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을 조여오던 사나운 손길에 핏기가 가시던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사내의 손아귀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대공 칼릭스는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에일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구원해라…… 단내가 나는 가시나무여.”

그는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순례자처럼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이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에일린의 어깨 위로 툭 쓰러지며 의식을 놓아버렸다.

쿵!

무거운 갑옷의 무게가 그녀의 몸 위로 쏟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무게감 속에서, 에일린은 귓가를 파고드는 문밖의 흉포한 긁는 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바깥은 뼈를 깎는 듯한 북풍이 몰아치며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꺾어대는 혹독한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혹한의 기운 속에서도, 제과점 ‘안식의 단향’ 내부에는 오븐이 내뿜는 미약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서 들이닥치려는 마기의 기운은 그 온기마저 차갑게 얼리려 들었다.

[경고: 강력한 마기에 오염된 추격자가 접근 중입니다.]

눈앞에 떠오른 붉은색 경고 창이 깜빡였다. 에일린은 짓눌린 몸을 간신히 빼내며 차가운 바닥에 누운 칼릭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우면서도, 살결 위로는 푸르스름한 성에가 돋아나고 있었다. 모순적인 빙독의 증세였다.

‘살려야 해. 하지만 공짜는 없어.’

에일린의 머릿속에서 차가운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림받은 상처 속에서 철저한 손익계산서로만 세상을 통제해 온 인물이었다. 이 남자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제국 최강의 무신인 대공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 그리고 내 가게를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패를 얻는 것. 그것이 에일린이 도출한 가장 확실한 마진이었다.

스륵.

그녀의 영혼에 각인된 ‘영혼의 제과 장부’가 허공에 반투명하게 펼쳐졌다.

[손님: 칼릭스 벨베데르] [결핍도: 95% (전쟁의 트라우마 및 빙독 과부하)] [처방 레시피: 화마력(火魔力)을 품은 진저 스콘]

에일린은 주머니 속을 만져보았다. 1화에서 발견했던, 얼어붙은 별 모양의 ‘성빙초 씨앗’이 칼릭스의 빙독 마력과 공명하듯 미세하게 진동하며 은은한 금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씨앗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마력의 순환이 필요했다.

“구해달라고 애원한 건 당신이니까, 청구서는 톡톡히 보낼 줄 알아.”

에일린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낮에 구워둔 진저 스콘 한 바구니가 워머 위에 남아 있었다.

진저 스콘은 생강 특유의 알싸하고 매콤한 후각적 자극과, 좋은 버터를 아낌없이 넣어 구워낸 묵직하고 고소한 풍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디저트였다. 한 입 베어 물면 겉은 파삭하고 속은 포슬포슬하게 부서지며, 은은한 설탕 시럽의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명품이었다. 이 디저트에는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강력한 화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에일린은 스콘을 잘게 부수어 그 속에 깃든 마력을 모았다. 하지만 대공은 완전히 의식을 잃어 스스로 삼킬 수 없는 상태였다.

‘제약이 작동하는군.’

영혼의 제과 장부가 경고하듯 에일린의 가슴께가 시려왔다. 손님의 깊은 어둠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에일린 자신의 생명 마력을 매개로 삼아야 했다. 지독한 한기와 한계를 시험하는 피로감이 그녀의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에일린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칼릭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차가운 이마에 자신의 따뜻한 손가락을 얹었다.

스우우우-!

순간, 칼릭스의 몸을 좀먹던 푸른 빙독의 기운이 에일린의 손끝을 타고 그녀의 몸속으로 사정없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윽……!”

뼛속까지 얼어붙는 지독한 오한에 에일린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가 딱딱 맞부딪치고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한 손으로 진저 스콘의 부스러기와 그 속에 응축된 황금빛 화마력을 쥐고, 그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따스하고 알싸한 생강의 마력이 칼릭스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동시에 에일린이 흡수한 한기는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성빙초 씨앗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아앗-!

주머니 틈새로 눈이 부실 정도의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칼릭스의 맥박이 급격히 안정되며, 그의 피부를 덮고 있던 푸른 성에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알림: 고객 칼릭스 벨베데르의 결핍도가 60%로 감소했습니다.] [영지 정화율이 1.2% 상승합니다. 제과점 결계가 임시 강화됩니다.]

웅성거리며 문을 부술 듯 긁어대던 문밖의 기이한 소음이, 강화된 결계의 장벽에 부딪혀 비명과 함께 서서히 멀어졌다. 마기에 오염된 추격자들이 결계를 뚫지 못하고 퇴각한 것이었다.

에일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명 마력을 소모한 대가로 온몸이 녹아내릴 듯 피곤했지만, 최악의 위기는 넘겼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 * *

다음 날 아침, 폭풍우가 지나간 엘도라도 영지에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내려앉았다. 밤새 내린 눈이 지붕 머리마다 소복하게 쌓여, 마치 하얀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거대한 케이크처럼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으음…….”

간이침대 위에서 나직한 신음과 함께 칼릭스가 눈을 떴다. 그는 낯선 천장과 코끝을 스치는 달콤하고 알싸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거 원, 지옥 길목인 줄 알았더니 단내가 진동하는 천국이었군.”

“천국 치고는 청구서가 꽤 무거울 텐데요, 대공 전하.”

카운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일린은 깃펜을 든 채 장부를 탁 덮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사무적이었다.

칼릭스는 상체를 일으키며 제 몸을 살폈다. 밤새 괴롭히던 빙독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에일린에게 다가왔다.

“단내가 나는 가시나무 양이 날 구해준 건가? 은혜를 입었으니 이 몸으로라도 갚아야겠군. 결초보은이라고 하지 않나?”

“몸으로 때우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철저하게 금전으로 계산하죠.”

에일린은 미리 작성해 둔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진저 스콘 특제 해독 마력 처방 비용 100골드, 야간 응급 간호 비용 50골드, 그리고 어제 제 목을 조르며 가하신 신체적·정신적 위해에 대한 위자료 300골드. 도합 450골드입니다. 세금은 별도고요.”

터무니없는 액수였지만, 에일린의 눈은 진지했다. 그녀는 칼릭스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 속 정보에 따르면, 그는 전쟁 영웅이지만 영지 재정을 메우느라 늘 적자에 시달리는 탈탈 털린 대공이었으니까.

칼릭스는 청구서를 보더니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주머니를 털어 보였다. 먼지만 털털 털려 나왔다.

“아아, 무자비한 레이디 같으니. 전쟁터에서 구른 군인에게 이런 거금은 없다네. 대신 아주 튼튼한 몸뚱이와 뛰어난 손재주가 있지. 접시라도 닦아 몸값을 갚겠다네.”

“대공 전하를 제과점 잡역부로 쓰라고요?”

“왜 안 되겠나? 시급은 적당히 쳐 주게나. 이래 뵈도 내 검술만큼이나 설거지 실력도 일품이거든.”

칼릭스는 뻔뻔하게 윙크를 해 보였다. 에일린은 그의 능글맞은 태도가 가증스러웠지만, 머릿속 계산기는 빠르게 두드려졌다. 제국 최고의 무신이 내 제과점의 앞치마를 두르고 일한다면? 그것만큼 든든하고 확실한 방패는 없었다. 게다가 사채업자들이나 가문의 추격자들이 감히 대공이 지키는 가게를 건드릴 수는 없을 터였다.

“좋습니다. 철저히 계약 관계로 움직이죠.”

에일린은 즉석에서 고용 계약서를 작성했다.

“시급은 동화 5닢. 하루 8시간 근무. 주 업무는 무거운 밀가루 포대 나르기, 화덕 불 조절, 그리고 주방 설거지 및 청소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전혀 없지. 고용주님.”

칼릭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깃펜을 받아 사인을 갈겨썼다.

잠시 후, 제과점 ‘안식의 단향’ 뒷마당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제국을 호령하며 마수들을 도륙하던 전쟁 영웅, 칼릭스 벨베데르 대공이 레이스가 화사하게 달린 꽃분홍색 앞치마를 야무지게 두른 채 마당에 서 있었다.

“고용주님, 이 포대들을 저기 창고로 옮기면 되나?”

칼릭스는 한 포대에 50킬로그램은 족히 나가는 거대한 밀가루 포대 세 개를 한꺼번에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웃어 보였다. 그의 탄탄한 팔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 레이스 앞치마가 펄럭였다.

“네, 조심해서 옮기세요. 가루 날리면 감봉입니다.”

에일린은 카운터에 기대어 문을 빼꼼 열고 차갑게 명령했다.

지나가던 영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춘 채 눈을 비볐다. 제국의 무신이 앞치마를 두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밀가루를 나르고 있다니! 영민들의 입이 떡 벌어졌고, 그들의 경외 어린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런 대공을 채찍질하듯 부리는 에일린에게로 향했다.

“역시 ‘안식의 단향’ 주인장은 보통 분이 아니야…….”

“대공 전하를 하인처럼 부리다니, 마법사임이 틀림없어!”

영민들 사이에서 에일린의 위상이 단숨에 신화적인 수준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정작 에일린은 그들의 오해 섞인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부에 적히는 ‘고객 만족도 및 노동 효율성’ 수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정오가 지나 눈보라가 완전히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을 때, 딸랑이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제과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에일린의 인사가 도중에 멈췄다.

들어선 사내는 낡은 갈색 코트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의뭉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매서운 눈초리로 가게 내부를 훑어보더니,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잭. 가문에서 에일린의 뒤를 캐기 위해 보낸 은밀한 스파이이자 첫 손님이었다.

“허어, 이런 척박한 영지에 이런 그럴듯한 제과점이 있을 줄이야.”

잭은 진열대에 놓인 쿠키들을 건성으로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카운터에 쾅 내려놓았다. 황금들이 부딪히며 짤랑이는 무거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있는 쿠키와 빵을 전부 싹쓸이하지. 돈은 아쉽지 않게 쳐줄 테니, 당장 포장해 주시겠나?”

황금 한 자루. 보통의 제과점 주인이라면 눈이 뒤집힐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에일린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잭을 응시했다. 무조건적인 호의와 과도한 대가는 반드시 독을 품고 있는 법이었다.

[손님: 잭 (위장된 신분)] [결핍도: 10% (탐욕 및 악의)] [경고: 손님의 의도에 순수한 구매 목적 외의 음모가 감지되었습니다.]

제과 장부가 붉은색 경고 마크를 띄웠다. 에일린은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1인당 구매 제한이 있습니다. 다른 영민분들도 드셔야 하니까요.”

“돈을 더 얹어주겠다는데도 거절하는 건가? 장사꾼이 맞는지 의심스럽군.”

잭은 혀를 차며 에일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진열대 반대편으로 걸어가 질문을 던졌다.

“이 쿠키는 재료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그가 질문을 던지며 에일린의 시선이 잠시 돌아간 찰나, 잭의 손가락이 코트 안감 속으로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는 품에 숨겨두었던 얇은 가죽 장부 한 권을 꺼내어, 카운터 옆 장식장과 벽면 사이의 어두운 틈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것은 가문의 적녀이자 에일린의 언니인 릴리안의 낙인이 선명하게 찍힌 ‘위조 제국 세무 세출 내역 장부’였다. 에일린에게 세무 조작 누명을 씌워 제과점의 상표권과 영지 지배권을 통째로 빼앗기 위해 미리 파묻어두는 덫이었다.

동시에, 잭은 눈치를 살피며 비열하게 웃었다.

“뭐, 파는 만큼만 사지. 대충 포장해 주시오.”

에일린은 그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척,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잭은 황금 몇 닢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미련 없이 제과점을 빠져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손님.”

에일린은 잭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가 남긴 황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방금 전 잭이 서 있던 자리, 그리고 장식장 틈새에서 기이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우웅-!

갑자기 가게 내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잭이 밀어 넣은 가짜 장부 내부 깊숙이 숨겨져 있던 은밀한 마력 추적술식이 붉게 빛나며 깨어나고 있었다. 그 술식은 불길한 뱀처럼 퍼져나가며, 에일린의 ‘안식의 단향’이 가진 따스한 정화 결계의 마력을 기습적으로 변조하고 갉아먹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종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격렬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븐 속의 불꽃이 순식간에 푸른빛으로 변하며 사납게 요동쳤다.

“이건……!”

에일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화 영역이 오염되며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다시금 밀려왔다. 단순한 세무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제과점의 정화 결계를 통째로 무너뜨리려는 음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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