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지하실 문틈과 창문 사이로 시커먼 독연기와 함께 집어삼킬 듯한 붉은 불길이 거센 포효를 지르며 터져 나왔다. 아틀리에의 2층 유리창들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비산하며 날카로운 파편을 뿌렸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주황색 가로등 빛을 받아 붉은 눈물처럼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불이야! 아틀리에에 불이 났어!"
도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방금 전까지 공청회의 승리를 자축하며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가솔린 냄새가 매끄러운 공기 사이로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골드 디벨롭먼트가 패배의 발악으로 던진 마지막 독수가 분명했다.
할아버지의 냄새가 깃든 유일한 안식처이자, 길고양이들과 아픈 강아지들이 겨우 숨을 고르던 보금자리가 순식간에 불꽃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울 씨, 물러서요!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은우가 내 어깨를 억세게 잡아당겼지만, 내 시선은 이미 대문 안쪽,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지하실 입구로 향해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가죽 제본의 책, '영혼의 수선 장부'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붉은 경고등과 함께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경고: 아틀리에 내부 영혼 인형 조각들의 훼손 위기!] [동조율 75% — 지하실에 깃든 미수선 영혼들의 극심한 불공포가 감각으로 전이됩니다.]
"아윽……!"
허파 가득 뜨거운 숯을 들이마신 것처럼 목구멍이 타들어 갔다. 살가죽이 불길에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 온몸의 피부가 짓무르는 듯한 화끈거림이 전신을 지배했다. 수선 장부의 리스크가 내 오감을 장악한 탓이었다. 이대로 둔다면 지하실 깊은 곳, 아직 온전한 형태를 찾지 못해 상자 속에 잠들어 있던 수십 마리 동물들의 영혼 인형 조각들이 잿더미로 변해 영영 지상에서 라스트 콘서트를 마감하게 될 터였다.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내 손에 쥐어진 가방 속 물건들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의 재봉 보관함 깊숙한 곳에서 겨우 찾아내어 내 품에 간직하고 있던, 찬란한 은빛 광택을 내뿜는 '은빛 바늘 실' 한 타래. 그리고 지난번 유기견 깜이가 입에 물고 도망쳤던 특수 플라스틱 뼈 장난감. 장난감 표면에서는 여전히 상류층 전용 메디컬 센터에서나 쓰이는 독특한 소독약 향기가 미약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건 강준환이 미등록 신약을 길짐승들에게 불법 임상 시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야. 그리고 내 가방 안에는 도망치던 녀석들의 품에서 떨어진 청록동 재개발 관련 국유지 무단 불하 및 불법 배수로 매립 건설 도면까지 들어 있어.
이 모든 증거를 쥐고 강준환의 목줄을 죄기 바로 직전, 놈은 아틀리에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가지 마요, 여울 언니! 저 불길 속은 지옥이라고!"
도희가 내 소매자락을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틀리에 담벼락 아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십 개의 작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스르륵, 바스락.
매캐한 연기 속을 뚫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색 고양이 네로였다. 네로는 입에 무언가 동글동글하고 두꺼운 황동 단추 같은 것을 물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녀석이 아틀리에 지붕 틈새에서 굴리며 놀던 골동품 태엽 열쇠 모양의 두꺼운 임페리얼 황동 단추였다. 네로는 단추를 내 발 앞에 탁 떨어뜨리더니,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틀리에의 깨진 창문 틈새를 향해 날카롭게 울었다.
"냐아아앙—!"
그 신호를 시작으로, 청록동 골목 구석구석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해 절룩거리던 누렁이, 한쪽 눈을 잃었지만 영리하기 그지없던 검은 고양이, 그리고 은우의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기력을 회복했던 수많은 유기견 군단이 일제히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백구 깜이가 서 있었다.
동물들은 인간이 가진 화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뛰어넘어, 오직 자신들의 영혼을 보듬어 준 아틀리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깜이야! 네로야! 안 돼, 위험해!"
은우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깜이가 가장 먼저 쪽빛 향나무 문턱을 도약해 불길이 치솟는 지하실 입구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대여섯 마리의 영리한 길고양이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틈새로 유연하게 파고들었다.
내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동물들의 시야가 내 뇌리에 겹쳐 보였다.
—대장 인간의 굴이 뜨거운 붉은 괴물에게 먹히고 있어. 우리가 지켜야 해. 그곳에 우리 친구들의 냄새가 남아 있어!—
그것이 동물들이 인지한 화재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뜨거운 불꽃을 '붉은 괴물'로 여겼고, 지하실에 보관된 인형 조각들을 '아직 깨어나지 못한 친구들의 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지하실 창문 틈새로 깜이가 머리를 내밀었다. 녀석의 주둥이에는 아직 바느질이 끝나지 않은 헝겊 강아지의 머리 조각이 단단히 물려 있었다. 뒤를 이어 고양이들이 저마다 솜뭉치 다리, 꼬리 깃털, 낡은 가죽 인형의 몸통 조각들을 주둥이로 힘차게 물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을음으로 온통 까맣게 변한 털을 한 채, 숨을 헐떡이면서도 동물들은 단 한 조각의 영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아틀리에 안팎을 쉴 새 없이 왕복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도희가 헬멧을 벗어 던지며 근처의 소화기를 움켜쥐었다. 은우 역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동물들이 빠져나올 안전한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깨진 유리창 틀의 잔해들을 맨손으로 치워내기 시작했다. 손 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은우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 역시 품에 안은 은빛 실 타래를 꽉 쥔 채, 지하실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작은 토끼 인형의 귀 조각이 저 안쪽 선반 위에서 타들어 가기 직전이었다.
"여울 씨! 위험해요, 들어가지 마세요!"
은우의 다급한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내 발은 이미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목재의 매캐한 가스가 폐부를 찔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겨우 토끼 인형의 귀 조각을 손에 쥐고 돌아선 순간, 머리 위에서 불길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쩍, 쩌적—!
2층 바닥을 지탱하던 거대한 목조 들보가 시뻘건 불길을 머금은 채 통째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불기둥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탈출구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불타는 나무껍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이제 끝이구나. 할아버지의 공간도, 나도 이렇게 사라지는 걸까.
눈을 질끈 감은 그 찰나였다.
단단하고 넓은 온기가 내 등을 강하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오직 나만을 구하겠다는 거친 숨결이 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여울 씨—!"
은우였다. 그는 천장이 붕괴하려 하자 한여울을 등 뒤로 껴안고 단호히 온몸으로 무너지는 들보를 수용했다.
콰아앙!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은우의 단단한 청년의 등이 불타는 들보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의 척추를 타고 흐르는 고통이 내 살갗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은우의 입에서 억눌린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셔츠 등판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가며 살이 타는 듯한 열기가 번졌지만, 은우는 나를 품에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 결코 나를 놓지 않았다.
"은우 씨! 정신 차려요! 왜 그랬어요, 왜!"
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항상 타인의 호의를 위선이라 의심하며 방어막을 쳤던 내 마음속 단단한 얼음벽이, 나를 대신해 온몸으로 불길을 받아낸 그의 뜨거운 체온 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 사람은 진짜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 사람이, 그리고 내 곁에서 울부짖는 동물들이 바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가족이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웅장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아틀리에를 지키겠다는 의지, 나를 품에 안은 은우를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이타적인 가족 수호 의지가 내 심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수선 장부의 힘을 완전히 깨웠다.
두근, 두근!
가슴속에서 황금빛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은빛 바늘 실'이 스스로 찬란한 은빛 광채를 뿜어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시스템: 극강의 동조율 100% 달성!] [조건 충족: 장인의 순수한 이타적 수호 의지가 발현되었습니다.] [영혼의 수선 장부 온기 지수가 마침내 80%를 전면 갱신합니다!] [히든 스킬 해금: 전설의 '은빛 해방막'이 활성화됩니다!]
그 순간, 아틀리에 안쪽 벽난로 앞 러그에 누워 상황을 주시하던 거대한 영적 존재, 은바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그저 게으른 대형견처럼 굴던 녀석의 두 눈이 신비로운 은빛으로 타올랐다.
"크어어어어엉—!"
은바람이 아틀리에가 떠나갈 듯 웅장한 포효를 내질렀다.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의 차가운 영풍(靈風)이 소용돌이치며 아틀리에 전체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웅—!
공간을 가득 채웠던 붉은 불길이 은빛 해방막의 장막에 부딪히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치이이익—!
가솔린의 지독한 냄새와 함께 아틀리에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기세를 올리던 붉은 화염들이, 은빛 해방막이 퍼져나가는 궤적을 따라 단 한 줌의 연기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불꽃은 뜨거운 열기 대신 마치 얼음 조각이 녹아내리듯 스르륵 사라져 갔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지르던 주변 원룸 단지의 주민들과, 마침 경적을 울리며 골목길로 진입하던 소방대원들이 일제히 가던 길을 멈추고 멍하니 아틀리에를 바라보았다.
"어……? 불이…… 불이 꺼졌어?"
"연기도 안 나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주민들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틀리에는 단 한 곳의 그을음도 남기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무너지려던 목조 들보는 언제 불길에 휩싸였냐는 듯 할아버지가 처음 세웠을 때의 단단하고 고풍스러운 나뭇결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은바람의 영풍 결사 보호가 물리적인 화마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공간을 태초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이었다.
은우가 천천히 나를 품에서 놓아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등 뒤는 그을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은우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울 씨…… 우리, 살아남은 건가요?"
"네, 은우 씨. 우리가 해냈어요."
나는 은우의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그의 손 끝에 맺혀 있던 붉은 피가 내 손바닥의 온기와 섞여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지하실에서 인형 조각들을 물고 나온 동물 도우미 군단이 마당 가득 안전하게 대피해 있었다. 깜이는 제 몸집만 한 곰인형의 다리를 품에 안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고, 길고양이들은 서로의 그을린 털을 핥아주며 안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아틀리에를 지켜냈다.
내 품에는 강준환의 목을 죌 수 있는 세 가지 치명적인 무기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은빛 실 타래, 불법 임상 시험의 증거인 뼈 장난감, 그리고 국유지 무단 불하 도면까지. 이 세 가지가 내 손안에 있는 한, 강준환은 더 이상 이 청록동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언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도희가 눈물을 훔치며 우리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주민들도 하나둘 아틀리에 마당으로 들어서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적적인 진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쿵, 쿵, 쿵, 쿵—!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발밑의 대지가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흙냄새를 풍기던 아틀리에 마당의 자갈들이 가볍게 위아래로 튀어 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은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캐하고 지독한 디젤 배기가스 냄새가 골목 어귀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기적처럼 맑아졌던 아틀리에의 공기를 순식간에 오염시켰다.
부우우웅—! 콰아아앙!
골목 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 사이로, 거대한 철제 궤도를 단 소형 불도저 수십 대가 대열을 지어 나타났다. 불도저의 전면에는 날카로운 철제 삽날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내들은 붉은 헬멧을 쓰고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아틀리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맨 선두에는 가죽 장갑을 낀 강준환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무전기를 들고 서 있었다.
"방화로 안 된다면, 아예 뼈대째로 무너뜨려 주지. 전원 진격해! 싹 다 밀어버려!"
강준환의 서슬 퍼런 명령과 함께, 수십 대의 불도저 장비들이 아틀리에의 이층 목조 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굉음을 내뿜으며 연거푸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