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검날이 칼집을 빠져나오며 스산한 비명을 질렀다. 반쯤 드러난 푸른 강철 검신에 제과점의 따스한 촛불이 얼룩처럼 번졌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꿰뚫을 듯한 서슬 퍼런 살기가 좁은 카운터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바르바토스의 거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사슬처럼 에일린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방금 전까지 타르트를 탐욕스럽게 삼키던 미식가의 만족감 대신, 잔혹한 전장을 지배하던 마왕군 군단장의 서늘한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내 염화를 이토록 완벽하게 잠재우는 것은 대륙의 그 어떤 비약으로도 불가능하다.”
압도적인 중압감이 에일린의 어깨를 짓눌렀다.
“마약이라도 탄 것이냐? 아니면…… 내 영혼을 지배하려는 간악한 주술이냐?”
그의 거친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칼릭스의 손이 즉각 검자루로 향했다. 대공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이 제과점 바닥을 차갑게 얼리며 서리꽃을 피워냈다. 일촉즉발의 대치였다. 두 거물의 마력이 충돌하기 직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울었다.
하지만 정작 그 폭풍의 중심에 선 에일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을 뿐,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방용 대형 오븐 가위를 단단히 쥐었다. 무쇠로 만들어진 묵직한 가위가 은은한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타인의 호의도, 눈앞의 위협도 에일린에게는 그저 불확실한 변수에 불과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철저한 등가교환과 수치뿐이었다. 계약되지 않은 호의는 독이 되고, 계산되지 않은 위협은 손실을 낳는다.
에일린은 가위를 카운터 테이블 위로 툭 내려놓았다. 맑은 쇳소리가 칼날의 공명을 깨뜨렸다.
“망상도 정도껏 하셔야지요, 손님.”
에일린의 목소리는 엘도라도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마약이나 주술을 부릴 마력이 있었다면, 진작 이 추운 영지를 떠나 황도에 대저택을 샀을 겁니다. 그런 시답잖은 음모론을 펼치실 시간에 계산부터 하시는 게 순서 아닙니까?”
“……뭐라?”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목숨이 오가는 대치 상황에서 고작 장사꾼의 셈을 들이미는 인간 따위는 그의 평생에 처음이었다.
“염화의 마기를 다스리는 기적의 타르트입니다. 한 조각에 들어간 정성과 마법적 조율을 환산하면 결코 저렴하지 않아요. 자, 여기 청구서입니다. 정확히 80골드입니다.”
에일린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미리 작성해 둔 제과 장부의 영수증 한 장을 찢어 바르바토스의 억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바르바토스는 멍하니 영수증을 내려다보았다. 영혼을 잠재우는 신의 음식을 먹여놓고, 당장 목이 날아갈 위기 속에서 오직 적자와 흑자를 따지는 이 기묘한 영주 서녀의 결벽증적인 태도에,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의구심이 엉뚱한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이윽고 제과점 천장이 들썩일 정도로 거대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바르바토스는 검을 칼집으로 가볍게 밀어 넣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하하! 이 사생아 계집을 보게나! 내 목숨줄을 쥐고 흔들던 염화를 잠재운 대가가 고작 80골드라고? 대륙의 대마법사들이 내 염화를 억제하는 조건으로 영지 절반을 요구하던 것에 비하면, 기가 막힐 정도로 싼 가격이군!”
그가 품 안을 뒤적여 붉고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단단한 광석 덩어리 몇 개를 카운터 위로 거칠게 던졌다.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마족의 화폐 대신 이걸 주지. 마계 심연에서만 채굴되는 흑염석이다. 인간들의 시장에서 팔면 개당 수백 골드는 가볍게 호가할 테지. 앞으로 이 창가 자리는 내 전용석이다. 매일 아침 내가 올 때까지 타르트를 비워두도록 해라.”
[영혼의 제과 장부가 기록을 갱신합니다!] [고객 만족도: 120% (초과 달성)] [미시 보상 획득: 극희귀 재료 '흑염석 원석' 5개 확보] [영지 정화율 급상승: 18.9% -> 22.5%] [제과점 결계 마력이 대폭 충전되며, 주변 대지가 해동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장부의 기계적인 음성을 들으며 에일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흑염석이라니. 오븐의 화력을 영구적으로 유지해 줄 최고의 마력 연료였다. 이 정도면 이번 달 제과점 광열비는 완전히 창조적인 흑자로 돌아선 셈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칼릭스가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이봐요, 야만적인 2군단장님. 아무리 돈을 많이 낸다고 해도 영업시간 전에 무단침입해서 사장님을 위협하는 건 곤란하지. 우리 가게는 나름대로 엄격한 근로기준법과 보안 수칙을 지키고 있거든.”
칼릭스의 몸 주변으로 서리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바르바토스의 붉은 눈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벨베데르의 미친 무신 놈이 왜 이 구석진 빵집에 처박혀 있나 했더니, 고작 계집의 앞치마 끈이나 잡고 늘어지는 잡역부 신세였군.”
“말은 바로 해야지. 난 정당한 채무 관계에 의해 시급 동화 5닢을 받고 일하는 에이스 일꾼이라고. 자네 같은 불청객을 쫓아내는 것도 내 업무 범위에 들어가지.”
두 사내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당장이라도 제과점의 지붕을 날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에일린의 이마에 핏대가 가늘게 솟았다.
새로 정화된 영지의 흙을 밟고 기껏 피어오르기 시작한 제과점의 은은한 단내가 이 무식한 사내들의 마력 다툼으로 인해 흐트러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탁!
에일린이 양손으로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
“두 분 다 조용히 안 하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실려 있지 않았음에도, 기묘한 서슬이 퍼래서 두 거구의 사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에일린은 카운터 아래에서 빳빳하게 풀이 죽은 광목 앞치마 두 장을 꺼내 각각 칼릭스와 바르바토스의 가슴팍에 사정없이 던졌다.
“칼릭스 씨는 걸레를 잡고 바닥 구석구석에 낀 서리부터 닦으세요. 그리고 바르바토스 손님, 아니, 이제 단골 계약을 맺으셨으니 손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과점 안에서 소란을 피우며 영업을 방해한 벌로, 저기 쌓인 설거지거리들을 전부 닦아놓기 전까진 발 한 자국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내가…… 마왕군의 군단장인 내가 식기 따위를 닦으라고?”
바르바토스가 어이없다는 듯 제 가슴에 얹힌 앙증맞은 레이스 앞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싫으시면 다음부터 타르트는 일절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제 제과점의 규칙은 절대적이니까요.”
에일린의 단호한 선언에 바르바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체내에서 날뛰던 염화를 가라앉혀 줄 유일한 해독제를 인질로 잡힌 셈이었다. 결국 그는 씩씩거리며 굵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앞치마 끈을 묶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꼴을 보던 칼릭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사장님 앞에서는 마왕이고 대공이고 다 똑같은 노동자라니까.”
“너도 시끄러우니 얼른 바닥이나 닦으세요, 칼릭스 씨.”
“예, 예. 분부대로 합지요.”
칼릭스는 능글맞게 대꾸하며 익숙한 솜씨로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시작했다. 지상 최강이라 불리는 제국의 전쟁 영웅과 마왕군의 2군단장이 좁은 제과점 안에서 나란히 앞치마를 두르고 홀 서빙과 설거지를 분담하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엄청난 악력으로 접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 닦았고, 칼릭스는 뻔뻔한 농담을 던지며 먼지를 털어냈다. 그들의 기묘한 협동 덕분에 제과점 내부는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 평화로운 소란 속에서, 에일린은 가슴팍에 품고 있던 주머니에서 강한 박동과도 같은 미열을 느꼈다.
‘이건……?’
주머니를 열어보니, 1화에서 제과점 오븐 틈새에서 발견한 이래 늘 얼어붙어 있던 신비한 별 모양의 ‘성빙초 씨앗’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떤 온기에도 꿈쩍하지 않던 씨앗이, 칼릭스의 서리 마력과 바르바토스의 염화 마력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극적인 마력의 조화 속에서 눈부신 은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파스스.
에일린의 손바닥 위에서 씨앗의 껍질이 깨지며, 순백의 꽃잎이 별빛처럼 피어올랐다. 제과점 가득 맑고 투명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레시피 각성: 성빙초의 구원] [최상급 빙설당의 재료를 획득했습니다. 이 재료는 마기의 폭주를 완벽하게 정화하며, 깊은 정신적 결핍을 치유하는 ‘구원의 레시피’의 핵심이 됩니다.]
창밖으로 하얗게 얼어붙은 엘도라도의 침엽수림 위로, 겨울바람이 잔잔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만개한 성빙초의 은빛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제과점 내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에일린은 홀린 듯이 은빛 꽃잎을 모아 우유 크림과 섞기 시작했다.
서늘하면서도 깊은 달콤함을 품은 단내가 코끝을 찔렀다. 갓 구워낸 폭신한 시트 위에 얹은 크림은 혀끝에 닿자마자 눈처럼 스르륵 녹아내리며 청량한 단맛을 남겼고, 뒤이어 가슴 깊은 곳까지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기적을 빚어낸 대가는 가혹했다. 깊은 어둠을 치유하는 마법을 발동하느라 에일린의 생명 마력이 급격히 소모되었고, 뼈를 깎는 듯한 독한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쳐왔다. 에일린은 카운터를 짚으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어이, 꼬맹이. 어디 아픈 건가?”
바르바토스가 가장 먼저 그녀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싸늘한 마력의 흐름이 제과점 구석에서 흘러나왔다. 에일린의 시선이 진열장 틈새로 향했다. 지난번 세무관의 스파이 잭이 몰래 숨겨두고 간 가짜 제국 세무 장부. 그 안에서 붉은 추적 술식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제과점의 정화 결계를 사납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염의 파동에 반응하듯, 제과점의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렸다.
쾅!
“제국 임시 세무조사국 및 영지 공증관의 이름으로 명한다!”
차가운 눈보라와 함께 들이닥친 것은 금빛 견장을 찬 제국 공증 서관들이었다. 그들의 뒤편으로, 에일린의 친정 가문이자 그녀를 쓰레기처럼 버렸던 엘도라도 가문의 적녀, 릴리안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힌 마차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공증관이 오만한 태도로 두루마리를 펼치며 차갑게 선언했다.
“에일린 엘도라도. 너를 심각한 조세 포탈 및 마족과의 불법 밀거래, 그리고 금지된 암흑 주술 배포 혐의로 체포한다! 이 제과점은 즉시 완전히 유폐되며, 영지의 지배권 또한 제국령으로 임시 몰수한다!”
그가 치켜든 압류 집행장의 붉은 인장이 제과점의 따스한 불빛 아래에서 핏빛으로 번뜩였다. 앞치마를 두른 칼릭스와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천천히 공증관들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