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쁜 숨결마저 하얗게 얼어붙는 엘도라도의 동토 위로, 시린 은빛 침묵 대신 불길한 핏빛 노을이 가파르게 내려앉고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가차 없는 혹한의 지평선 너머로 검은 마물과 벨리알의 돌격 기마부대가 붉은 번개를 사납게 튀기며 몰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천둥소리와 함께 벨리알이 투척한 핏빛 번개창이 에일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지독한 한기와 생명 마력의 고갈로 무릎을 꿇은 에일린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 절체절명의 찰나, 에일린의 스커트 주머니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은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앙!

그것은 칼릭스의 차가운 빙독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해 두었던, 오븐 틈새에서 발견한 얼어붙은 별 모양의 '성빙초(星氷草) 씨앗'이었다. 영혼의 제과 장부가 격렬하게 공명하며 굳게 닫혀 있던 씨앗의 껍질이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서 순백의 마력이 거대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솟구쳤다. 만개한 성빙초의 은빛 장막은 에일린의 몸을 감싸 안았고, 날아들던 붉은 번개창은 그 결계를 뚫지 못한 채 허공에서 사방으로 굴절되며 거칠게 흩어졌다.

"……이, 이게 무슨?!"

공중에서 투창을 던진 벨리알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인간의 얄팍한 마력 결계 따위는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던 그의 오만이 보기 좋게 바스러진 순간이었다.

에일린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성빙초의 개화로 목숨은 건졌으나, 생명 마력의 급격한 소모로 인해 온몸의 뼈마디가 시려 왔다. 입술은 핏기를 잃고 파랗게 질려 있었고, 속눈썹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고 오직 철저한 계약 관계로만 세상을 보려 했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참혹한 광경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에일린."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언제 다가왔는지, 칼릭스가 그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서 있었다. 그의 금안에는 평소의 가벼운 장난기나 능글맞은 여유는 단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혹한보다 더 서늘하고 깊은 살기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칼릭스는 에일린의 이마에 맺힌 차가운 식은땀을 가죽 장갑을 벗은 맨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닿은 자리에 기분 좋은 온기가 미미하게 맴돌았다.

"내 고용주께서 이렇게 쓰러져 계시면, 내가 일한 매달의 급여는 대체 누구에게 청구해야 합니까?"

그가 짐짓 평소처럼 장난스레 속삭였지만, 그 목소리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릭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대공가 최고의 마검, '서리한의 숨결'의 자루를 꽉 쥐었다.

스으으릉.

검이 시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사방의 대기가 얼어붙는 듯한 파열음이 울렸다. 칼릭스는 에일린을 등 뒤로 둔 채, 지평선을 가득 메운 수억 마리의 마수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 위로 대공가의 푸른 망토가 매서운 칼바람을 맞아 거칠게 펄럭였다.

"감히 내 일터를 어지럽히는 쥐새끼들이 너무 많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릭스의 신형이 지면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그가 딛고 서 있던 자리가 얼음 파편과 함께 폭발했다. 전광석화라는 말로도 부족한 속도였다. 칼릭스는 단숨에 마수 선봉대의 한가운데로 날아올랐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이 거대한 반월형의 검기로 변해 대지를 쓸었다.

서걱, 서걱! 콰아앙!

단 한 번의 검격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산산조각이 났다. 대공가의 위엄을 고스란히 증명하듯, 그의 검은 지나는 자리마다 혹독한 서리 폭풍을 일으켰다. 전장을 가르는 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고, 그 등 뒤를 지키는 대공가 기사단 역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몰려드는 마물들을 격퇴하기 시작했다. 검성이라 불리는 사내의 진짜 실력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기세를 올리던 벨리알의 기마부대조차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전쟁터의 피비린내와 몬스터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깊어질수록,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는 칼릭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참혹한 전쟁의 기억.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과 피로 물들었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의 뇌리를 사정없이 헤집기 시작한 것이다. 검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서리 마력이 폭주하듯 날뛰며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빙독의 기운이 그의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하자, 칼릭스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며 정신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안 돼…….'

에일린은 멀리서 흔들리는 칼릭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결핍 수치가 영혼의 제과 장부 위에서 붉은 경고등을 켜며 90%를 향해 치솟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빙독에 잠식되어 자멸할 터였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던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검을 뽑아 든 유일한 고용인이자 동반자였다. 비록 시작은 철저한 손익계산서에 따른 계약 관계였을지라도, 그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휴고! 내 가방에서 성빙초 꽃잎을 가져와! 그리고 저 장식장 아래 숨겨진 상자도!"

에일린이 소리치자,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억척스럽게 자리를 지키던 잡역부 휴고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방금 전 만개한 성빙초의 은빛 꽃잎, 그리고 과거 가문의 스파이 잭이 몰래 제과점 장식장 틈새에 숨겨두고 갔던 '가짜 제국 세무 장부'였다. 릴리안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숨겨둔 저주의 추적 술식이 새겨진 장부. 에일린은 영혼의 제과 장부를 펼쳐 그 위조 장부의 마력 흐름을 역으로 추적했다.

[제과 장부 분석 완료: 오염된 마력 술식을 정화 에너지로 역분환합니다.]

"감히 내 가게에 이런 더러운 쓰레기를 묻어두고 가다니. 릴리안, 네가 보낸 저주를 내 오븐의 땔감으로 써주마."

에일린이 차갑게 읊조리며 위조 장부를 오븐 아래의 마력 주입구에 밀어 넣었다. 화르륵! 저주의 마력이 정화의 불꽃으로 치솟으며 오븐의 온도를 극상으로 끌어올렸다. 결계를 갉아먹던 어둠의 마력이 완벽한 화력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에일린은 곧바로 성빙초 꽃잎을 정제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길 위에서 성빙초 꽃잎은 사르르 녹아내리며,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은빛의 '빙설당'으로 변모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밀가루 반죽에 이 빙설당과 달콤하게 조린 진저 시럽, 그리고 청량한 박하 추출물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오븐의 문이 열리고, 반죽이 뜨거운 열기를 받기 시작하자 제과점 내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향기가 피어올랐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구름처럼 폭신하게* 부풀어 오른 황금빛 머핀 위로, 은빛 빙설당 가루가 눈꽃처럼 아름답게 내려앉았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진저의 향과 가슴 속 응어리를 시원하게 씻어내리는 박하의 청량한 향, 그리고 혀끝에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는 고결한 단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성빙 진저 머핀'이 완성된 것이다.

에일린은 갓 구워진 뜨거운 머핀을 품에 안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전장을 향해 달렸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때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칼릭스 벨베데르!"

그녀의 목소리가 전장의 소음을 뚫고 칼릭스의 귓전에 닿았다.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검을 힘겹게 쥐고 있던 칼릭스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흐려진 눈동자에, 은빛으로 빛나는 머핀을 든 채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에일린의 모습이 담겼다.

"당신은 내 넘버원 전용 고용인이에요! 일방적인 계약 파기는 절대 불허합니다! 그러니까……!"

에일린은 칼릭스의 앞까지 단숨에 달려가, 그의 차가운 입술 사이로 온기가 뚝뚝 떨어지는 성빙 진저 머핀을 사정없이 우겨넣었다.

"이거 먹고 당장 정신 차려요!"

뜨거운 머핀이 그의 입안 가득 씹히는 순간, 경이로운 미각의 향연이 펼쳐졌다.

혀끝을 자극하는 알싸한 생강의 온기가 빙독으로 얼어붙어가던 그의 혈관을 따스하게 녹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머핀 속에서 터져 나온 성빙초의 은빛 단맛이 그의 뇌리에 가득 차 있던 참혹한 전장의 환영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박하의 청량함은 그의 가슴 속에 맺혀 있던 고독과 슬픔의 응어리를 완벽하게 씻어내렸다.

[알림: 손님 '칼릭스 벨베데르'의 결핍도가 급격히 감소합니다.] [결핍도 90% -> 35%로 폭락!] [영지 정화율이 15% 상승하며 결계의 방어력이 대폭 복구됩니다.]

칼릭스의 금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피로와 빙독의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전신에 터질 듯한 마력이 샘솟았다. 그의 입가에 다시금 뻔뻔하고도 유쾌한 미소가 걸렸다.

"하하, 정말이지 무서운 고용주님이시군. 사직서도 마음대로 못 내게 하시고 말이야."

그가 낮게 웃으며 에일린의 머리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이전과 달리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고, 따뜻했다.

"기다려요, 나의 사랑스러운 점장님. 남은 청소는 이 수석 직원이 깔끔하게 끝마칠 테니."

칼릭스가 검을 고쳐 쥐고 대공가 기사단을 이끌며 다시 한번 마수들의 대열로 대담하게 격돌했다. 그의 검끝에서 피어오른 투명한 얼음 장벽들이 아군을 보호하고, 적들을 가차 없이 얼려 부수기 시작했다. 그 눈부신 광경은 전장의 기세를 완벽하게 아군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승기를 잡아가던 바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비명이 전장 우측에서 터져 나왔다.

"으아악! 장벽이 무너졌다!"

"지하 통로를 통해 우회한 놈들이다! 우측 방어선이 뚫렸다!"

칼릭스가 이끄는 주력 군대가 전방에서 분투하는 사이, 방어선 우측의 허술하고 낡은 장벽 구멍을 통해 마왕군의 광신도 마물 백여 마리가 교활하게 우회하여 침입한 것이었다. 놈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제과점 '안식의 단향'이 있는 영지 중심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영민들이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해하지 마라, 이 잡것들아."

그때, 제과점 앞마당을 묵묵히 지키고 서 있던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진열대에서 가장 저렴한 쿠키 하나를 묵묵히 씹어 먹고 가던 흉터 깊은 사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왕군 최고의 맹장 바르바토스였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마기가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내 소중한 디저트 예약석을 망치려 드는 놈들은, 전부 고기다지듯 다져주마."

바르바토스가 흉포한 미소를 지으며 밀려드는 광신도 마물들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의 막강한 무력에 마물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지만, 우회하여 들어오는 마물들의 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난전의 와중에, 유독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고 날카로운 뿔을 가진 돌격 대장 마수 한 마리가 바르바토스의 저지선을 교묘하게 피해 나갔다.

타다다닷!

놈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오직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오는 에일린의 오븐 매장을 향해 직선으로 폭주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30미터, 20미터, 그리고 단 10미터.

"에일린!"

멀리서 칼릭스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미 놈의 거대한 발톱이 에일린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돌격 대장 마수는 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며, 에일린이 온 정성을 다해 가꾸어 놓은 소중한 쇼케이스—그녀의 피와 땀이 서린 달콤한 디저트들이 가득 진열된 아름다운 유리창을 향해 무자비하게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하는 파열음이 대기를 찢기 직전, 에일린의 눈동자에 놈의 흉포한 그림자가 가득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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