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내일 아침이 되면, 이 잘난 인형 병원 쪼가리도 너희들의 그 가증스러운 동물 새끼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흙먼지가 될 테니까.”

강준환이 남기고 간 핏빛 협박은 밤새도록 아틀리에의 낡은 유리창을 두드렸다. 깨진 틈새로 스며드는 밤바람은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의 목덜미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나는 숨지 않았다.

어스름한 새벽녘,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재봉 보관함 가장 깊은 곳을 열었다. 낡은 오동나무 상자 바닥, 붉은 벨벳 천에 조심스럽게 싸여 있던 정체불명의 실 한 타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은빛 바늘 실.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실 끝을 쥐는 순간, 손끝을 타고 흐르는 찌릿한 온기가 심장까지 이어졌다. 가죽 제본으로 된 ‘영혼의 수선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은은한 청색 광채를 뿜어냈다.

—이 실이라면, 할아버지가 남겨둔 마지막 진실을 꿸 수 있어.

나는 밤새도록 아틀리에의 주춧돌을 상징하는 낡은 무명 곰 인형의 터진 옆구리를 그 은빛 실로 정성스럽게 기웠다. 한 땀, 한 땀 바늘이 지나갈 때마다 방 안의 차가운 공기가 거짓말처럼 포근하게 가라앉았다. 수선이 완료되는 순간, 장부의 온기 지수가 급격히 상승하며 아틀리에 바닥 안쪽에서 묵직한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구청과 정식으로 체결했던 ‘토지 영구 무상 임대 및 역사 보존 협약서’의 원본이 장부의 갈라진 틈새에서 기적처럼 땅 위로 솟아올랐다. 강준환이 들고 흔들던 강제 대집행 영장의 전제 자체를 뒤흔들 강력한 무기였다.

날이 밝았다. 운명의 아침 09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청록동 복지 회관의 대강당은 이른 아침부터 숨이 막힐 듯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의 낡은 회색 형광등이 미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고, 주민들의 불안 섞인 말소리가 먼지처럼 허공을 떠돌았다.

단상 위에는 커다란 청록동 재개발 조감도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강준환은 어제의 광기 어린 모습을 지워버린 채, 말끔한 네이비 수트 차림으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름지게 다듬어져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주민 여러분,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오늘부로 청록동의 무법지대였던 일부 무단 점유 토지에 대한 법적 정리가 완료됩니다. 저기 구석진 곳에 방치된 낡은 목조 건물 하나 때문에 여러분의 소중한 재산권 행사가 지체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강준환이 조감도의 한가운데, ‘은빛 바늘 아틀리에’가 위치한 자리를 지휘봉으로 탁탁 두드렸다.

“골드 디벨롭먼트는 오늘 오전 09시를 기해 합법적인 강제 대집행을 실시합니다.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동물 소굴이 사라진 자리에는, 여러분 모두가 고품격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첨단 친환경 반려동물 타운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법원의 판결문이 증명하듯, 우리의 개발은 완벽하게 합법적이며 청록동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몇몇 노인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고, 아이를 안은 젊은 어머니는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준환의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바로 그때, 강당의 무겁고 두꺼운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내가 걸어 들어왔다. 내 양옆에는 가죽 재킷을 걸친 송도희와, 차분한 눈빛으로 의무 상자를 든 백은우가 버티고 서 있었다.

강당 안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어머, 아틀리에 처녀네!” “결국 왔구먼. 하지만 법원 영장까지 나왔다는데 어쩌려고……”

주민들의 우려 섞인 속삭임 속에서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단상 아래, 강준환의 바로 정면까지 걸어가 우뚝 섰다.

강준환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마이크 볼륨을 더 높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 한여울 씨. 제 발로 공청회까지 찾아와 주다니 영광이군요. 하지만 떼를 쓴다고 해서 법원의 강제 대집행 영장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몇 분 뒤면 당신의 그 허름한 인형 병원은 포크레인 날 끝에 박살이 날 테니까요. 주민들 선동할 생각 말고, 조용히 짐이나 싸서 나가는 게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는 길일 겁니다.”

그의 도발은 집요하고 잔인했다. 일부러 주민들 앞에서 나를 철저하게 무력화하려는 비열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오직 차갑고 고요한 눈빛으로 강준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은우 역시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강준환의 수하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1초, 5초, 10초…… 정적이 길어졌다.

강당 안의 소음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오직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강준환 쪽이었다. 그의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단상 위의 마이크를 잡은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왜, 왜 말이 없지? 겁이라도 질린 건가? 아니면 이제야 현실 파악이……”

“강준환 씨.”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당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참 요란하게도 짖어대는군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구린내가 청록동 골목까지 다 퍼진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뭐, 뭐라고? 이 여자가 미쳤나!”

강준환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나는 품속에서 USB 하나를 꺼내 단상 옆에 배치된 주민 대표용 시각 모니터 제어 장치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도희야, 올려.”

“오케이, 언니. 제대로 보여주자고!”

도희가 재 빠르게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순간, 강당 전면의 대형 스크린 화면이 번쩍이며 전환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붉은색 경고 마크가 가득한 복잡한 설계 도면과 화학 성분 분석표였다.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준환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셔갔다.

“이, 이게 무슨……”

“당신이 말한 그 ‘합법적 개발’의 진짜 정체입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단상 위로 한 걸음 걸어 올라갔다. 단호한 발걸음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강당을 압도했다.

“첫째, 골드 디벨롭먼트가 구청에 제출한 개발 도면은 완전히 위조된 이중 도면입니다.”

화면에 4화에서 강준환의 부하 직원이 떨어뜨렸던 ‘청록동 재개발 관련 불법 배수로 매립 건설 도면’을 크게 확대해 띄웠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국유지 무단 불하 구역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산사태 유발 위험 구역이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났다.

“당신들은 공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지자체의 승인도 받지 않고 국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했습니다. 심지어 비가 오면 토사가 무너져 내릴 위험이 극도로 높은 옹벽 아래의 자연 배수로를 불법으로 매립해 아파트 부지로 편입시켰죠. 만약 이대로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여기 계신 주민들이 입주할 아파트는 첫 태풍에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강당 안이 발칵 뒤집혔다.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니, 산사태 위험이라니! 저게 정말이야?” “이중 도면이라니, 우리를 속인 거야?”

“거, 거짓말입니다! 저건 출처도 불분명한 위조 서류입니다! 당장 화면 꺼!”

강준환이 비명을 지르며 부하들에게 손짓했지만, 도희가 단상 앞을 가로막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어딜 만져? 손가락 부러지고 싶냐?”

도희의 으름장에 용역 직원들이 주춤하는 사이, 나는 화면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익숙한 물건의 사진이었다. 바로 유기견 ‘깜이’가 물고 다녔던 특수 플라스틱 뼈 장난감과, 그 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대기업 제약사의 임상 시험 코드였다.

“둘째, 강준환 씨가 추진하던 ‘최첨단 메디컬 펫 빌리지’의 실상입니다.”

나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차분하고 전문적인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분석표에 나온 성분은 동물에게 치명적인 환각과 발작을 유발하는 미등록 신경 마비성 신약 약물입니다. 골드 디벨롭먼트는 이 일대의 유기견들과 길고양이들을 포획해 불법적인 동물 임상 실험을 백그라운드에서 진행해 왔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장난감과, 지난번 사설 방역단이 소지하고 있던 특수 주사기들입니다. 상류층을 위한 메디컬 빌리지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서, 당신들은 살아있는 생명들을 잔인하게 도구로 삼아 마루타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강당 안은 이제 분노의 도가니로 변했다. 주민들은 더 이상 강준환의 화려한 조감도를 보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속았다는 배신감과 추악한 진실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우리 청록동 동물들을 데리고 그런 짓을 해?” “당장 여기서 꺼져라!”

강준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의 가면은 완전히 조각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닥쳐! 닥쳐라, 이 미천한 장사꾼 새끼들이 어디서 감히……! 법원 집행관들은 뭐 하는 거야? 지금 당장 09시가 넘었으니 불도저로 저 아틀리에부터 밀어버려! 영장이 먼저란 말이다!”

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단상 위에서 난동을 부리려던 바로 그 순간.

강당의 뒷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짙은 남색 제복을 입은 이들이 엄숙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구청 특별 사법경찰관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의 마크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는 구청장 직속 특별 수사관이 서 있었다. 수사관은 강준환을 향해 걸어와 품속에서 체포 영장을 꺼내 들었다.

“골드 디벨롭먼트 대표 강준환 씨. 당신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국유지 불법 무단 점유 및 훼손, 그리고 약사법 위반 및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찰칵—!

차가운 쇠붙이가 강준환의 양 손목을 단단히 옭아맸다. 강당 안에는 그 통쾌한 금속성 마찰음만이 선명하게 메아리쳤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기나 하냐고!”

강준환이 광분하며 발버둥 쳤지만, 강인한 수사관들의 손길에 의해 무력하게 단상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의 구겨진 명품 수트와 헝클어진 머리칼은 더 이상 과거의 위세 높던 대표의 모습이 아니었다.

단상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나의 가슴 속에서, 비로소 묵은 체증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민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여울 씨가 해냈어!” “아틀리에를 지켰다!”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고, 은우는 안도와 축하의 의미를 담아 내 손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어젯밤 내가 꿰맸던 은빛 바늘 실의 온기만큼이나 다정했다.

—우리가 마침내 이겼다. 우리의 안식처를 지켜낸 것이다.

* * *

공청회가 끝나고 축제 분위기로 들뜬 청록동 골목길을 걸어 내려왔다. 주민들은 저녁에 아틀리에 마당에서 작은 잔치라도 열자며 싱글벙글 웃으며 흩어졌다.

나와 은우, 그리고 도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화가 찾아온 아틀리에의 골목 어귀에 접어들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은빛 바늘 아틀리에의 낡은 이층 목조 건물이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하고 아름답게 서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여울 씨. 이제 할아버지의 공간도, 청록동의 아이들도 다 안전해요.”

은우가 곁에서 나직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다 은우 씨와 도희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혼자였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마음의 방어벽을 허물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 속 한구석을 갉아먹던 과거의 불안과 의심이, 이 따뜻한 이웃들의 온기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대문 앞에 도착해 도희가 거칠게 오토바이 시동을 끄며 외쳤다.

“언니! 얼른 들어가서 시원한 보리차나 한 잔 마시자. 나 목 타 죽겠다!”

“그래, 들어가자.”

내가 웃으며 아틀리에의 쪽빛 향나무 문턱을 넘어서 대문을 여는 찰나였다.

싸한 느낌이 온몸의 털을 꼿꼿이 세웠다.

문틈 사이로, 아틀리에 내부의 따스한 공기 대신 숨이 턱 막히는 매캐하고 지독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불길한 화학 물질의 기운이자— 강렬한 휘발유 냄새였다.

“……여울 씨, 조심해요!”

은우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뒤로 잡아당긴 순간.

콰아아앙—!

지하실 문틈과 창문 사이로 시커먼 독연기와 함께 집어삼킬 듯한 붉은 불길이 거센 포효를 지르며 터져 나왔다. 아틀리에의 2층 유리창들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비산하며 날카로운 파편을 뿌렸다.

“불이야! 아틀리에에 불이 났어!”

도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속에서, 골드 디벨롭먼트 잔당들이 심야에 저지르려던 방화 테러가 대낮의 승리 직후,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시뻘건 불길이 할아버지의 유산이자 나의 유일한 안식처인 아틀리에를 거칠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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