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누구든 이 따뜻한 불씨를 끄려 하는 놈들은, 내 손으로 영원한 겨울 속에 묻어버리지.”

칼릭스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어두운 제과점 안을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서리 마력이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던 그 순간이었다.

품 안의 가냘픈 신형이 잘게 떨렸다.

“……시끄러워요.”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가 칼릭스의 귓가를 두드렸다.

스르륵, 에일린의 감겨 있던 속눈썹이 떨리며 들어 올려졌다. 아직 초점이 완전히 맞지 않는 흐릿한 보라색 눈동자가 칼릭스의 얼굴을 담았다. 그녀는 자신이 단단하고 넓은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웠다.

에일린은 남은 힘을 쥐어짜며 그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이거 놓으세요, 대공 전하.”

“어라, 눈을 뜨자마자 밀어내는 겁니까? 조금 더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는데 말이죠.”

칼릭스는 미련 없이 팔을 풀면서도, 그녀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어깨를 살며시 지탱해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평소의 유쾌하고 능글맞은 빛깔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전 대륙을 얼려버릴 듯이 살기를 뿜어내던 무신(武神)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에일린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은 열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던 그의 단단한 체온이 피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른 주머니 속의 가상의 주판을 튕겼다. 호의는 곧 빚이고, 빚은 곧 약점이다. 이 가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행동을 철저하게 손익계산서 위로 올려놓아야 했다.

“방금 전하께서 제게 주입하신 서리 마력의 양, 그리고 저를 침대까지 옮겨 주신 노동력을 계산해 보죠.”

“네? 지금 이 상황에서 계산기를 두드리시는 겁니까?”

칼릭스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에일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마력 해동비는 일시적인 응급처치였으니 50골드로 책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간이 노동비는 시급 5닢으로 계산해서…… 현재 전하가 제게 갚으셔야 할 채무액 450골드에서 제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빚은 정확히 400골드입니다.”

“야박하기도 해라. 목숨을 구해준 대가가 고작 50골드 감면이라니, 제국 최고의 대공이 받는 시급치고는 너무 짠 거 아닙니까, 사장님?”

“싫으시면 지금 당장 앞치마 벗고 나가셔도 됩니다. 대체 인력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요.”

에일린의 단호한 태도에 칼릭스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그의 입가에는 호기심과 잔잔한 안도감이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타인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불신하는 그녀가 이렇게 날을 세우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야말로, 평소의 에일린으로 돌아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때, 에일린은 앞치마 주머니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진동과 온기를 감지했다.

‘이건……?’

그녀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지난 1화에서 제과점 오븐 깊숙한 틈새에서 발견했던, 얼어붙은 별 모양의 씨앗이었다.

아무리 열을 가해도 녹지 않고 단단한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그 ‘성빙초(星氷草) 씨앗’이, 지금 주머니 안에서 눈부신 은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스스스슥.

에일린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펼치자, 은색의 미세한 얼음 가루가 허공으로 날리며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칼릭스의 서리 마력이 에일린의 생명 마력을 거쳐 씨앗에 닿으면서, 마침내 길고 긴 봉인이 해제된 것이었다.

꽃잎은 마치 투명한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서늘하게 빛났고, 그 중심부에는 극상의 단맛을 품은 은빛 결정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영혼의 제과 장부가 반응합니다.] [기적의 재료: ‘성빙초의 빙설당(氷雪堂)’을 획득하셨습니다!] [효과: 깊은 심연의 마기와 화상을 정화하는 극상의 냉각 치유 효과.]

에일린의 보라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이 귀한 재료라면 그 어떤 마기와 독소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전설적인 디저트를 만들 수 있었다.

***

그날 밤, 엘도라도 영지에는 한파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매서운 바람 소리가 제과점 ‘안식의 단향’의 외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가게 안은 따스한 벽난로 온기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바닐라 향 덕분에 다른 세상처럼 아늑했다.

딸랑-.

정적을 깨고 거친 황동 종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은 단순한 겨울바람이 아니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겁고 끈적한 살기, 그리고 타는 듯한 유황 냄새가 섞인 열풍이었다.

“…….”

거대한 체구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온몸에 깊은 도검 흉터가 가득한 거구의 사내였다.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검은 가죽 망토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지옥 염화(炎火)의 마기가 붉은 아지랑이처럼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사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묻어 있던 눈과 얼음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치익 소리를 냈다.

카운터 뒤에서 찻잔을 닦던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기절했을 터였다. 들어온 자는 마왕군 최정예 2군단장, ‘바르바토스’였다.

하지만 에일린은 도망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투명한 푸른빛의 제과 장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손님 분석] 이름: ??? (바르바토스) 결핍 상태: 심연의 화상 수치 99% (폭주하는 염화의 마기로 인해 영혼과 육체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상태) 요구 레시피: 눈꽃 피스타치오 타르트

‘99%라니…….’

에일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수치는 언제 폭발해 주변을 잿더미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임계점이었다. 사내의 거친 숨결마다 붉은 불꽃 송이가 튀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게 안을 사납게 훑었다.

“여기가 가문에서 버림받은 계집이 한다는 그 우스꽝스러운 빵집인가.”

바르바토스의 목소리는 마치 맷돌을 가는 듯 껄끄럽고 웅장했다. 그는 진열대의 가장 저렴하고 투박한 쿠키 하나를 집어 들더니, 묵묵히 입안에 넣고 씹었다.

바스락.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탕만 가득한 쓰레기군. 이딴 단맛으로 내 안의 갈증을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마족의 불꽃은 이보다 훨씬 깊고 잔혹하다.”

그가 거친 독설을 내뱉으며 에일린을 위협하듯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제과점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제과점 주인이라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빌었겠지만, 에일린은 오히려 냉정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작동을 끝마친 상태였다.

‘저 정도의 결핍을 정화한다면, 영지 정화율은 물론이고 제과점의 결계도 엄청나게 강화할 수 있어. 게다가 저 손님은…… 아주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는 우량 고객이다.’

에일린은 화사하고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았다.

“인간의 평범한 설탕으로는 손님의 그 깊은 화상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희 ‘안식의 단향’에는 오직 손님만을 위한 특별한 처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처방이라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최고의 맛을 보여드리죠.”

에일린은 망설임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칼릭스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에일린은 눈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지금은 일꾼인 그가 나설 차례가 아니었다. 장삿길을 여는 것은 오직 파티시에인 자신뿐이었다.

주방에 들어선 에일린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녀는 방금 전 피워낸 성빙초의 꽃잎에서 ‘빙설당’ 결정을 조심스럽게 긁어모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결정들은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끝을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최고급 피스타치오를 꺼냈다. 껍질을 벗겨내자 싱그럽고 짙은 초록빛의 알맹이들이 드러났다. 에일린은 이것을 절구에 넣고 곱게 빻기 시작했다.

스각, 스각.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흙내음이 섞인 피스타치오 고유의 농밀한 향이 주방 가득 퍼져나갔다. 여기에 신선한 버터와 아몬드 가루를 섞어 타르트지를 만들었다. 오븐에 들어가 구워지는 동안,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향이 공기 중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이어 그녀는 차가운 크림에 빙설당을 섞어 휘핑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은빛 당 결정이 크림과 섞이며 내는 소리는 마치 한겨울 밤에 내리는 눈송이들의 속삭임 같았다. 완성된 크림은 은은한 연초록빛을 띠며, 코끝을 찌르는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박하 느낌의 단내를 풍겼다.

잘 구워진 타르트지 위에 고소한 피스타치오 프란지판 크림을 채우고, 그 위에 빙설당으로 만든 눈꽃 모양의 화이트 초콜릿 장식을 얹었다.

마침내 ‘눈꽃 피스타치오 타르트’가 완성되었다.

에일린은 갓 구워낸 타르트를 접시에 담아 홀로 걸어 나왔다. 타르트 주변으로 미세한 은빛 냉기 입자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탁.

에일린은 바르바토스의 테이블 위에 타르트를 내려놓았다.

“‘눈꽃 피스타치오 타르트’입니다. 손님의 뜨거운 갈증을 식혀줄 유일한 디저트죠.”

바르바토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까짓 밀가루 덩어리가 내 염화를 식힌다고? 가소롭군.”

그는 비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타르트를 크게 한 조각 잘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스락, 아작.

가장 먼저 이빨 끝에 닿은 것은 바삭하면서도 고소함이 응축된 타르트지였다.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피스타치오의 묵직하고 따뜻한 견과류 향이 혀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크림 속에 숨겨져 있던 빙설당이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순간, 폭발적인 냉기가 그의 구강 전체를 강타했다. 그것은 단순히 차가운 얼음의 느낌이 아니었다. 타들어 가던 영혼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극도로 정제된 달콤하고 서늘한 치유의 파도였다.

“……윽!”

바르바토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체내에서 미쳐 날뛰며 장기를 태워버릴 듯이 요동치던 지옥의 염화가, 타르트 한 조각이 넘어가자마자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의 붉은 피부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전신을 감싸던 거친 살기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 이게 무슨……!’

바르바토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뼈를 깎는 듯한 화상이 완벽하게 진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광증과 분노가 사라지고,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깊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 어떤 강력한 신성 마법이나 고위 대마법사도 억제하지 못했던 가공할 염화의 마기가, 고작 이 작은 디저트 한 조각에 온순한 양처럼 잠재워진 것이었다.

그것은 경이로움을 넘어선 공포에 가까운 기적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홀린 듯이 포크를 움직였다. 체면도, 위엄도 모두 잊은 채 타르트를 입안으로 쓸어 담았다. 고소함과 서늘한 단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단 한 점의 크림조차 남지 않았다.

[영혼의 제과 장부가 기록을 갱신합니다!] [고객 만족도: 120% (초과 달성)] [영지 정화율 급상승: 15.4% -> 18.9%] [제과점 결계 마력이 대폭 충전됩니다!]

에일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대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타르트를 완전히 핥아 먹은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 전의 광증은 사라졌지만, 대신 깊고 날카로운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서걱.

그의 커다란 손이 허리춤에 찬 거대한 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제과점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긴장했다. 칼릭스 역시 그의 움직임에 반응해 즉각 전투 태세를 갖췄다.

바르바토스는 무시무시한 풍채로 에일린을 내려다보며, 검자루를 잡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에일린의 작은 몸을 완전히 덮었다.

“네놈…… 이 빵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보다 더한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내 염화를 이토록 완벽하게 잠재우는 것은 대륙의 그 어떤 비약으로도 불가능하다. 마약이라도 탄 것이냐? 아니면…… 내 영혼을 지배하려는 간악한 주술이냐?”

검이 칼집에서 반쯤 뽑혀 나오며, 차가운 쇳소리가 제과점의 정적을 깨뜨렸다. 당장이라도 에일린의 목을 벨 듯한 험악한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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