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양피지의 검은 그을음이 대리석 바닥 위로 쓸쓸하게 흩날렸다.
공작실의 공기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제스의 매서운 눈동자가 붉은 광기로 번뜩였고, 그의 주위로 피어오른 검은 마력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황태자 녀석이…… 다음 달 열병식을 틈타 군대를 보내겠다고?”
유제스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얼음 송곳 같았다.
엘디아는 쇄골 부근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팍에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낙인이 그의 분노에 반응해 은근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황태자 줄리안 드 엘마르. 원작에서 자신을 단두대로 보낸 그 잔혹한 사냥개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단두대 엔딩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표를 감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얻은 목숨인데, 황실의 개들에게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 * *
사흘 뒤.
흑장미 성은 폭풍 전야의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영하를 밑도는 북부의 혹한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지만, 엘디아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 특별히 뼈가 시린 추위에 맞서기 위해 초콜릿 빛깔의 부드러운 벨벳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
드레스의 소매 끝동에는 보들보들한 백여우 털이 몽실몽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은사로 정교하게 장식된 장미 문양의 코르셋이 그녀의 가녀린 실루엣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안감의 최고급 실크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차가운 복도에 기분 좋은 마찰음을 남겼다. 귀밑에서 달랑거리는 눈 결정 모양의 루비 귀걸이가 그녀의 하얀 뺨 위로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말로 연무장으로 가실 겁니까, 부인?”
뒤를 따르는 호위대장 르나르의 목소리에 우려가 섞여 있었다.
“그럼요. 황태자가 군대를 몰고 들이닥치겠다는데, 성문을 활짝 열어주고 환영회라도 준비할까요?”
엘디아가 샐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백작가에서 오신 부인의 간섭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자존심이 밥 먹여 준답니까? 다가올 칼날 앞에서는 자존심보다 목숨줄이 더 질겨야 하는 법이죠.”
연무장에 들어서자, 매서운 칼바람과 함께 훈련 중이어야 할 기사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기사란 자들이 화로 주변에 둥글게 모여 앉아 따뜻한 술잔을 기울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무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목검과 철제 방패들이 군 기강의 해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베르제 백작가에서 온 풋내기 서녀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공작비는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어머나 세상에.”
엘디아가 과장되게 양손으로 볼을 감싸 쥐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용맹하고 위대하신 카르텐의 기사님들께서는 혹한기 훈련이 아니라 경로당 화로 파티를 벌이고 계셨네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청아하면서도 뼈가 있는 목소리가 연무장의 얼어붙은 공기를 쨍하게 울렸다.
화로 주변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함께 이내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특히 다리를 삐딱하게 꼬고 앉아 있던 선임 기사, 바르트 자작의 차남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칠게 검을 바닥에 꽂으며 엘디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공작부인 전하께서 이 먼지 날리는 연무장엔 어쩐 일이십니까? 드레스 자락에 흙먼지라도 묻으면 저희가 백작가에 세탁비라도 청구당할까 봐 겁이 나는군요.”
가시 돋친 비아냥거림이 노골적이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그 소리에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엘디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품속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이 가죽 표지를 톡톡 두드렸다.
“르나르 단장.”
“예, 부인.”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가올 황실 군대의 불시 검문에 대비한 ‘카르텐 영지 안보 및 연무장 재배치 계획서’입니다.”
그녀가 계획서를 르나르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안겨주었다.
바르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엘디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부인, 군사 훈련과 영지 방위는 기사단의 고유 권한입니다.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께서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실 영역이 아닙니다. 얌전히 침소에서 자수나 놓으시는 게 가문의 품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래요?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화초라.”
엘디아의 입꼬리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바르트 훈작사. 그 오만한 주둥이를 놀리기 전에 카르텐 가문의 군법부터 머리에 똑똑히 새기셨어야죠. 카르텐 군사 행동 규율 제2조 4항이 무엇인지 읊어 보시겠어요?”
바르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 그건…….”
“모르시는군요.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시나 봐요? 그럼 제가 친절히 읊어 드리죠. [전시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적 비상사태 시, 가주와 그 정식 배우자는 군사 지휘권의 일부를 대행할 수 있으며, 이에 불복하거나 태만을 보인 자는 즉시 직위를 해제하고 최하급 병졸로 강등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또한, 제5조 1항. [혹한기 경계 근무 중 사적인 담소 및 기강 해이를 일삼은 자는 그 즉시 녹봉의 반액을 삭감하고 3일간 지하 감옥에 구금한다.]”
“부, 부인! 겨우 그런 구시대 유물 같은 조항으로 저를……!”
“겨우라니요?”
엘디아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부드러운 가죽 구두가 다져진 눈밭을 뽀드득 밟았다.
“당신의 그 방만함과 안일함이 바로 황태자의 첩자들이 이 성벽을 제 안방처럼 드나들게 만든 원인입니다. 기사단의 얼굴을 먹칠한 것도 모자라 공작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군요.”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바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르나르 단장. 지금 즉시 바르트의 가슴팍에 달린 선임 기사 훈장과 계급장을 회수하세요. 오늘부로 그는 연무장 잡역부로 강등입니다.”
“부인! 감히 저를! 제 가문이 베르제 가문보다 못할 게 없는데 어디서 굴러먹던 서녀 따위가 내 직위를 빼앗는단 말입니까!”
바르트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끌어내세요.”
엘디아의 명령에 르나르가 망설임 없이 바르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르나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바르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바르트 경, 부인의 명령이다. 군법에 따라 무기를 반납하고 연무장 밖으로 나가라.”
“단장님! 어찌 저 미련한 여자의 미친 소리를 들으십니까!”
“입을 다물지 않으면 즉결 처분도 불사하겠다.”
르나르의 살벌한 경고에 바르트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기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갔다. 연무장에 남아 있던 다른 기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엘디아는 옷자락에 묻은 보이지 않는 눈가루를 털어내며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정연하고도 가차 없는 태도에 기사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 이제 제가 준비한 계획서대로 움직이실 시간입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고쳐 잡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없습니다, 부인!”
엘디아의 가슴속에서 찌릿한 쾌감이 솟구쳤다. 동시에 눈앞에 투명한 상태창이 반짝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시스템: 기사단의 복종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시스템: 유효 반격 성공! 영지 내 영향력이 10% 상승합니다.]
* * *
그때였다.
연무장 한편의 그늘진 곳에서 묵직한 검풍이 몰아쳤다.
검은 가죽 연무복을 입은 유제스가 홀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은발이 채찍처럼 날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햇빛에 반짝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어딘가 기괴할 정도로 거칠고 위태로웠다.
엘디아의 눈앞에 적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위험!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마력 폭주 지수 급상승 중!] [현재 폭주율 78%!] [주의: 한밤중에 복용한 진통 촉진제(황실의 만성 우울 독약)의 잔류 성분이 체내 마력과 공명하여 발작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저 바보 같은 인간이……!’
엘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흘 전 상태창의 경고 목록에서 눈여겨보았던 그 ‘진통 촉진제’가 기어코 그의 몸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황실이 보낸 교묘한 만성 독약은 유제스의 어둠의 마력과 결합해 그의 정신을 자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유제스가 허공을 가르던 대검을 툭 떨어뜨렸다.
“크윽……!”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검붉은 마력이 불길처럼 치솟으며 공기를 태워버릴 듯이 일렁였다.
동시에, 엘디아의 왼쪽 쇄골 아래에 새겨진 흑장미 인장이 불에 달군 인두를 들이댄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윽……!”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엘디아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뼈마디가 바스러지고, 심장이 강제로 쥐어짜 지는 듯한 극통이 그녀의 신경계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이것이 바로 공작의 고통과 동조하는 대가였다.
[골든핑거 패널티 작동: 대상의 통증을 100% 공유합니다!] [흑장미 만개율 상승 중!]
“부인!”
르나르가 깜짝 놀라 다가오려 했으나, 엘디아는 한쪽 손을 내저어 그를 강력히 제지했다.
“오지…… 마세요……!”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가식적인 다정함 따위로 남주를 구원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건 오직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그가 가진 막대한 부와 위자료를 쟁취하기 위한 비즈니스다.
엘디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제스를 향해 달렸다. 초콜릿 빛 벨벳 드레스 자락이 눈밭에 쓸려 엉망이 되었지만 그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유제스……!”
* * *
그녀는 유제스의 앞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유제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폭주하는 마력이 그의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가까이…… 오지 마라. 널 죽일지도 모른다…….”
“죽든 살든, 그건 내가 결정해요!”
엘디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유제스의 가슴, 검붉은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심장 부근에 자신의 손을 꽉 포개어 얹었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겁고 사나운 마력이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그대로 흘러들었다.
[시스템: 동조율이 15%로 상승합니다!] [시스템: 낙인 ‘연리의 흑장미’ 가동!]
순간, 두 사람의 몸 주변으로 푸른빛을 띤 투명한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가혹한 고통의 동조 속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정화의 기운이었다.
“아으윽……!”
엘디아의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유제스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망, 가문이 몰살당하던 날의 참상, 황실을 향한 뼈에 사무친 증오가 고스란히 그녀의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눈앞이 번쩍이고 숨이 턱 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손을 떼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엘디아는 유제스의 가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죽지 마. 당신이 먼저 죽어버리면 내 자유는, 내 위자료는 누가 보장해 주는데!’
그녀의 지독하고도 이기적인 생존 의지가 푸른 마력이 되어 유제스의 폭주하는 검은 마력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유제스의 체내를 날뛰던 마력이 고요를 되찾아갔다. 그의 호흡이 거칠게나마 안정을 찾아갔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에 조금씩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 * *
하지만 정화가 채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유제스의 숨결은 여전히 갈급했고, 그의 몸은 지옥의 한가운데를 헤매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는.”
유제스의 붉고 뜨거운 눈동자가 엘디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디아의 가녀린 손목을 낚아챘다. 으스러질 듯한 강한 악력에 엘디아는 숨을 흡 들이켰다.
“공작님……?”
철컥.
그가 거친 힘으로 엘디아를 자신의 품속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벨벳 드레스가 그의 차가운 검은 가죽 갑옷에 짓눌리며 찌그러졌다. 가죽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그의 뜨거운 열기가 엘디아의 코끝을 찔렀다.
유제스는 이성을 반쯤 잃은 짐승 같은 눈빛으로 엘디아의 목덜미와 입술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왔다. 뜨겁고 축축한 호흡이 그녀의 입술 위로 흐트러졌다.
“너는 대체 정체가 뭐지?”
그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게 긁혔다.
“내 고통을 훔쳐 가고, 내 저주를 삼키고…….”
그가 엘디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마치 그녀를 뼈째로 집어삼킬 듯이 입술을 바짝 가까이 들이댔다.
“이제는 내 사나운 살육의 본능까지도 삼킬 생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