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하지만 기쁨도 잠시, 흑장미 성 관할 관문인 침엽수 성벽 너머에서 황태자 줄리안이 보낸 특사단이 이끌고 온 은빛 수레단이 뱀처럼 밀려드는 광경이 창밖으로 선명히 들어온 순간, 엘디아의 쇄골 아래가 찌르르하게 타올랐다.

살을 에는 듯한 북부의 칼바람을 뚫고 들어온 불청객들의 마차는 눈부신 은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음울한 흑장미 성의 회색빛 풍경 속에서, 황실의 상징인 황금 사자 깃발은 오만하게 펄럭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침입자들을 환영하지 않는 성의 기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당당하게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벌써 들이닥칠 줄이야. 줄리안,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해.”

엘디아는 차가운 창문틀을 꽉 움켜쥐었다.

왼쪽 쇄골 밑에서 시작된 검은 가시덤불 낙인이 피부를 짓이기듯 뜨겁게 요동쳤다. 방금 전 시스템이 띄운 경고창이 눈앞에서 붉게 깜빡거렸다. 동조율 25% 돌파. 수명 6개월 감축.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잔인한 수치였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이 시리도록 차가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저 황태자의 뱀 같은 무리를 우아하게 짓밟아 주려면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엘디아는 시녀들이 가져온 가장 화려하고 단단한 의복을 골랐다.

두꺼운 밤하늘빛 벨벳 드레스는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묵직한 소리를 냈고, 소매 끝에는 은실로 촘촘하게 수놓인 레이스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대조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을 완전히 감싸는 빳빳한 초커였다. 굵은 남양진주가 촘촘히 박힌 실크 초커는 쇄골 아래서부터 목덜미까지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검은 가시덤불 문양을 완벽하게 감추어 주었다.

거울 속의 엘디아 베르제는 더 이상 백작가에서 학대받던 나약한 서녀가 아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북부의 안주인이었다.

“가볼까. 어떤 기만전술을 들고 왔는지.”

그녀는 머리를 높이 쓸어 올리며 차가운 복도로 나섰다.

* * *

흑장미 성의 대만찬장은 평소의 고요함을 잃고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길게 뻗은 흑요석 테이블 위에는 북부의 특산물인 붉은 사슴 고기와 독한 벌꿀주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테이블의 상석에는 유제스 카르텐 공작이 앉아 있었다. 옷깃에 은색 늑대 문양의 브로치를 단 검은 제복 차림의 그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정교한 조각상처럼 차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디아는 볼 수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미세하게 일렁이는 검붉은 마력의 파동을. 유제스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달해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황태자가 파견한 특사단의 수장, 바실 백작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화려한 금실 자수가 놓인 황실 예복을 입은 그는 북부의 거친 음식을 대놓고 멸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은식기를 만지작거렸다.

엘디아가 만찬장에 들어서자, 유제스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로 쏠렸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찰나의 흔들림이 스쳤다.

“늦었군, 엘디아.”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기에 단장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답니다, 공작 전하.”

엘디아는 유제스의 옆자리에 우아하게 앉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실 백작이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이죽거렸다.

“과연 소문대로군요. 베르제 백작가의 귀한 영애께서 이 황량한 북부 성의 안주인 노릇을 이토록 훌륭히 해내고 계실 줄이야. 황태자 전하께서도 무척이나 염려하고 계십니다.”

바실은 슬며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탐색과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특히나…… 시한부나 다름없는 공작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한때 황태자비 후보 중 가장 유력했던 분이 이곳에서 시들어 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셨지요.”

그 순간, 만찬장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유제스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식탁 아래로 뻗어 나가는 검은 그림자가 바실의 발밑까지 닿을 듯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특사단의 목을 베어 넘길 것 같은 살기였다.

하지만 바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척, 혹은 오히려 도발하려는 듯 품속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한 통을 꺼내 테이블 밑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사적으로 주신 밀서입니다. 베르제 영애에 대한 전하의 자비로운 제안이 담겨 있지요. 현명한 분이시라면 어떤 선택이 스스로를 구하는 길인지 잘 아실 텐데.”

밀서에는 황태자 줄리안의 가스라이팅과 협박, 그리고 유제스를 독살하라는 은밀한 지령이 담겨 있을 게 뻔했다. 원작에서 엘디아를 파멸로 이끌었던 바로 그 올가미였다.

엘디아는 입꼬리를 조용히 올렸다. 그녀의 손이 바실이 내민 밀서 위로 향하는가 싶더니, 잔잔하게 조율된 움직임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붉은 포도주 잔을 툭 쳤다.

쨍그랑-!

“아앗, 이런. 제 손이 미끄러졌군요.”

진득하고 붉은 포도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실이 건넨 밀서는 포도주에 완벽하게 젖어 들어, 붉은 밀랍 봉인마저 흉하게 녹아내리며 글씨가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바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지금 무슨 짓을……!”

“어머, 백작님. 귀한 포도주를 낭비해 버렸네요. 하지만 어쩌죠? 이미 더러워진 종이는 북부의 거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어울리는 법이랍니다.”

엘디아는 젖어 버린 밀서를 손끝으로 짚어 타오르는 벽난로 안으로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화르륵 불꽃이 일며 황태자의 비열한 음모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너, 너……!”

바실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가락이 엘디아를 가리키며 부르르 떨렸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친서를 훼손하다니! 이는 황실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자 반역이다!”

* * *

“모독?”

낮고 서늘한 음성이 대만찬장을 지배했다.

유제스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기류가 만찬장 전체를 압도했다. 공작가의 가주로서 지닌 어둠의 마력이 가시 넝쿨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벽에 걸린 촛대들을 산산조각 냈다.

파스스, 쨍강!

유제스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는 광증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의 심장에 각인된 저주가 날뛰며, 황실에 대한 억눌린 증오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만약 여기서 유제스가 특사를 죽인다면, 황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북부를 침공할 터였다. 파멸 루트의 시작이었다.

‘안 돼. 여기서 폭주하게 둘 순 없어.’

엘디아는 침착하게 식탁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칠게 요동치는 유제스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꽉 맞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매며, 그의 단단한 조끼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엘디아의 머릿속이 번개를 맞은 듯 쪼개지는 극통이 밀려왔다.

“아……!”

[경고: 대상의 광증 및 저주 통증 동조 시작!] [실시간 고통 동조율: 45%] [경고: 영혼의 훼손이 감지됩니다. 극심한 신경통이 유발됩니다.]

뇌가 불타오르고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유제스가 매일 밤 견뎌내고 있는, 황실의 저주가 주는 피비린내 나는 살의와 절망이 그녀의 신경계를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목구멍으로 비명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엘디아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참아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제스를 바라보며, 오히려 그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그러니까 멈춰, 유제스.’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제스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엘디아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을 향했다. 그녀가 자신 대신 이 지독한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유제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검은 기류가 거짓말처럼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엘디아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참으며, 허공에 띄운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특수 정보 열람: 황태자 특사단장 '바실'의 숨겨진 비밀] [열람 대가: 고통 동조율 10% 추가 상승]

‘열어. 당장!’

머릿속에서 혈관이 터지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삐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상태창의 텍스트가 그녀의 망막에 박혔다.

[정보: '바실'은 실제 백작이 아닌, 황태자 줄리안이 신분을 세탁해 준 가짜 귀족이다. 본명은 '토마스', 제국 변방의 도굴꾼 출신이며 황실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사냥개다. 그의 품속에는 위조된 귀족 면허증이 들어 있다.]

정보를 확인한 엘디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통으로 허덕이면서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승기를 잡은 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유제스의 개인 약병을 곁눈질했다. 유제스가 한밤중에 먹는 유일한 진통 촉진제. 상태창의 경고에 따르면, 그것은 가짜 주치의가 황실의 사주를 받아 바친 ‘우울증 심화 만성 독약’이었다. 은식기가 변색하지 않는 교묘한 약물.

엘디아는 그 약병을 슬며시 자신의 소매 속으로 찔러 넣었다. 나중에 가짜 주치의의 목을 날려버릴 확실한 물증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둔 계모 베아트리스의 ‘비취 흑장미 빗’ 속 독침도 떠올렸다. 황실의 사냥개들을 처리할 도구는 차고 넘쳤다.

* * *

엘디아는 하얗게 질린 입술을 열어, 만찬장에 차갑게 내리꽂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실에 대한 모독이라니요? 오히려 황실이 우리 카르텐 공작가와 제국의 법을 모독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토마스’ 씨?”

바실 백작, 아니 토마스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

“무슨……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제국 법전 제3조 17항. 황실의 허가 없이 타인의 신분을 위조하거나 가짜 귀족 면허를 행사하는 자는 국경 기망죄 및 반역죄로 다스린다.”

엘디아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벨벳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위압적인 소리를 냈다.

“당신의 본명은 토마스. 제국 남부의 무덤을 파헤치던 도굴꾼 출신이지요. 황태자 줄리안이 은밀히 신분을 세탁해 주며 ‘바실 백작’이라는 가짜 면허를 쥐여준 사냥개에 불과합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이, 이 미친 여자가 무슨 헛소리를! 증거가 있는가!”

토마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르나르.”

엘디아가 차갑게 이름을 부르자, 그림자 속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대장 르나르가 순식간에 토마스의 배후를 차단했다. 르나르의 살기 어린 검끝이 토마스의 목덜미에 닿았다.

“공작부인 전하의 명이다. 얌전히 품을 수색당하겠나, 아니면 손가락을 다 잘린 채 쫓겨나겠나?”

르나르의 싸늘한 목소리에 토마스는 침을 꿀컥 삼켰다.

르나르가 거친 손길로 토마스의 품을 헤집자, 화려한 보석이 박힌 귀족 면허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디아는 그것을 발로 밟아 짓뭉개 버렸다. 면허장 뒤편에 숨겨진 특유의 위조 압인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황실의 정식 인장이 아닌, 황태자 개인의 사설 인장이었다.

만찬장에 있던 북부의 기사들과 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실이 감히 가짜 귀족을 특사로 보내 북부 카르텐 공작가를 기만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들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엘디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유제스를 돌아보았다. 유제스는 그녀의 대담하고도 치밀한 반격에 매료된 듯,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작 전하. 제국의 신성한 국경을 더럽히고, 가짜 신분으로 공작가를 기망한 이 추악한 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단해야 할까요?”

유제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호선을 그렸다.

“안주인의 뜻대로 하라.”

엘디아는 토마스와 그의 특사단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 사기꾼들을 즉시 지하 감옥에 처넣으세요. 황태자에게는 ‘가짜 귀족을 보내 공작가를 모욕한 죄’에 대한 공식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낼 것입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철저히 심문하세요.”

“넷!”

르나르와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읍! 읍! 이, 이럴 수는 없다! 황태자 전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토마스와 가짜 특사단 무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다. 그들의 화려한 은빛 수레단과 예복은 이제 공작가의 차가운 감옥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원작에서 자신을 단두대로 몰고 가려던 황태자의 첫 번째 발톱을 완벽하게 부러뜨린 순간이었다. 만찬장에 있던 가신들과 기사들은 이제 엘디아를 진정한 ‘북부의 여주인’으로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경외심이 느껴졌다. 완벽한 사이다이자 격상 반격이었다.

* * *

소동이 끝나고 밤이 깊어지자, 흑장미 성은 다시금 기괴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엘디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억눌러왔던 통증이 폭발하듯 전신을 덮쳐왔다.

“아…… 윽!”

그녀는 침대 기둥을 붙잡았으나, 힘이 풀려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왼쪽 쇄골 아래의 흑장미 낙인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뜨거운 불길을 뿜어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불규칙하게 뛰다가, 이내 멈춰 서는 듯한 극심한 심정지성 호흡 곤란이 찾아왔다.

[경고: 고통 동조 부작용 발현!] [현재 생명 유지 장치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경고: 호흡 곤란 및 심박수 급감. 즉각적인 조치가 없을 경우 영혼의 영구적 손상이 발생합니다.]

“하아…… 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뺨을 댄 채, 엘디아는 손가락 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며 붉은 시스템 창마저 지직거리며 깨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허무하게 가문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 순간, 굳게 잠겨 있던 침실 문 너머로 다급하고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가 신경질적으로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엘디아! 문 열어!”

유제스의 목소리였다.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미친 듯이 젖어 든, 집착과 두려움이 섞인 서늘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엘디아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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