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코앞까지 다가온 유제스의 숨결은 지옥의 유황불보다 뜨거웠다.

사나운 짐승의 구강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피비린내와 짙은 레더 향이 엘디아의 콧날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의 거친 힘에 이끌려 품에 처박히는 바람에, 엘디아가 입고 있던 짙은 자줏빛 벨벳 드레스가 뭉개지며 기괴한 마찰음을 냈다. 부드러운 벨벳의 솜털이 그의 단단한 검은 가죽 갑옷에 짓눌려 엉망으로 비틀렸다.

“너는 대체 정체가 뭐지?”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음성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엘디아의 가녀린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내 고통을 훔쳐 가고, 내 저주를 삼키고…….”

붉게 물든 유제스의 눈동자가 이성을 잃은 채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고 피를 마실 것처럼 사나운 살의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두 사람을 감쌌다.

“이제는 내 사나운 살육의 본능까지도 삼킬 생각이냐?”

그의 입술이 은밀하고도 위협적으로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내려앉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지독한 압박감에 엘디아의 쇄골 아래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낙인이 성난 불길처럼 화끈거리며 타올랐다. 심장이 조여들고,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극통이 뇌리를 난사했다.

‘윽……! 동조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잖아.’

눈동자가 뒤집힐 것 같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엘디아는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삼켰다. 대신 그녀는 피비린내 나는 신음 대신,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나운 폭풍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오만한 악녀의 미소였다.

그녀는 오히려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유제스의 단단한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질질 짜면서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나요, 공작님?”

“……뭐?”

“살육의 본능이든, 그 더러운 저주든 상관없어요. 기꺼이 지옥의 밑바닥까지 가드리죠.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멋대로 망가지지 말아요.”

엘디아는 유제스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고 밀착시켰다. 손끝에서부터 푸르스름한 정화의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와 그의 가죽 갑옷 틈새로 스며들었다. 찌릿찌릿, 지글부글. 기괴한 마력의 충돌음이 두 사람의 귓가를 어지럽게 울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폭주하던 검은 마력이 순한 양처럼 사그라들었다. 유제스의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고, 사납게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에 맑은 이성의 빛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이거 놔라.”

유제스가 마침내 제정신을 차린 듯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같은 서슬 퍼런 살기 대신,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과 기묘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놓으라고 하셨나요? 먼저 잡아끈 건 공작님이면서요.”

“내가…… 무의식중에 실수를 한 모양이군.”

“어머, 실수치고는 꽤나 뜨거웠는걸요. 제 벨벳 드레스가 전부 구겨진 건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

엘디아는 짐짓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제 드레스 자락을 톡톡 털었다. 유제스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목을 옭아맸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 끝에 남은 그녀의 온기가 아쉬운 듯,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굽이쳤다.

“……뻔뻔한 여자군. 보통 이 상황에서는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게 정상이다.”

“정상적인 여자가 제 발로 이 저주받은 흑장미 성에 들어왔겠어요? 저는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계약하는 사람이라서요.”

“이익이라.”

유제스가 피식, 메마른 실소를 터뜨렸다. 비웃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차갑게 얼어붙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불태워 자멸하려던 그의 지옥에, 기꺼이 두 발을 디디고 서서 비웃어 주는 기이한 동반자를 발견한 눈빛이었다.

그가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묵직한 강철로 주조된, 카르텐 공작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음각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탁.

차가운 집무 책상 위로 떨어진 것은 공작가의 직인 도장이 붉고 선명하게 찍힌 ‘성 내부 출입 및 내정 전권 수권장’이었다.

“가져가라.”

유제스가 턱 끝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네가 원하는 게 내 신뢰의 증표라면, 이것으로 대신하지. 흑장미 성 내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관리 권한이다. 물론,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엘디아의 눈이 순간 고양이처럼 가늘어지며 빛났다.

‘심봤다!’

황태자와 베르제 백작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실질적인 권력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성안에 우글거리는 쥐새끼들을 합법적으로 털어버릴 수 있다.

“어머나, 이렇게 귀한 걸 주시다니.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눈물이 나기는커녕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군.”

“기분 탓이에요. 저는 아주 정숙하고 조신한 공작부인이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러가라. 내 마력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혼자 두고.”

유제스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지만, 그의 시선은 방을 나서는 엘디아의 뒷모습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집착의 서막이었다.

* * *

방을 나온 엘디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장미 자수가 촘촘하게 놓인 화려한 은빛 실크 드레스를 걸치고, 귀에는 햇빛을 받아 퍼렇게 빛나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달았다. 은빛 실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사각 청량한 소리를 냈고, 사파이어 귀걸이는 짤랑이며 그녀의 기분 좋은 콧노래에 장단을 맞췄다.

“르나르.”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과묵한 호위대장, 르나르가 고개를 숙였다.

“예, 부인.”

“이것 좀 봐줄래요?”

엘디아가 유제스에게 받은 수권장을 르나르의 코앞에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르나르의 단호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것은…… 가주님의 직인이 찍힌 전권 수권장 아닙니까? 어떻게 이를…….”

“공작님이 저한테 성안의 청소를 맡기셨거든요. 르나르, 공작가를 좀먹는 해충들을 박멸할 시간이에요. 기사들을 데리고 나를 따르세요.”

엘디아의 입가에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성의 서편 외곽에 위치한 집사 보좌관들과 베르제 백작가에서 파견된 하인들의 거처였다. 그동안 베르제 백작부인 베아트리스의 지령을 받아 공작가의 기밀을 유출하고, 성의 예산을 뒤로 빼돌리던 추악한 프락치들의 소굴이었다.

콰광쾅!

르나르가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방 안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던 백작가 출신의 보좌관들과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공작부인이라 하셔도 사유지 침해……!”

“사유지?”

엘디아가 은빛 실크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쓸어내리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잔인하게 번뜩였다.

“이 성의 모든 흙바닥과 돌벽은 카르텐 공작가의 소유이고, 지금 이 순간부터 그 관리를 위임받은 건 나예요. 르나르, 저들의 침대 밑과 벽면을 전부 뜯어내세요.”

“존명.”

기사들이 들이닥쳐 가구를 부수고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이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실까?”

철컥, 콰직!

마침내 침대 밑 이중 바닥이 뜯겨 나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철제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르나르가 검자루로 금고의 자물쇠를 부수자, 그 안에서 눈이 멀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찰랑, 차르르릉!

눈부신 황금 주화 자루들과 공작가의 기밀 문서, 그리고 백작가에서 보낸 값비싼 보석상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공작가의 예산을 횡령하고 베르제 백작가에 정보를 파는 대가로 축적한 비축 금고였다.

“어머나, 아주 노다지네요.”

엘디아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이 사악한 반역 세력들의 자산은 전부 공작가의 국고로 환수합니다. 아, 물론 내정 관리의 수수료로 30%는 제 개인 금고로 들어갈 테지만요.”

“부인, 이 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르나르가 차가운 눈빛으로 프락치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공작가의 법이 아주 엄격하다고 들었는데, 지하 감옥의 가장 깊고 축축한 곳에 처박아 두세요. 햇빛 구경은 평생 못 하도록 말이죠.”

“알겠습니다.”

“안 돼! 엘디아 님! 같은 백작가 출신끼리 이러실 수는…… 읍, 읍!”

비명을 지르는 프락치들이 무자비하게 끌려 나갔다. 그들의 비축 금고를 통째로 압류하자, 엘디아의 가슴속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하게 뚫렸다.

원작에서 자신을 옥죄던 적들의 자금줄을 끊어내고, 동시에 막대한 재정적 이득을 취했다. 완벽한 일석이조의 사이다였다.

* * *

한바탕 폭풍 같은 소동을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엘디아는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극심한 피로가 전신을 덮쳐왔다.

“아으, 삭신이야…….”

벨벳 드레스를 벗고 가벼운 슬립 차림으로 누웠을 때였다. 왼쪽 쇄골 아래가 화끈거리며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다시금 밀려왔다. 타오르는 낙인의 고통에 숨을 헐떡이는 순간, 허공에 기괴한 붉은빛의 시스템 창이 점멸하며 나타났다.

[경고: 낙인 동조율 25% 돌파!] [동조의 대가로 사용자의 생명 수명이 반년(6개월) 감축되었습니다.] [현재 만개율: 25% (만개 시 영혼 폭열 사망)]

“……미친.”

엘디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을 다독이고 권력을 쥔 대가가 고작 수명 단축이라니. 시스템은 만능 치트키가 아니라, 그녀의 목을 서서히 죄어오는 은밀한 밧줄이었다.

‘6개월이나 깎였다고? 장난해?’

낙인의 검은 가시덤불이 쇄골을 타고 목덜미 쪽으로 조금 더 길게 뻗어 나가 있는 것이 거울 속에 비쳤다. 소름 끼치도록 가혹한 골든핑거의 패널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유제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원작의 파멸 루트를 완전히 분쇄해야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성 전체를 진동시키는 웅장하고도 기괴한 뿔나팔 소리가 슈바르츠발트의 침묵을 깨부수며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엘디아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창문을 열자, 살을 에이는 듯한 북부의 칼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창밖, 저 멀리 흑장미 성의 관문인 거대한 침엽수 성벽 너머로 기괴한 광경이 보였다.

눈보라를 뚫고, 은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수십 대의 수레단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성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수레단의 중심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색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이 오만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황태자 줄리안이 보낸 특사단이었다.

“벌써 들이닥친 건가…….”

줄리안이 보낸 은빛 수레단이 마치 거대한 독사의 혓바닥처럼 흑장미 성의 입구를 향해 기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엘디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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