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설산의 들숨이 제과점 ‘안식의 단향’ 문틈으로 사정없이 몰아쳤다.

스르릉, 서슬 퍼런 쇠붙이 소리가 좁은 가게 내부를 빽빽하게 채웠다. 릴리안의 서슬 퍼런 외침에 수십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들이닥칠 기세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서 에일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품 안에서 마침내 제 형태를 갖춘 ‘구원의 성빙 무스 케이크’가 내뿜는 혹독하도록 아름다운 냉기 때문이었다.

오븐 구석진 틈새에서 얼어붙은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별 모양의 성빙초 씨앗. 그것이 칼릭스의 서리 마력을 흡수해 마침내 은빛 꽃을 피워 올렸고, 곱게 빻아 낸 빙설당이 되어 우유 크림과 섞였다.

시원하면서도 아릿한 박하 향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뒤이어 혀끝을 마비시킬 듯 투명하고도 깊은 단맛이 눈꽃처럼 가볍게 흩어지며 공기 중의 삭막한 살기를 지워 냈다. 싱그럽고 고소한 우유 크림의 풍미가 얼어붙은 영지의 대지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 순간이었다.

[레시피 완성: 구원의 성빙 무스 케이크] [영지 정화율이 추가로 5% 상승합니다!]

시야 구석에서 떠오른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에일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비즈니스용 미소로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제 매장에서는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릴리안 영애.”

에일린은 제 손에 묻은 하얀 밀가루 가루를 앞치마에 가볍게 털어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릴리안은 제과점 안을 가득 채운 고결한 단내에 숨을 턱 막혀 하더니, 이내 구두굽을 요란하게 울리며 걸어 들어왔다. 화려한 모피 코트 자락이 테이블 모서리를 거칠게 쓸었다. 그녀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탐욕과 분노로 흉측하게 비틀려 있었다.

“어디서 감히 사생아 년이 앙큼한 주둥이를 놀려? 네가 가문의 이름을 도용해 상표권을 침해하고, 제국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내 손에 있다!”

릴리안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품에서 두꺼운 가죽 장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제국 세무국의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엘도라도 영지의 위조 세무 세출 내역서였다.

매장 안쪽에 앉아 있던 몇 안 되는 영민들과 손님들이 겁에 질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구석 자리에서 묵묵히 저렴한 쿠키를 씹고 있던 거구의 사내, 바르바토스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붉은 눈동자를 번득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슬그머니 닿았다.

에일린은 차분하게 릴리안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상표권 침해와 세금 포탈이라. 꽤 거창한 죄목이네요.”

“모르는 척 발뺌할 생각 마라! 이 변방 구석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배당금과 마진이 모두 가문의 자산을 횡령해 만든 것임을 모를 줄 알았더냐? 당장 무릎을 꿇고 이 가게의 소유권과 영지 지배권을 가문에 양도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반역의 소굴을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릴리안의 등 뒤로 기사들이 검끝을 앞으로 겨누며 압박해 왔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사들의 검에 깃든 마력이 제과점의 정화 결계를 짓누르며 팽팽한 마찰음을 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이쿠, 영애님들 대화가 참 살벌하네.”

뒤편에서 빗자루를 들고 슬렁슬렁 걸어 나오던 칼릭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제 어깨에 얹힌 낡은 잡역부용 앞치마를 털어 내더니, 자연스럽게 에일린의 옆에 섰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쇠붙이를 함부로 휘두르면 손가락이 곱는답니다? 빗자루질하기 딱 좋은 날씨에 먼지 날리게 검은 왜 뽑고 그러실까.”

“너는 또 무슨 천한 잡것이냐? 썩 물러서지 못해!”

릴리안이 채찍을 들어 칼릭스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채찍 끝에 붉은 화염 마력이 깃들며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일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능글맞게 올린 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었다.

탁.

맑은 마찰음과 함께 릴리안의 채찍에 깃들었던 화염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지독한 빙한의 장벽이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벽을 형성해 그녀의 마력을 완벽하게 상쇄해 버린 것이다.

릴리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마력이 아주 손쉽게,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자, 소란은 여기까지 하죠.”

에일린이 차가운 눈빛으로 테이블 위의 장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앞에 ‘영혼의 제과 장부’가 반투명한 황금빛 홀로그램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오직 에일린의 눈에만 보이는 장부였으나, 그녀가 의지를 담아 마력을 주입하자 장부의 페이지가 백색 광원을 뿜어내며 허공으로 넓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제과점 내부의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실시간으로 기록된 투명한 홀로그램 수치들이었다.

[밀가루 1포대 구매: 3실버 - 휴고의 정당한 노동 대가 지불 완료] [빙설당 원료 정제 마력 소모량: 에일린의 생명 마력 12% 환산] [엘도라도 영지 제1기 세금 납부 영수증: 제국 중부 세무관 서명 날인 완료]

“이, 이게 무슨……!”

릴리안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허공에 떠오른 빛의 글자들은 다름 아닌 ‘안식의 단향’이 개업한 이래 들여온 모든 밀가루 한 톨, 설탕 한 조각의 구매 이력과 세금 완납 전표들이었다. 제국의 엄격한 세무국 마법 서명이 들어간 전표들이 공중에 가상 홀로그램으로 투사되자, 매장 안의 공증관들과 손님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단 일 데나르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제 장부의 규칙입니다.”

에일린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가문의 자산을 횡령했다고요? 천만에요. 저는 엘도라도 가문에서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여기 이 장부에 기록된 모든 자금은 제 노동과 칼릭스 씨의 채무 정산, 그리고 정당한 손님들의 결핍 정화 대가로 얻은 정직한 마진입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허공의 홀로그램을 전환했다.

다음 순간, 공중에 떠오른 것은 며칠 전 가문의 스파이인 잭이 제과점 구석 장식장 틈새에 몰래 숨겨두고 갔던 가짜 제국 세무 세출 내역 장부였다.

“그리고 릴리안 영애. 당신이 보낸 쥐새끼가 두고 간 이 위조 장부 말입니다.”

에일린이 품에서 잭의 장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장부의 표지를 톡톡 두드리자, 장부 표면에 숨겨져 있던 붉은색 마력 추적 술식이 거미줄처럼 피어올라 허공에 선명한 형상을 그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릴리안 엘도라도 본인의 고유 마력 서명이었다.

“어머나, 마력 서명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네요? 제국 법전에 따르면 귀족이 황실의 공문서를 위조하고, 타인의 영지에 불법 마력 추적 술식을 심어 사유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는 반역 및 가짜 증서 위조죄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영지 정화 결계를 오염시키려 한 혐의까지 추가되겠군요.”

“이, 이년이…… 감히 누굴 모함하려 드느냐!”

릴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장부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일린은 그녀보다 빨랐다. 에일린은 릴리안이 가져온 조작 세출 장부를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반으로 찢어발겼다.

찌이이익-!

우려낸 홍차처럼 짙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제과점의 정적을 깨뜨렸다. 갈기갈기 찢긴 가짜 장부 조각들이 에일린의 손끝에서 일어난 정화의 불꽃에 휩싸여 하얀 재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려 갔다.

“가짜는 불태워 없애는 게 제 장부 정리 방식이라서요.”

에일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 누가 제국 법전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명백해진 것 같네요. 영지 내의 모든 거래 기록을 위조하고, 황실 대공의 서명이 들어간 세금 완납 증명서까지 부정한 방법으로 뒤엎으려 한 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릴리안 영애?”

주변에 서 있던 공증관들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릴리안의 사설 기사들 역시 검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제국의 영웅인 칼릭스 대공이 버티고 서 있는 데다, 명백한 위조 증거가 온 영민의 눈앞에 폭로된 이상 더는 무력을 행사할 명분이 없었다.

릴리안은 치솟는 굴욕감과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붉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다.

“에일린……! 비천한 사생아 년이 감히 내 앞길을 막아서?”

그녀는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주변의 시선들이 따가운 바늘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찌르고 있었다. 릴리안은 앙칼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철수한다! 당장 철수해!”

기사들이 서둘러 검을 거두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제과점 문을 향해 도망치듯 걸어가던 릴리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이대로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이딴 영지 정화의 결계 따위 완전히 부셔버리겠다는 독기가 그녀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생각보다 영리하구나, 에일린.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이 추잡한 땅이 정말로 네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릴리안이 품에서 검붉은 보석이 박힌 금속 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왕군 급진파 군단장 벨리알에게 이 영지의 정확한 위치와 결계의 약점을 전송하는 ‘조난 마표’였다.

“모두 다 같이 죽어버려!”

릴리안이 표독스럽게 소리치며 마표를 제과점 천장을 향해 던졌다.

콰아아앙-!

제과점 지붕을 뚫고 솟구친 검붉은 마력 광선이 엘도라도 영지의 영공을 향해 길게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맑았던 영지의 하늘이 핏빛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대지를 감싸고 있던 따스한 정화의 기운이 급격히 냉각되며 불길한 울림을 토해냈다.

마표가 남긴 궤적을 따라 저 멀리 국경 너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의 폭풍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악의 침공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콰르릉!

하늘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제과점 ‘안식의 단향’을 감싸고 있던 따스한 온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지붕의 깨진 틈새로 들이닥친 검붉은 마기가 은빛으로 빛나던 성빙 무스 케이크의 단내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아릿하고 시원한 박하 향과 부드러운 우유 크림의 풍미가 순식간에 매캐한 유황 냄새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윽……!”

에일린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한 극심한 한기가 몰아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고,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경고: 외부 마기 유입으로 인해 영지 정화 결계가 급격히 오염되고 있습니다.] [결계 유지를 위해 호스트의 생명 마력이 강제로 인출됩니다. 극심한 피로와 한기 상태가 부여됩니다.]

눈앞에 붉은색 경고 창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에일린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단단하고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칼릭스였다. 그의 얼굴에서 평소의 유쾌한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날카롭게 가라앉은 금안이 오염되어 가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참, 잡역부 일치고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그가 에일린을 품에 안아 부축하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서리 마력이 에일린의 몸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칼릭스 씨…….”

“걱정 마십시오, 점주님. 계약서에 적힌 근로 시간은 철저히 지키는 편이니까요.”

칼릭스가 비죽 웃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제과점 밖, 붉게 물든 설산의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그때, 매장 구석에서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끼이이익.

낡은 목조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에일린이 구운 초콜릿 쿠키의 마지막 조각을 입안에 던져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단맛을 방해하는 쥐새끼들이 제일 싫어.”

나직하게 읊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거대한 손이 품속에 숨겨져 있던 대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터져 나오는 마력의 파동이 기사들의 숨통을 조일 만큼 압도적이었다.

“히, 히익……!”

마차로 도망치던 릴리안이 그 기세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기사들 역시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를 비웃듯, 대지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쿵! 쿵! 쿵!

멀리 설산의 국경 너머에서 수만 마리의 마수가 내닫는 불길한 발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한가운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검붉은 불꽃을 두른 군마를 탄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군 급진파 군단장, 벨리알이었다.

그가 이끄는 선봉대가 엘도라도 영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제과점 유리창이 요란하게 덜컹거렸고, 갓 구워낸 디저트들의 달콤한 향기가 피비린내 속에 완전히 파묻히려 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칼릭스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과연 이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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