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마물을 뚫고 도착한 아카데미 외곽의 금지구역 그레이 가든에서, 지독하게 누적된 심연의 침식도가 임계치를 가리키기 시작한다.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다.

단 1픽셀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

그 암전된 시야 너머로 오직 붉은색 경고 창만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심연의 침식도가 임계치(96%)에 도달했습니다!] [경고: 대인 광증 및 시각 차단 상태 이상이 강제 부여됩니다.] [생존을 위해 즉시 '아르케 엘릭서'를 복용하십시오.]

"어이, 거기 신입생."

안개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차갑고도 날카로웠다.

시각이 차단되니 오히려 청각과 시스템의 텍스트가 뇌 주름을 더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붉은 노이즈가 지직거리며 내 눈앞의 어둠 속에 상대방의 프로필을 강제로 띄웠다.

[시스템 에러: 대상의 비공개 프로필을 강제 스캔합니다.] [이름: 엘리제 베르그 (19세)] [클래스: 이단 연금술사 (Regret Class)] [성향: 극단적 수지타산주의, 기득권 혐오] [특이 사항: 아르케 엘릭서의 하위 호환 시약을 주머니에 소지 중.]

심봤다.

인류 멸망 직전, 대가문들의 금고를 털며 세상의 모든 금기를 연금술로 증명해 내던 희대의 미친 천재.

내 침식도를 억제하고, 나아가 이 그레이 가든을 완벽한 눕방 천국으로 만들어 줄 핵심 부품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눈깔이 아주 예쁘게 썩어 들어가는 중이네. 심연 침식이지? 그거?"

서걱거리는 발소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코끝으로 쌉싸름하면서도 머리를 맑게 만드는 독특한 약초 향이 훅 끼쳤다.

엘리제가 내 턱 끝을 차가운 손가락으로 툭 치며 낮게 가르릉거렸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생이니 뭐니 하던 놈들이 입학 첫날부터 맹인이 되어서 기어 오다니. 이거 아주 좋은 실험 재료가 굴러 들어왔어."

"야."

나는 턱을 치켜들며 피식 웃었다.

"눈은 좀 안 보이지만, 냄새는 기막히게 잘 맡거든? 네 주머니에 있는 거, 아르케 엘릭서 열화판이지?"

"……!"

순간, 내 턱을 누르던 손가락에 뼛조각이 으스러질 듯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이건 아직 세상에 발표도 안 한 내 독자 연구물인데."

"알 방법이야 차고 넘치지. 어때, 그거 나한테 넘기지 않을래? 아주 짭짤한 비즈니스를 제안할 수 있는데."

"하! 미친 소리. 당장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환자 놈이 무슨 수로?"

그녀가 비웃음을 흘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척, 척, 척.

그레이 가든의 눅눅한 흙바닥을 짓밟는 거친 군화 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최소 다섯 명. 아니, 여덟 명이다.

심연의 이중 상태창이 적들의 붉은 실루엣을 어둠 속에 3D 그래픽처럼 렌더링해 주었다.

"찾았다, 베르그 가문의 탈주자 년."

거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안개를 찢고 들려왔다.

"원탁의 하부 상단에서 정식으로 수배령이 내려졌다. 네가 훔쳐 간 연금술 비급과 정제수를 넘기고 순순히 따라오시지."

엘리제의 신형이 굳어지는 것이 공기의 흐름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이빨을 득득 갈며 품속에서 연금술 플라스크를 꺼내 들었다.

"지긋지긋한 원탁의 개새끼들. 기어코 여기까지 쫓아왔네."

"오호, 옆에 있는 놈은 아카데미 신입생인가? 목격자는 남겨두지 않는 게 원탁의 철칙이지. 같이 묻어버려라."

스릉, 서릉.

강철 검이 칼집에서 뽑혀 나가는 서늘한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적들의 살기가 피부를 찔러왔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 내렸다.

지금 내 상태창의 침식도는 96%.

여기서 스킬을 한 번 더 쓰면 광증이 도져 아군이고 적이고 다 찢어발기는 괴물이 될 터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 년이 가진 정제수만 손에 넣으면 이 모든 리스크가 제로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야, 이단 연금술사."

나는 턱을 가볍게 흔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털어내며 속삭였다.

"저 쓰레기들 치워주면, 그 병 나한테 넘길래?"

"뭐? 눈도 안 보이는 놈이 무슨 수로 저 집행관들을 치우겠다는 거야?"

"딜 할 거야, 말 거야. 시간 없어. 쟤들 칼 뽑았거든."

엘리제는 짧게 침을 삼키더니, 이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치워만 봐! 성공하면 이 정제수뿐만 아니라 내 영혼이라도 팔아줄 테니까!"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임시 파트너십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오케이, 거래 성립."

나는 씨긋 웃으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내 영혼의 눈인 '심연의 이중 상태창'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 이제 아는 사람만 누렸던 히든 상태창의 진수를 보여줄 차례다.

"해킹 개시."

[시스템 에러: 영역 '그레이 가든'의 영토 소유권 수립을 위한 인과율 왜곡을 시작합니다.] [왜곡 법칙: 영역 내부의 중력 공식을 일시적으로 수정합니다.] [중력 가속도: 9.8m/s² -> 98m/s² (10배 적용)]

웅-!

사방의 공기가 갑자기 수만 톤의 강철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끄, 윽?!" "이, 이게 무슨……!"

달려들던 집행관들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신체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바닥에 눌린 것처럼 진흙 바닥으로 처박혔다.

쩌적, 쩌적!

그들이 쥐고 있던 강철 검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진흙 속으로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10배 중력의 가중.

이것이 바로 세계의 물리 법칙을 에드온 해킹하는 나의 골든핑거였다.

"커흑! 마, 마법인가?! 이 영역의 마력이……!"

"틀렸어, 대갈통 텅텅 빈 원탁의 개들아."

나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 주변의 중력은 정상적으로 유지되도록 왜곡 범위를 칼같이 조절해 두었으니까.

"이건 마법이 아니라, 그냥 이 구역의 대빵이 바뀐 거야."

나는 붉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집행관 리더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꽤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네?"

[시스템 에러: 대상의 액티브 스킬 '그림자 속박(B)'을 강제 복제 및 강탈합니다.] [강탈 완료. 지속 시간 3분.]

"돌려쓰는 건 미덕이지. 잘 쓸게."

강탈한 스킬을 그 즉시 시전했다.

바닥에 깔린 어둠 속에서 진득한 그림자들이 가시처럼 뻗어 나와 집행관들의 온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중력 10배에 그림자 속박까지 더해지니, 그들은 이제 숨 쉬는 고기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아…… 말도 안 돼. 어떻게 신입생 따위가 이런 힘을……!"

"시끄러우니까 좀 자라."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림자들이 그들의 목을 졸라 기절시키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상황 종료.

단 30초 만에 원탁의 집행관 여덟 명이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하, 하하……."

뒤에서 엘리제의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재 연금술사라 불리던 그녀조차 마법 서클도 없이 세상을 왜곡하는 내 능력을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너, 정체가 뭐야? 신입생의 탈을 쓴 마왕이라도 되는 거야?"

"그냥 평화롭게 눕방하고 싶은 은둔 지망생이지. 그보다 약속 지켜야지?"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리제는 마른침을 삼키며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유리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병을 쥐자마자 찌릿한 마력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개를 뽑고 푸른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얼음물처럼 차가우면서도, 가슴속의 불길을 순식간에 진화시켰다.

[알림: '희귀 정제수(아르케 엘릭서 모조품)'가 체내에 흡수됩니다.] [심연의 침식도가 급격히 감소합니다: 96% -> 41%] [상태 이상 '시각 차단'이 해제됩니다.]

파앗-!

검은 장막이 걷히며 세상이 다시 제 색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리제의 얼굴이었다.

헝클어진 백금발 사이로 드러난 뽀얀 얼굴과, 경계심과 호기심이 기묘하게 섞인 자줏빛 눈동자.

"진짜로 눈이 돌아왔네……? 내 정제수가 심연 침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치료가 아니라 억제지. 하지만 이 정도 효율이면 충분해."

나는 빈 병을 가볍게 던져 올렸다가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레이 가든.

과거 마력 폭주로 오염되어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버려진 대지.

하지만 내 눈에는 이곳만큼 완벽한 영지가 없었다.

아카데미 최후방에 위치해 있어 기득권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여기에 이중 상태창의 물리 왜곡 장막을 상시로 쳐둔다면?

그 어떤 몬스터도, 원탁의 그 어떤 기사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완성되는 것이다.

"좋아, 결정했어."

나는 바닥에 쓰러진 집행관들의 주머니를 털어 쓸만한 골드와 마석을 챙기며 말했다.

"여기 내 침대로 써야겠어."

"뭐? 이 미친놈이 방금 뭐라고 했어? 이 오염된 땅을 침대로 쓰겠다고?"

엘리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오염이야 정화하면 되고, 땅은 넓을수록 눕기 편하잖아."

나는 품속에서 아카데미 신입생 가이드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학칙이 하나 적혀 있었다.

[학칙 제32조: 아카데미 내의 미사용 부지는 정식 등록된 '동아리'의 자치 구역으로 신청 및 점유할 수 있다. 단, 부원의 수는 최소 2인 이상이어야 하며, 지도 교수의 승인 혹은 총장의 최종 결재가 필요하다.]

"동아리?"

엘리제가 내 가이드북을 훔쳐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를 동아리 방으로 쓰겠다는 거야? 아카데미가 미쳤다고 이런 위험 구역을 허가해 줄 리가 없잖아."

"허가해 주게 만들어야지."

나는 싱긋 웃으며 가이드북 뒷장에 첨부된 동아리 신청서 양식을 찢어냈다.

그리고 깃펜을 꺼내 거침없이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이름은…… '그레이 가든 원예부'로 하자."

"원예부?! 잡초 하나 안 자라는 이 죽음의 땅에서 무슨 원예를 하겠다는 거야!"

"잡초가 안 자라니까 심는 재미가 있는 거지. 자, 여기 부원 명단에 네 이름 써."

나는 깃펜을 그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엘리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바닥에 쓰러진 집행관들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쉬며 펜을 받아들었다.

"하아…… 나도 이제 갈 곳 없는 처지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약속해. 나한테 매달 일정량의 연금술 재료를 지원해 주겠다고."

"돈걱정은 마라. 원탁 놈들 지갑 털어서 채워줄 테니까."

그녀의 서명까지 완벽하게 받아낸 신청서를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서류를 총장 행정실에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아드리안 폰 발렌시아.

그 잘나고 완벽주의에 찌든 총장 놈의 얼굴이 이 황당무계한 신청서를 보고 어떻게 일그러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가자, 엘리제. 우리 동아리 방 계약하러."

나는 신청서를 품에 소중히 넣으며 아카데미 본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망하든 말든, 내 안락한 침대를 방해하는 놈들은 모조리 파산시켜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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