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먹먹했다.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피비린내와 매캐한 유황 냄새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은 지나치게 생생했고, 대지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고막을 사정없이 때려댔다.
"어라."
익숙한 감각이다.
심연 던전의 최하층에서 인류 멸망의 날을 맞이했던 그 지옥의 냄새.
하지만 내 몸은 왜 이렇게 가볍고, 입고 있는 옷은 왜 이리 번지르르한 제복인가.
머릿속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강렬한 정보의 파도가 몰아쳤다.
제국력 732년, 아카데미 입학식 당일.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제1구역 마물 폭주'.
"진짜 회귀했네. 실화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인류가 멸망하기 딱 10년 전, 내 나이 열여덟 살의 봄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마물들에게 쫓기며 질질 짜던 무능한 삼류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10년 동안 구를 대로 구른 고인물 중의 썩은물이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입학 첫날부터 억까 시동을 이따위로 건다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건 '스파이더 울프' 떼거리였다.
쇠붙이도 씹어 먹는 이빨을 드러낸 괴물들이 침을 흘리며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방은 이미 깨진 대리석 파편과 신입생들의 찢긴 가방으로 난장판이었다.
그 순간, 시야 전면에 새빨간 경고창들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위험! 시스템 인과율에 심각한 왜곡이 감지되었습니다!]
[원인: 존재하지 않아야 할 영혼의 회귀.]
[에러 수정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실패.]
[대체 프로토콜 실행: '심연의 이중 상태창'을 개방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푸른 창 너머로, 기묘하고 어두운 붉은색 보조 창이 겹쳐 보였다.
마치 불법 해킹 툴을 띄워놓은 것처럼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빛깔이었다.
[■■의 이중 상태창 (해킹 모드 활성화)] - 현재 침식도: 0% - 사용 가능한 애드온: [인과 강제 에러], [영지 물리 법칙 왜곡] - 특이 사항: 아카데미 후방 폐쇄 구역 '그레이 가든'과의 동조율 99% (영토 애드온 발현 가능)
"그레이 가든이라고?"
입꼬리가 씰룩였다.
전생에서 마력 폭주로 오염되어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던 죽음의 땅.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마력의 완벽한 사각지대이자, 세상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최고의 은둔처였다.
내 목표는 명확했다.
이 골치 아픈 아카데미니, 세상 구원이니 하는 귀찮은 일들은 싹 다 조연들에게 던져버리는 것.
그리고 그레이 가든에 완벽하게 안전하고 사치스러운 영지를 지어 평생 침대 위에서 눕방이나 때리는 안락한 은둔 생활을 즐기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일단 이 거지 같은 개판부터 정리해야겠는데."
저 멀리서 스파이더 울프의 우두머리가 도약했다.
공중을 가르는 날카로운 발톱이 내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나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스파이더 울프가 코앞까지 닥친 순간, 쾅-! 하고 허공에서 은빛 마력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괴물은 장벽에 머리를 처박고 꼴사납게 뒤로 나뒹굴었다.
장벽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백은색 기사 갑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들.
아카데미 총장 아드리안의 직속 처단조, 일명 '질서의 집행관'들이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질서 원탁의 문양이 유난히 번쩍였다.
구원자가 온 것일까?
아니, 그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구도의 의지조차 없었다.
오로지 차갑고 계산적인 멸시만이 서려 있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내 옆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다른 신입생이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처단조의 대장, 마르쿠스의 부하 중 하나인 헬무트가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켜라, 부적격자여."
헬무트가 가차 없이 발을 휘둘러 신입생의 손을 쳐냈다.
철갑 부츠에 걷어차인 신입생이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원탁의 효율적 인류 보존 계획에 따라, 이 구역의 쓰레기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헬무트가 담담하게 선언했다.
그들의 목적은 마물 퇴치가 아니었다.
마물 폭주를 방조하여, 아카데미 가치가 없는 '하위 부적격자'들을 자연스럽게 청소하는 것.
질서 원탁이 자랑하는 그 잘나신 '질서 결벽증'의 실체였다.
"그리고 거기 멀쩡히 서 있는 너."
헬무트가 칼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도망치려 하지 마라. 이 구역은 폐쇄되었다. 너 같은 하급 재능의 소유자가 살아남는 것은 세계의 효율에 어긋난다. 얌전히 마물의 이빨에 몸을 바쳐라."
와, 진짜 대사 하나하나가 킹받네.
말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엘리트 의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상의 효율을 위해 약자를 소거하겠다고?
역시 이 새끼들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슬그머니 내 상태창을 훑었다.
동시에 내 발밑 지하 깊은 곳, 아카데미 지하 던전 중심부에 흐르는 거대한 마력 맥이 느껴졌다.
'마력 전도율 왜곡 에러 포인트가 저 아래에 박혀 있군.'
회귀 전에 보았던 비밀 정보다.
나중에 저 왜곡 포인트를 건드리면, 이 잘난 귀족 놈들이 독점하는 철광목 원자재 시장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의 생명줄인 자금을 말려 죽일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즐거움이고, 지금은 눈앞의 날파리부터 치워야 했다.
"쓸모없는 벌레 자식. 한 입 거리도 안 되겠군."
헬무트가 혀를 차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은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견고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탁 기사단의 전매특허 돌격기, [강철 돌진]이었다.
그는 이 스킬로 마물들을 뚫고 유유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남겨진 신입생들과 나는 마물들의 밥으로 던져두고서.
"야."
내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누구 맘대로 퇴근하냐? 주말 출근 맛 좀 볼래?"
"무슨 헛소리를……."
헬무트가 비웃음을 날리려는 찰나.
나는 이중 상태창의 '인과 강제 에러'를 활성화했다.
Target: 헬무트. 스킬 코드: 강철 돌진.
[인과의 에러를 강제 적용합니다.]
[강제 스킬 강탈 프로토콜 가동!]
[대상 '헬무트'의 액티브 스킬 '강철 돌진(C-rank)'의 소유권을 일시적으로 재정의합니다.]
[인과율 왜곡 성공. 삐빅-!]
지이이잉-!
갑자기 공중에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음과 함께, 파란색 에러 코드들이 헬무트의 몸을 칭칭 감았다.
"어, 어어? 내 마력이 왜 이러지?!"
헬무트의 얼굴이 단숨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가 발동하려던 은빛 마력 궤적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스킬이 강제로 취소된 반동으로 인해 헬무트가 피를 울컥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반면, 내 몸은 터질 듯한 마력의 온기로 가득 찼다.
[스킬 '강철 돌진'을 일시 획득했습니다. (남은 시간: 05:00)]
"고맙다, 새꺄. 잘 쓸게."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뭐, 뭐라고? 네놈이 무슨 짓을……!"
헬무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경악과 공포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기득권의 오만함이 순식간에 깨져나가는 그 표정, 정말이지 맛도리였다.
"잘 있어라. 니들이 좋아하는 효율적인 소거법으로 거기서 잘 버텨봐."
쿠구구구-!
내 발끝에서부터 은빛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심연의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강철 돌진(Abyss Version) 가동!]
콰아앙-!
대지가 복발했다.
나는 한 마리의 검은 탄환이 되어 전방으로 돌진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스파이더 울프 대여섯 마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피와 살점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미, 미친…… 저게 무슨 신입생이야?!"
뒤에서 처단조 놈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쳐놓은 결계를 가볍게 깨부수고, 마물들의 배후를 통쾌하게 관통해 아카데미 외곽으로 날아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카데미 최후방의 폐쇄 구역 경계선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칙칙한 회색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황량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내 심장은 오히려 두근거렸다.
"여기군. 그레이 가든."
과거 마력 폭주로 버려져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의 땅.
하지만 이중 상태창의 영토 에드온만 활성화한다면, 이곳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난공불락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드디어 평생 누워 지낼 침대를 마련할 첫 발걸음을 뗐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윽……!"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리더니, 시야가 순식간에 검붉은 안개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앞의 회색 대지가 흐려지고, 모든 사물이 기괴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경고! '인과 강제 에러' 사용으로 인해 심연의 침식도가 급증합니다!]
[현재 침식도: 45%]
[임계치 도달 경보! 정신 오염 및 일시적 실명 증세가 시작됩니다!]
"아, 제길…… 벌써 시동 걸리냐?"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중 상태창이라는 절대적인 골든핑거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대가.
이 침식을 억제하려면 최고 난이도 던전에서만 극소량 나오는 초고가의 '아르케 엘릭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눈앞이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걱, 서걱.
낙엽을 밟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존재가 내뿜는 마력이 살죽을 파고들었다.
시야는 이미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걸음 소리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과연 이 그림자의 정체는 아카데미의 또 다른 추격자일까, 아니면 이 죽음의 땅에 도사린 괴물일까.
"어이, 거기 신입생."
안개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지독하게 냉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이, 거기 신입생."
안개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지독하게 냉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었지만, 뇌리에 직접 박히는 붉은색 해킹 UI는 여전히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히려 시각이 차단되자, 시스템의 텍스트가 더 또렷하게 뇌 주름을 파고들었다.
검붉은 노이즈 너머로 상대방의 정보가 강제로 해킹되어 한 줄씩 출력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에러: 대상의 비공개 프로필을 강제 스캔합니다.]
[이름: 엘리제 베르그 (??세)] [클래스: 이단 연금술사 (Regret Class)] [성향: 극단적 수지타산주의, 기득권 혐오] [특이 사항: 아르케 엘릭서의 하위 호환 시약을 주머니에 소지 중.]
'심봤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입꼬리가 먼저 씰룩였다.
회귀 전, 대가문들의 뒤통수를 치며 금기된 연금술을 창조해 내던 희대의 천재 반항아.
내 침식도를 억제하고, 나아가 그레이 가든을 풍요로운 낙원으로 만들어 줄 핵심 부품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눈깔이 아주 예쁘게 썩어 들어가는 중이네. 심연 침식이지? 그거?"
서걱거리는 발소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코 끝으로 쌉싸름하면서도 머리를 맑게 하는 독특한 약초 향이 훅 끼쳤다.
엘리제가 내 턱 끝을 차가운 손가락으로 툭 치며 낮게 가르릉거렸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생이니 뭐니 하던 놈들이 입학 첫날부터 맹인이 되어서 기어 오다니. 이거 아주 좋은 실험 재료가 굴러 들어왔어."
"야."
나는 턱을 치켜들며 피식 웃었다.
"눈은 좀 안 보이지만, 냄새는 기막히게 잘 맡거든? 네 주머니에 있는 거, 아르케 엘릭서 열화판이지?"
"……!"
순간, 턱을 누르던 손가락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이건 아직 세상에 발표도 안 한 내 독자 연구물인데."
"알 방법이야 많지. 어때, 그거 나한테 넘기지 않을래? 아주 짭짤한 비즈니스를 제안할 수 있는데."
"하! 미친 소리. 당장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