 줄게. 넌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베팅만 해. 그럼 며칠 뒤에 네 연구실을 순금으로 도배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차가운 눈빛에 엘리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빈말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짜릿한 도파민이 뇌를 지배하는 감각.
"……장난치다 걸리면 우리 둘 다 신용불량자야. 알지?"
"걱정 마. 내 침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난 절대 안 지니까."
그때였다.
광장의 소란스러움을 뚫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단원 몇 명이 현우와 엘리제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질서 원탁을 상징하는 톱니바퀴와 검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너희가 강현우와 엘리제 베르그냐?"
앞장선 기사가 오만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낙인이 찍힌 공문서가 들려 있었다.
"원탁 산하 연금 상회 '골드 휠'의 대리인이다. 총장령과 원탁의 자원 관리 지침에 의거, '그레이 가든 원예부'로 향하는 모든 연금술 기초 설비 및 마력 정화 장비의 반입을 금지한다. 아울러 너희가 주문한 모든 물품은 원탁의 자산으로 임시 압류되었다."
"뭐라고?!"
엘리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거 내가 사비까지 털어서 주문한 초자 기구들이야! 정화 장비 없이는 그레이 가든 내부에서 10분도 못 버틴다고!"
"불법 동아리의 위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 조치다. 이의가 있다면 원탁 심의회에 정식으로 제소해라. 물론, 심의가 열리는 데는 반년쯤 걸리겠지만."
기사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현우를 쳐다보았다.
법적으로 영토를 차지했으니, 아예 숨도 쉬지 못하게 말려 죽이겠다는 원탁 특유의 졸렬하고 이성적인 압박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화를 내는 대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장비를 압류했다 이거지?"
"그래. 억울하면 무릎 꿇고 원탁에 자치권을 반납해라."
"아니, 고맙다고 하려던 참이었어."
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기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덕분에 숏 포지션 규모를 두 배로 늘릴 명분이 생겼거든. 기대해라. 너희 상회가 파산하는 데 정확히 사흘 걸릴 테니까."
기사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흔들리는 순간, 현우는 차갑게 등을 돌렸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