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종이 쪼가리가 손아귀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밤하늘을 그대로 베어 물어 만든 것 같은 짙푸른 실크 드레스 자락이 분노로 파르르 흔들렸다. 목덜미를 촘촘하게 감싼 검붉은 벨벳 초커가 유독 목을 조여오는 듯 답답했다. 초커 아래 숨겨진, 목줄기까지 뻗어 올라온 검은 흑장미 낙인이 화끈거리며 맥박쳤다.
황태자 줄리안. 이 미친 인간이 결국 내 목숨줄을 쥐고 흔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황태자의 개가 보낸 친서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어내렸다. 유제스가 천천히 다가와 내 어깨 위로 붉은 여우 모피 망토를 덮어주던 손길 그대로, 내 손에 쥐인 구겨진 편지봉투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적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번뜩였다.
“내용이 제법 흥미로운 모양이지, 엘디아? 얼굴색이 아주 볼만해.”
“흥미롭다기보다는…… 가소롭네요.”
나는 콧방귀를 퉤 뀌며 구겨진 편지를 그대로 벽난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불꽃이 순식간에 종이를 집어삼키며 붉은 혀를 낼름거렸다. 파스스 타들어 가는 재를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창의적인 협박을 보내셨더라고요. 내가 공작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는 ‘동조의 낙인’을 가졌다는 걸 눈치채셨다면서요.”
“……뭐라 고?”
순간, 유제스의 주변으로 기류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콰르릉, 성벽을 치는 북부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운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가짜 주치의 바벨이 주던 만성 독약 ‘레테의 눈물’을 끊은 지 겨우 이틀째였다. 아직 그의 몸 안에는 억눌리지 못한 어둠의 마력이 시한폭탄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 눈앞에 즉각 시스템 창이 팝업되며 붉은 경고등을 찌릿찌릿 대대적으로 울려댔다.
[★ SYSTEM WARNING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정신 불안도가 급상승합니다! (불안도: 89%) 공작의 내면 상처 ‘가문의 전멸과 배신’이 공명 가이스트 현상을 유발합니다. ※ 경고: 시스템을 통해 남주의 감정을 강제 억제하거나 정보를 열람할 시, 고통 동조율에 따른 극통이 사용자에게 즉시 전이됩니다!
윽. 가슴속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찌릿하게 밀려왔다. 쇄골 아래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문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꿈틀대며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지로 비명을 삼켰다.
고통 동조율 48%. 이제는 그가 느끼는 정신적 붕괴의 잔해마저 내 육체적 통증으로 고스란히 치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를 장기판의 소모품으로 쓰려는 황태자나, 날 옭아매려는 백작가 놈들에게 놀아나느니 차라리 이 고통을 비웃어 주리라.
“겁먹을 것 없어요, 유제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검지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매끄러운 제복 실크 너머로 단단한 근육과 거칠게 뛰는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멍청한 줄리안은 내가 살고 싶어서 공작님의 심장 밑바닥에 흐르는 황혈의 지하실 열쇠를 훔쳐 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나 봐요. 몸에 좋은 만병통치 해독제를 주겠다면서.”
“……너를 살릴 해독제를?”
“참나, 그 가스라이팅 전문가 말을 누가 믿는답니까? 제 목숨은 제 거고, 이 공작가는 장차 내가 뜯어내야 할 거대한 노다지 상속지인데, 감히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들어요? 내 구역 침범은 절대 못 참죠.”
내 통통 튀는 대꾸에 유제스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의 입술 끝이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올라갔다. 집착과 소유욕으로 얼룩진 눈빛이 내 얼굴 구석구석을 핥듯이 쓸어내렸다.
“그래. 너는 내 반려이자, 이 성의 주인이니까.”
“말은 바로 하셔야죠. 계약상 임시 부인 겸 동업자예요.”
“상관없다. 네가 나를 뜯어먹든, 내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든. 하지만 나 외의 다른 자가 너를 위협하는 건 용납하지 않아.”
그의 낮고 매혹적인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거대한 맹수 같았다.
* * *
그날 밤.
슈바르츠발트의 혹한은 흑장미 성의 창문을 깨부술 듯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성벽을 뒤덮은 검은 가시나무넝쿨들이 바람을 맞아 스르륵-스슥 기괴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아늑한 벽난로가 타오르는 침실 안, 화려하게 조각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벨벨 부드러운 감촉의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손에 든 비취 흑장미 빗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제국을 떠나 이 지옥 같은 북부로 유배당하듯 끌려올 때, 나의 계모 베아트리스 베르제가 자식 걱정하는 척하며 억지로 내 손에 쥐여준 물건이었다.
[★ SYSTEM ITEM INFO ★] [베르제 가문의 비취 흑장미 빗] - 분류: 살상용 마도구 - 상세: 빗등의 장미 문양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면, 내부의 고압 스프링이 작동하여 ‘치명적 신경 마비 가스’와 함께 미세한 독침 수십 개가 전방으로 살포됩니다. - 현재 상태: 장전 완료.
“베아트리스, 늙은 여우 같은 년.”
나는 빗끝의 차갑고 매단단한 비취 질감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조용히 웃었다. 나를 유제스의 손에 죽게 만들거나, 여차하면 이 독침으로 유제스를 찌르고 자결하라는 뜻으로 쥐여준 독가시였다. 하지만 그 비열한 음모는 이제 내 손에서 완벽한 살상 무기로 리버스 카운터를 날릴 도구가 될 터였다.
그때였다.
스산한 바람 소리 사이로, 아주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스슥, 슥.
일반적인 시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살기를 죽인 채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전문 살수들의 움직임.
창문 틈새로 차가운 서리가 흘러 들어오더니, 이내 텅-! 하는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통째로 박살 나며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빛 달빛을 받으며 시커먼 가죽 갑옷을 입은 괴한 수십 명이 침실 안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베르제 백작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뱀의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과연 여기 숨어 있었군, 가문의 수치.”
선두에 선 살수가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뽑아 들며 기괴하게 웃었다.
“황태자 전하의 자비를 거절하고 공작의 품에 안겨 꼬리를 흔들다니. 베르제 백작부인께서 네년의 목을 가져오라 하셨다. 순순히 대가리를 내놓아라!”
수십 명의 살수들이 나를 겹겹이 포위했다. 칼날들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보통의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쳤을 상황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화장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대체 베르제 가문은 매번 왜 이렇게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네.”
“뭐라 고?”
“그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살수들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니. 돈 아까운 줄을 몰라요, 정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비취 흑장미 빗을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빗등의 장미 문양을 오른쪽으로 세 번 힘차게 비틀었다.
태엽이 풀리는 듯한 예리한 소리와 함께-
치이이이이익-!
빗의 미세한 구멍들 사이로 자욱한 보랏빛 신경 가스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화장실 소독제보다 백 배는 더 독한 냄새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커헉! 끄아악!”
“이, 이게 무슨……! 눈이, 눈이 안 보인다!”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살수들은 칼을 떨어뜨린 채 자신들의 눈과 목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베아트리스가 나를 죽이기 위해 정밀하게 설계해 둔 신경 가스 침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흡입하는 즉시 시신경이 마비되고 전신의 근육이 경직되는 극독이었다.
“콜록! 도망쳐! 일단 퇴각한 다!”
살수들의 수장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마비된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치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나는 가볍게 실크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그들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 나갔다.
“어머, 내 집인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손님 대접도 안 끝났는데.”
복도로 도망친 살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안식이 아니었다.
흑장미 성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은 가시나무줄기들이 기괴한 마력을 뿜어내며 복도 벽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슈바르츠발트의 어둠을 먹고 자란 가시덤불들이 굶주린 뱀처럼 살수들의 발목과 몸통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스르륵, 파스스!
내 어깨 위로 공작가의 수호 정령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으며 나타나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미 나를 카르텐 가문의 ‘진정한 반려’로 인정한 정령들은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전부 으깨버려.”
내 나지막한 명령에 가시나무줄기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콰드득! 빠드득!
“아아아악! 살려줘! 뼈가, 뼈가 으스러진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
숨이 넘어가는 처절한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단단한 뼈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경쾌하게 터져 나왔다. 살수들은 가시넝쿨에 온몸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피를 토해냈다.
바로 그 순간, 복도 끝의 육중한 철문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날아갔다.
콰아아앙-!
폭풍 같은 기압차와 함께, 피비린내를 풍기는 검은 마력의 폭풍이 복도를 쓸어버렸다. 그 폭풍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이성을 잃은 한 마리의 야수였다.
유제스 카르텐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피로 물든 전쟁터처럼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손에 쥔 거대한 마검에서는 검은 피 분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엘디아……!”
유제스는 내 이름을 울부짖으며 폭풍처럼 대지를 가르고 달려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살아남아 허덕이던 살수들이 그 기세만으로도 숨을 쉬지 못하고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는 단숨에 내 앞을 가로막아서더니, 거친 손길로 내 어깨를 붙잡아 자신의 넓고 단단한 등 뒤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다친 곳은? 피는? 어디를 다친 거지? 말해, 엘디아!”
그의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는 광기에 가까운 극도의 불안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자멸적인 두려움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전 아주 멀쩡해요, 유제스. 탄내 나는 가스 좀 마신 것 빼고는요.”
내 대답에도 유제스의 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이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살수들에게 닿자, 눈동자가 기괴하게 수축했다.
“감히. 내 성에 기어들어 와 내 것을 탐해?”
그가 검을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찰나의 순간, 가시덤불에 묶여 있던 살수 서너 명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피가 복도 벽면을 붉게 적셨다. 유제스는 내게 피 한 방울이라도 튈세라, 거대한 검은 마력의 장막을 펼쳐 나를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커흑……!”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숨을 헐떡이던 살수들의 수장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그의 단궁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황태자와 백작가가 보낸 무자비한 최고 실력의 살수 수십 명이, 겨우 몇 분 만에 차가운 시체가 되어 복도 바닥을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감싼 유제스의 마력 장막을 걷어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밤하늘빛 실크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걷어 올린 채,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살수 수장의 머리를 가죽 구두 굽으로 지긋이 짓밟았다.
꾸욱.
“아아악……!”
“들었지? 황태자의 충견치고는 이빨이 너무 부실하네.”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기어코 뼈가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밟아 뭉개며,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이깟 버러지들을 보내서 나를 협박하려 했다니, 줄리안 전하께서도 참 보는 눈이 없으셔. 안 그래요, 공작님?”
단 한 줌의 두려움도 없이, 오히려 시체를 밟으며 오만하게 웃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유제스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지독한 집착이 대기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 SYSTEM INFO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호감도: 72%) 내면의 상태: ‘이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조차 함께 피를 흘리며 웃어주는 유일한 구원자. 절대로, 죽어도 놓아주지 않겠다.’
그의 상태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훌륭한 반응이었다. 가문의 잔해 위에서 춤추는 그림자처럼, 우리는 서로의 광기를 먹고 살아가는 위태로운 동반자였다.
하지만 사이다 같은 승리의 여운도 잠시.
갑자기 유제스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이 벤 살수의 검날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이 굳어 들어가더니, 검끝에 묻은 보랏빛 액체를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며, 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폭압이 뿜어져 나왔다.
“이 독은…….”
유제스의 목소리가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레테의 눈물’의 원액…… 황실 특제의 맹독이다.”
그것은 과거 카르텐 가문의 모든 이들을 미치게 만들어 몰살시켰던, 그리고 주치의 바벨을 통해 매일 밤 유제스 자신에게 먹여왔던 그 비열한 황실의 특제 독액이었다.
황태자 줄리안의 가문이 직접 공작가를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추악한 진실의 꼬리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정밀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