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던진 조난 마표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붉은 마력의 불꽃이 공중에서 쩍 갈라지며 피비린내 나는 마족의 인장을 하늘에 새겼다. 그 순간, 영지의 하늘이 먹물을 끼얹은 듯 시커멓게 침식되기 시작했다. 혹한의 대지에 불어닥치는 칼바람 속에서, 설산의 침엽수림이 비명을 지르듯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평화롭고 고요하던 은빛 영지에, 사악한 벨리알의 침란이 예고된 것이다.
에일린은 칼릭스의 품에 안긴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서 전해지는 서늘하면서도 기묘하게 따뜻한 마력이 그녀의 타들어 가던 생명 마력을 간신히 붙잡아 주고 있었다.
"칼릭스 씨…… 놓아주세요. 저 장부를…… 가짜 장부를 처리해야 해요."
에일린이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자, 칼릭스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런, 점주님. 고용주가 쓰러지면 내 일당은 누가 주나요? 조금 더 쉬고 계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에일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붙였지만, 심장박동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타인과의 관계를 오직 철저한 손익계산으로만 통제하려던 그녀였기에, 칼릭스의 대가 없는 호의는 언제나 그녀를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산기를 두드릴 시간조차 부족했다.
릴리안이 소환한 마족 표식이 하늘을 검게 물들이자, 에일린의 눈앞에 투명한 반투명 창이 격렬하게 명멸했다.
[경고: 영지 정화율 급락! 현재 정화율 0.2%] [경고: 외부 위조 장부의 마력 추적 술식이 영지 결계를 변조하고 있습니다. 즉시 정화하지 않으면 영지 전체가 오염에 노출됩니다!]
에일린은 손을 뻗어 장식장 틈새를 뒤졌다. 가문의 스파이였던 잭이 몰래 숨겨두고 간 가짜 제국 세무 세출 내역 장부가 손에 잡혔다. 장부의 표면에는 검붉은 추적 술식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며 결계를 좀먹고 있었다.
"내 가게에서 이딴 짓을 벌이게 둘 순 없지."
그녀는 '영혼의 제과 장부'를 허공에 펼쳤다. 장부의 황금빛 페이지가 거세게 소리를 내며 넘어가더니, 가짜 장부에 깃든 술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술식 분석 완료: 제국 세무국 위조 마력 인장 및 추적 좌표.] [역분석을 가동합니다. 위조 장부의 마력을 제과점의 정화 결계 동력으로 역변환합니다.]
에일린이 제과 장부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하자, 가짜 장부에서 흘러나오던 불길한 오염의 기운이 일순간 찬란한 금빛 입자로 부서져 내렸다. 릴리안이 쳐놓은 덫이 오히려 제과점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원천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결계를 옥죄던 오염이 걷히며, 제과점 주변으로 맑고 투명한 정화의 기운이 다시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늘을 뒤덮은 벨리알의 마기는 차원이 다른 위협이었다. 에일린은 깊은 한기를 느끼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오븐 틈새에서 발견한 이후, 늘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던 신비한 별 모양의 '성빙초(星氷草)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칼릭스의 강력한 서리 마력이 그녀의 몸을 거쳐 주머니 속 씨앗에 닿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파르르 떨리던 씨앗이 에일린의 손끝에서 눈부신 은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얼음꽃이 피어나듯 찬란한 별 모양의 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이건……!"
칼릭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서리 마력을 먹고 자란 꽃이라니. 점주님,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특별한 계약이라도 맺어진 모양이군요."
"시끄러워요. 일당이나 제대로 하세요."
에일린은 붉어진 뺨을 숨기며 만개한 성빙초를 조심스럽게 수확했다. 장부가 새로운 메시지를 띄웠다.
[히든 레시피 해금!] [재료: 만개한 성빙초, 심연의 카카오, 정화된 눈꽃 설탕.] [메뉴: 공명 초콜릿 수플레 (등급: 신화)] [효과: 복용자의 정신적 결핍 완화, 공포 면역, 아군의 마력 공명 극대화 및 결계 범위 확장.]
"좋아, 구워 보겠어."
에일린은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오븐의 마력 레버를 끝까지 올렸다. 화덕 내부가 붉은 마력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먼저 심연의 카카오를 곱게 갈아 뜨거운 버터와 함께 녹여냈다. 걸쭉하게 녹아내린 초콜릿은 칠흑처럼 어두우면서도 은은한 윤기를 흘렸다. 거기에 성빙초 꽃잎을 빻아 만든 백은색의 빙설당을 투하했다.
차가운 은빛 가루가 뜨거운 초콜릿과 섞이는 순간, 주방 가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운 향이 퍼져 나갔다. 쌉싸름하면서도 코끝을 간지럽히는 진한 초콜릿의 풍미, 그리고 그 뒤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성빙초 특유의 박하처럼 청량하고 달콤한 향기가 공기를 채웠다.
머랭을 단단하게 쳐서 초콜릿 반죽에 살포시 섞어 넣은 뒤, 수플레 컵에 담아 오븐에 넣었다. 구워지는 동안, 오븐 틈새로 흘러나온 열기는 달콤하면서도 따스한, 마치 어머니의 품 안처럼 아늑한 단내를 풍겼다. 입안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달콤함과 부드럽고 폭신한 식감이 눈을 감아도 선연히 그려질 정도였다.
그 향기가 매장 밖으로 퍼져 나갈 때쯤, 문가에서 묵묵히 서 있던 거구의 사내가 후드를 벗어 던졌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매번 에일린의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쿠키를 먹고 가던 그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님?!"
도망치려던 릴리안의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왕군 2군단장, 참혹한 염화의 마기를 다루는 강자 바르바토스. 그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대검을 땅에 꽂았다.
"벨리알 그 미친 자식이 내 유일한 단골집을 부수겠다고 날뛰는 꼴은 못 보겠군."
그가 대검을 치켜들자, 엘도라도 영지의 외곽 방벽 너머에서 수많은 마족 군단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영지를 파괴하러 온 약탈자가 아니었다. 오직 에일린의 디저트를 수호하기 위해, 바르바토스의 명령에 따라 방벽을 등지고 선 '단것 수호대'였다.
"에일린, 수플레가 다 구워질 때까지 저 벌레 놈들이 한 발짝도 이 선을 넘지 못하게 해주마. 대신, 내 몫은 따로 빼놓아라."
바르바토스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전방을 향해 포효했다. 그의 마력이 하늘의 오염된 마기와 부딪히며 거대한 장벽을 형성했다.
그 시각, 영지 전체는 벨리알의 침공 소식에 공포로 뒤덮여 있었다. 봇짐을 싸 들고 울부짖으며 도망치려던 영민들이 제과점 '안식의 단향'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이제 우린 끝이야! 마왕군의 급진파가 몰려온다고!"
"도망쳐야 해! 이 추운 설산에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때, 제과점의 문이 활짝 열리며 에일린이 거대한 쟁반을 들고 걸어 나왔다. 쟁반 위에는 갓 구워져 나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공명 초콜릿 수플레'가 가득했다. 은빛 슈가파우더가 눈꽃처럼 뿌려진 수플레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온기와 단내를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 멈추세요!"
에일린의 맑은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도망쳐 봐야 이 혹한의 설산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남는다면, 제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이 디저트를 드세요. 무료입니다."
영민들은 반신반의하며 수플레를 하나씩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입안에 넣자마자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수플레는, 진하고 깊은 초콜릿의 풍미와 함께 성빙초의 상쾌한 마력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혀끝을 감도는 달콤함은 뇌리를 자극했고, 차갑게 얼어붙었던 심장을 뜨겁게 데웠다. 절망과 공포로 굳어 있던 영민들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이 맛은……!"
"몸이 따뜻해져…… 무서운 기분이 사라졌어!"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집을, 이 따뜻한 제과점을 지키고 싶어!"
공포에 질려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웃음을 터뜨렸고, 도망치려던 청년들이 봇짐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안식처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용기와 의지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일린 님을 지키자!"
"가게를 지켜야 해! 무기를 가져와라!"
영민들이 스스로 쇠지창과 도끼를 치켜들며 제과점 주위로 모여들어 굳건한 인간 방벽을 형성했다. 장부의 수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영민 만족도 최상 달성!] [영지 정화율 45% 돌파! 정화 결계의 범위가 영지 전체로 확장됩니다!]
칼릭스는 그 대장관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나의 점주님. 검 한 자루 쓰지 않고 온 영민을 일류 전사로 만드시다니요. 이쯤 되면 나도 잡역부로서 밥값을 해야겠군요."
그가 검을 뽑아 들고 에일린의 곁에 섰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 붉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혹한의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쩍쩍 갈라지는 빙판 사이로 검은 마물들이 떼를 지어 기어 나왔고, 그 선두에는 핏빛 번개를 두른 군마에 올라탄 벨리알이 서 있었다. 그의 잔혹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영지를 뒤흔들었다.
"모두 쓸어버려라! 단 한 마리의 인간도 남겨두지 마라!"
붉은 번개가 대지를 내리치며 벨리알의 돌격 기마부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침묵 속에 오븐의 남은 열기를 손끝으로 느끼며,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을 응시했다.
쿠르르릉!
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벨리알의 기마 부대가 눈보라를 뚫고 쇄도했다. 마수들의 발톱이 대지를 짓밟을 때마다 검은 흙먼지와 핏빛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 디저트 타임을 방해하는 놈들은 전부 고기반죽으로 만들어 주마!"
바르바토스가 포효하며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염화의 마기가 거대한 불새의 형상을 그리며 치솟았다. 붉은 화염이 혹한의 대지를 가로지르며 벨리알의 선봉대를 향해 돌진했다. 대포가 터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검은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재로 변해 흘러내렸다.
동시에 칼릭스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음 순간, 그는 이미 돌격하는 마수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일당 시급 5닢짜리 일꾼을 이렇게 혹사시키다니, 점주님은 정말 지독한 자본가이십니다."
유쾌한 목소리와 달리, 그가 가볍게 휘두른 검끝에서는 무시무시한 냉기가 폭발했다. 서리 마력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돌격하던 마족 기마병들의 다리를 순식간에 얼려 붙잡았다. 쩡, 쩡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대지가 벨리알의 군세를 단단히 결박했다.
하지만 벨리알은 비웃음을 흘리며 군마의 고삐를 당겼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창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차원이 다른 중압감으로 가득했다.
"가소로운 잡종들이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느냐!"
그가 창을 내지르자, 허공을 가르는 붉은 번개가 칼릭스의 빙벽을 단숨에 산산조각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차가운 비명을 질렀다.
그 파괴적인 충격파가 제과점을 향해 밀려드는 순간, 광장에 모인 영민들의 몸에서 은은한 금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에일린이 구워낸 '공명 초콜릿 수플레'의 진정한 효능이 발현된 것이다. 영민들의 가슴속에 깃든 용기와 따스한 온기가 제과 장부의 정화 마력과 공명하여, 거대한 반구 형태의 황금빛 결계를 형성했다.
쿠웅!
벨리알의 번개가 결계에 부딪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달콤한 바닐라 향과 진한 카카오의 향취가 붉은 화약 냄새를 덮어씌우며 공기를 정화해 나갔다.
"이, 이게 무슨 힘이지?"
벨리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강력한 마기가 고작 인간들이 만들어낸 달콤한 결계에 막혀 정화되고 있었다. 그의 잔혹한 시선이 결계의 중심, 제과점 문앞에 선 에일린에게 꽂혔다.
"저 계집이 근원이군."
그 순간, 에일린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신음했다.
"아……!"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듯 콕콕 쑤셔왔다. 손끝부터 시작된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머릿속이 핑 돌며 시야가 하얗게 바래갔다.
[경고: 신화 등급 디저트 제작 및 대규모 마기 정화로 인해 생명 마력이 한계 이하로 급감합니다.] [경고: 극심한 빙독 한기 및 피로 상태가 진행됩니다. 즉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영혼의 장부가 강제 동결됩니다.]
마법 레시피의 가혹한 대가였다. 수천 명의 영민들과 마족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대규모 마기를 정화한 대가는, 고스란히 에일린의 빈약한 마력 회로로 청구되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문설주를 짚었지만, 무릎에 힘이 풀려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입술이 퍼렇게 질려갔고,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얼어붙어 흩어졌다.
"에일린!"
전방에서 마수들을 베어 넘기던 칼릭스가 그녀의 이상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금안에 처음으로 깊은 당혹감과 살기가 스쳤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벨리알이 소환한 거대한 마수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보느냐, 벨베데르의 대공!"
벨리알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온 마력을 끌어모은 핏빛 번개창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거대하게 팽창했다. 결계가 에일린의 마력 약화로 인해 급격히 흐려지는 틈을 타, 그는 제과점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를 취했다.
"그 달콤한 냄새와 함께 영원히 썩어 없어져라!"
벨리알이 투척한 번개창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에일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칼릭스와 바르바토스가 동시에 소리치며 몸을 날렸지만, 번개의 속도가 더 빨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지 않은 에일린의 눈동자에, 죽음을 몰고 오는 붉은 섬광이 가득 들어찼다. 바로 그 찰나, 제과점 내부에서 거대한 황금빛 장부의 페이지가 스스로 거칠게 넘어가며 피비린내 나는 경고음을 울렸다.
[위기: 소유주의 생명 마력 소실로 인한 시스템 강제 정지 예정.] [히든 프로토콜 가동—]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제과점 지하 바닥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짙은 흑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에일린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낯설고도 거대한 존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과연 에일린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장부의 마지막 비밀을 깨우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