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닿은 입술은 지독하게 서늘했으나, 그 너머로 전해지는 숨결은 델 듯이 뜨거웠다.
“날 위해 절대 죽지 말거라, 엘디아.”
유제스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것처럼 낮고 위태로웠다. 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엘디아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에 끼어 있는 묵직한 오리하르콘 마스터 열쇠가 징그러울 정도로 차가운 현실감을 선사했다.
심장이 흉통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쇄골 아래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낙인이 불에 달군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릿하게 부풀어 올랐다.
[시스템 경고: 대상의 감정 동조율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현재 동조율: 49.2%] [남주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요동칩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홀로그램 상태창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엘디아는 후끈 달아오르는 뺨을 감추려 짐짓 콧방귀를 뀌며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은사로 화려하게 자수 놓인 그의 벨벳 코트가 손끝에 까슬하게 닿았다.
“공작님, 방금 그건 제법 비싼 스킨십이었는데요. 위자료 계약서에 ‘신체 접촉 건당 추가금’ 조항이라도 신설해야겠어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지. 내 심장을 꺼내 가겠다는 계약서라도 들고 오면 기꺼이 지장을 찍어 줄 테니.” “말은 참 청산유수시네요. 이 무거운 열쇠나 잘 챙기세요. 제가 다 들고 야반도주해 버리면 북부 전체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도망칠 수 있다면 해 봐라. 네 발목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라도 채워서 내 침실 기둥에 묶어 둘 테니까.”
유제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짙고 어두웠다. 엘디아는 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며 짐짓 손가락으로 마스터 열쇠를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사슬이라니,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 속박되는 건 질색이라서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디아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타인의 다정한 호의를 믿지 않는 그녀였지만, 유제스의 이 비뚤어진 집착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진실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흑장미 성의 지하 알현실은 얼음장 같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바닥에는 공작가의 전속 주치의였던 바벨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검은 갑주를 입은 르나르와 기사들이 검 자루를 쥔 채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바벨.”
엘디아가 차가운 대리석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짙은 청색의 벨벳 드레스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심해처럼 일렁였다.
“공작님의 두통을 완화해 준다던 그 특별한 진통 촉진제 말이에요. 아직도 그게 신의 은총이 담긴 영약이라고 우길 셈인가요?” “부, 부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직 공작 가문의 안녕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의원입니다!”
바벨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엘디아의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은 이미 모든 진실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다.
[아이템 정보: 레테의 눈물 (적색 위협)] - 분류: 만성 지연성 독약 - 효과: 복용 시 일시적으로 마력을 안정시키는 듯하나, 장기 복용 시 신경계를 파괴하고 환각 및 우울증을 극대화하여 자멸적 광증을 유발함. - 출처: 제국 황실 특제 가공품.
엘디아는 조용히 손짓했다. 시녀가 은반지 위에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푸른색 약물을 서너 방울 가만히 떨어뜨렸다. 유제스가 매일 밤 복용하던 바로 그 약물이었다.
치이익-!
맑고 깨끗한 은식기 표면에 약물이 닿자마자, 기괴한 보랏빛 연기와 함께 은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며 부식되기 시작했다. 지독한 썩은 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게 은식기의 변색을 막기 위해 특수 마법까지 걸어둔 ‘레테의 눈물’이라는 독약이에요. 황실에서 매달 비밀리에 전수받아 공작님께 먹여 온 개 같은 음모의 결과물이죠.”
엘디아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매섭게 바벨의 귓가를 때렸다.
“공작님이 밤마다 겪던 그 지옥 같은 고통의 원인이 바로 당신 손에서 나왔어. 그런데도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를 바라는 건가요?” “그, 그것은……! 황태자 전하께서 가문을 지켜주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벨이 마침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바닥을 기었다.
“르나르.” “예, 부인.”
르나르가 즉시 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 끝이 바벨의 목덜미를 스치며 미세한 핏방울을 터뜨렸다.
“이 배신자를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세요. 빛 한 줌,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황실의 연락책이 누군지 전부 불 때까지 뼈를 깎아내도 좋아요.” “명령 받들겠습니다.”
르나르의 냉혹한 대답과 함께 바벨은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다. 그가 끌려 나간 자리에 남은 검붉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엘디아는 품속에 감춰둔 가방을 무의식적으로 만져보았다. 그 안에는 베르제 백작부인이 쥐여 주었던 비취 흑장미 빗이 들어 있었다.
‘그 빗속에도 치명적인 신경 가스 침이 숨겨져 있지.’
가문의 추악한 음모가 떠오르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황실과 백작가의 목을 죌 덫을 하나씩 놓아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예기치 못한 비보가 공작성을 흔들었다.
“부인! 큰일났습니다! 북부 관문을 장악한 황실 보급 기지에서 공작가의 ‘저주 전염’을 핑계로 소금과 식수 공급망을 전면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정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 뭉치를 들고 달려왔다. 엘디아는 아침 식사로 준비된 갓 구운 빵을 입에 물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주 전염? 그런 터무니없는 핑계로 생필품을 막겠다고요?” “예! 황태자 전하의 직속 통상 관리관이 공작성 정문 앞까지 들이닥쳐 압류 집행장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당장 영지민들이 먹을 소금이 사흘 치도 남지 않았습니다!”
소금과 물은 생존의 기본이다. 이를 통제해 북부 영민들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공작가를 고립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황태자 줄리안의 야비한 수작이 분명했다.
엘디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백색 실크 블라우스 위에 붉은 장미 자수가 놓인 벨벳 코트를 덧입었다.
“안 되겠네요. 손님 대접을 아주 톡톡히 해 드려야겠어요.”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묵직한 카르텐 마스터 열쇠를 꽉 쥐었다. 이 열쇠가 있다면 공작가의 숨겨진 모든 비축 창고를 열 수 있었다.
공작성 정문 앞, 황태자가 파견한 통상 거래 제재 관리 공무원 ‘바르트’가 거만한 태도로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화려한 금빛 견장을 단 제복을 입고 코방귀를 뀌어댔다.
“북부의 괴물들이 쓰는 물과 소금에 저주가 깃들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소! 황실의 안전을 위해 정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보급망을 동결한다! 이 압류장에 서명하시오!” “그 압류장, 찢어서 당신 입에 쑤셔 넣어 드려도 되나요?”
맑고 꼿꼿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벽 위에서 걸어 내려오는 엘디아에게 쏠렸다. 그녀의 뒤로는 르나르를 비롯한 공작가 정예 기사들이 위압적인 기세로 호위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카르텐 공작은 어디 가고 웬 계집이…….” “이 성의 안주인이자, 북부 영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엘디아 카르텐이다.”
엘디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르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르트가 쥐고 있던 압류장을 휙 낚아채 정밀하게 훑어보았다.
“제국 통상법 제47조. ‘영지의 전염병 및 재해 발생 시 황실은 일시적으로 유통을 제한할 수 있다.’라…… 아주 법 공부를 열심히 하셨네요?” “흐흥, 법을 안다면 군말 없이 따르시지?” “하지만 제국 연방법 제104조도 읽어보셨어야죠, 바르트 경.”
엘디아의 말에 바르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연방법 제104조에 따르면, ‘명확한 마법적·의학적 검증 없이 영지의 생필품 유통을 강제로 차단할 경우, 이는 영지민에 대한 고의적 학살 행위로 간주하여 해당 관리를 즉시 직위 해제하고 가산 전체를 몰수한다’고 되어 있어요. 게다가……”
엘디아는 마스터 열쇠를 들어 올리며 통쾌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들이 소금줄을 막으면 우리가 굶어 죽을 줄 알았나 본데, 미안해서 어쩌죠? 카르텐 공작가 지하에는 지난 50년간 비축해 둔 최고급 암염과 식수 정화 마석이 썩어 넘쳐나도록 쌓여 있거든요.”
그녀는 행정관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지금 즉시 지하 3번과 5번 창고를 개방하세요! 보관 중이던 가공 암염 5만 톤과 정화 마석을 영지 내 모든 마을에 보들보들하고 깨끗하게 정제해서 무상으로 방출합니다! 단 한 명의 영민도 소금과 물 때문에 곤경을 겪지 않게 하세요!” “예, 예! 부인! 즉시 집행하겠습니다!”
행정관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갔다. 영지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르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무슨……! 황실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거부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그 초라한 압류장 자체가 무효라는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겠다는 거예요. 횡령, 직권남용, 그리고 불공정 거래 제재법 위반으로 당신과 당신 배후의 부서를 제국 최고법원에 정식 고소하겠습니다.”
엘디아는 품에서 미리 작성해 둔 고소장을 꺼내 바르트의 가슴팍에 팍 꽂아 넣었다.
“변호사 선임 비용과 영지 손해배상 청구액은 대략…… 금화 10만 개 정도 되겠네요. 당신 가문이 파산하는 꼴을 아주 즐겁게 구경해 주겠어요. 당장 이 더러운 발치들을 치우고 북부에서 꺼지세요!”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대지를 울렸다. 그 위압감에 질린 바르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고, 부하들과 함께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공작부인 만세!”
광장을 가득 메운 영민들이 엘디아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녀는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보람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런 그녀의 야무진 등 뒤로,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서늘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유제스였다.
그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영지민들을 진두지휘하는 엘디아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차갑게 굳어 있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시스템 알림: 남주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가 15% 상승합니다!] [현재 호감도: 65%] [남주의 심리 상태: ‘이 기묘한 여자가 내 어두운 성에 봄볕을 몰고 온다. 빼앗기기 싫다. 더 깊이 얽매고 싶다.’]
유제스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에 붉은 여우 모피 망토를 다정하게 덮어주었다.
“제법이군. 황실의 개들을 법률로 패 죽일 생각은 나도 해보지 못했다.” “무력으로만 해결하려 하니까 맨날 반역자 소리를 듣는 거예요, 공작님. 가끔은 머리를 써야죠.” “머리를 쓰는 건 네 역할로 충분하다. 나는 그저 네가 가리키는 자들의 목을 베면 될 뿐이지.”
그의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듯 속삭였다.
단순히 계약 관계라 하기엔 너무나도 깊고 무거운 시선이었다. 엘디아는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묘한 텐션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평선 너머, 북부의 혹한을 뚫고 붉은 노을이 피비린내 나게 번져가고 있었다. 흑장미 성벽을 단단히 휘감고 있던 검은 가시나무 수풀들이, 머나먼 남쪽에서 밀려오는 이질적이고 신성한 거대한 기운에 눌려 잎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검게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다.
황태자 줄리안의 군대가, 그리고 그가 부리는 신성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징조였다.
그때, 공작가의 전령이 헐떡이며 엘디아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는 베르제 백작가문의 붉은 뱀 인장이 찍힌 비밀 친서가 들려 있었다.
“부인! 베르제 백작가로부터 극비리에 송신된 긴급 친서입니다! 오직 부인만이 개봉하셔야 합니다!”
엘디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를 받아 들어 봉투를 찢었다.
바스락대며 펼쳐진 종이 위에는, 그녀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오만하고도 잔혹한 황태자의 음모가 적혀 있었다.
[엘디아. 황태자 전하께서는 네가 유제스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는 ‘동조의 저력’을 가졌음을 이미 간파하셨다. 네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는 그 검은 흑장미 낙인이 결국 너를 불태워 죽이겠지. 살고 싶다면, 유제스를 안심시키고 그의 심장 밑바닥에 흐르는 ‘황혈의 지하실 열쇠’와 황제의 피를 훔쳐 오너라. 그리하면 네 낙인을 완전히 지우고 고통을 끝내줄 만병통치 해독제를 내리겠다. 거부할 시, 북부 전체를 이단으로 규정해 쓸어버릴 것이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엘디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비밀을, 그리고 목숨을 갉아먹는 동조의 낙인의 존재를 황태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잔혹한 뒤거래 제안이었다.
엘디아는 서서히 다가오는 거대한 파멸의 그림자를 느끼며, 저 멀리 붉게 타들어 가는 하늘을 묵묵히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