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궁-!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성벽을 칭칭 감고 있던 시커먼 가시넝쿨들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는 소리가 고막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슈바르츠발트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기괴한 포효가 흑장미 성 전체를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귓가를 찢는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에 고개가 절로 꺾였다.
“……윽!”
동시에 쇄골 아래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지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통증에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깃이 높은 보라색 벨벳 드레스의 빳빳한 옷깃을 움켜쥐며 간신히 버텨냈다.
[!!비상사태 발생!!] [슈바르츠발트 경계의 ‘공명 가이스트’가 대각성을 시작합니다!] [유제스 카르텐의 저주 폭주 지수가 임계점을 돌파합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색 경고 창이 시야를 어지럽게 가렸다. 가슴팍에 정교하게 수놓아진 은색 장미 자수 위로 붉은 핏방울이 툭, 투둑 떨어지며 검붉은 얼룩을 만들어냈다.
“하아, 하아…….”
비틀거리며 정원 기둥을 짚었다.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지만, 가슴속에서 들끓는 불길을 끄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괴물이다! 괴물이 울부짖는다!” “모두 안으로 대피해! 장미 넝쿨이 미쳐 날뛰고 있어!”
정원 저편에서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안개 낀 성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혼란상 속에서, 엘디아의 시야를 가로막은 것은 또 다른 알림창이었다.
[돌발 퀘스트: 둥지 안의 갉아먹는 쥐새끼] - 설명: 성 내부의 혼란을 틈타, 베르제 백작가에서 파견한 프락치가 주방 식자재 보관 창고에 '저주 유발 독액'을 주입하려 합니다. - 실패 시: 공작가 전원 중독 및 엘디아의 독살 누명 엔딩 (단두대 확정). - 보상: 공작가 내 실질적 발언권 획득, 유제스의 의심 단계 완화.
머릿속에서 찌르르 소름이 돋았다.
베르제 백작가. 그 악랄하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기어코 이 아수라장을 가만두지 않는구나. 괴물이 울부짖는 틈을 타서 나를 독살범으로 몰아 단두대로 보낼 독 사료를 뿌리겠다니.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굴리는군, 베아트리스 부인.”
비죽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입술로 짓이겼다.
엘디아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차가운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묵직한 벨벳 드레스 자락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을 쓸었다. 전신을 옥죄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려왔지만,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독기가 고통을 억눌렀다.
두 번 다시 그들의 장기판 위에 소모품으로 올라서지 않겠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더러운 덫이든 밟아 으깨주마.
* * *
주방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라면 하인들의 발길로 분주했을 통로가, 성 전체를 뒤흔드는 포효 탓에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엘디아는 드레스 자락을 높이 치켜들고 계단을 신속하게 내려갔다.
주방 문틈 너머로 은근한 촛빛과 함께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진짜로 이 안에 다 부으면 되는 거지? 뒤탈은 없는 거겠지?” “걱정 마십시오. 공작이 발작하는 날에는 아무도 식자재 검수를 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저기 있는 저 베르제 백작가의 서녀가 마침 주방 근처를 서성였다는 증언만 확보하면 끝입니다.”
약삭빠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방 보조인 한스였다. 그리고 그와 마주 서서 푸른빛이 도는 유리병을 들이밀고 있는 사내는, 베르제 백작가에서 마차 수리를 핑계로 들여보냈던 마부였다.
사각, 사각.
엘디아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참으로 눈물겨운 동업 정수네.”
“헉!” “뉘, 뉘구……!”
두 사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엘디아는 문가에 기대선 채, 보라색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긋 웃었다. 가슴팍의 핏자국이 벨벳 드레스 위에서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태연하고 우아했다.
“어머, 왜 그렇게 놀라실까? 마치 은밀한 곳에 쥐약이라도 치려다 들킨 생쥐 꼴이네.”
“에, 엘디아 님……!”
주방 보조 한스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려 하자, 엘디아가 잽싸게 구두 끝으로 병을 툭 받아내어 굴렸다.
데구르르, 탁.
유리병이 엘디아의 구두 코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베르제 백작부인이 보낸 선물 치고는 참 조잡하기 짝이 없네. 이런 걸로 북부의 괴물을 잡겠다고? 아니지, 괴물을 잡는 게 아니라 나를 잡으려고 안달이 난 거겠지.”
백작가의 첩자였던 마부가 소매 속에 감춰둔 단검을 슬며시 꺼내 들려 했다.
“이, 이년이 감히……! 여기서 조용히 입을 다물게 하면……!”
“입을 다물게 해? 네가?”
엘디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었나 보네. 여기는 슈바르츠발트야. 공작의 말 한마디면 장미 가시가 네 목구멍을 뚫고 나와 자라날 수 있는 지옥이지. 그리고 나는 그 괴물의 아내로 온 사람이고.”
“그, 그딴 미치광이의 껍데기뿐인 아내가 무슨 권력이 있다고!”
마부가 악에 받쳐 소리쳤지만, 엘디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보라색 벨벳 드레스가 스치는 소리가 기묘한 압박감을 자아냈다.
“권력이 있냐고 물었어?”
엘디아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독액이 출렁였다.
“공작가의 법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 잘 봐.”
그녀가 등 뒤의 어둠을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르나르 경.”
그림자 속에서 찬바람이 일더니,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공작가의 호위대장 르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이미 푸르게 날이 선 검이 들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부인.”
르나르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주방 보조와 첩자 마부는 그의 등장만으로도 완전히 기가 죽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 쥐새끼들이 공작가의 식자재 창고에 독을 풀려던 참이었어. 현장을 잡았으니, 공작가의 사적 제제권에 따라 처리해 줘.”
엘디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공작비를 시해하려 한 음모죄, 그리고 공작가를 독살하려 한 반역죄. 가차 없이 지하 감옥에 처넣고,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심문해. 배후가 누구인지 그 더러운 입으로 직접 불 때까지.”
“명령 받들겠습니다.”
르나르가 검을 거두며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기사들이 들이닥쳐 비명을 지르는 두 사내의 입을 막고 끌고 갔다.
[돌발 퀘스트: 둥지 안의 갉아먹는 쥐새끼 완료!] [보상: 공작가 내 실질적 발언권 획득! 호위대장 르나르의 경계심이 미세하게 감소합니다.] [유제스의 불신 수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눈앞에 뜬 보상 메시지를 보며 엘디아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쿠구구구궁-!
다시 한번 성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강한 진동이었다. 복도 저편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 * *
“……윽, 쿨럭!”
본관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초입에서, 엘디아는 그 남자를 마주쳤다.
검은 마력 안개에 완전히 휩싸인 채, 차가운 벽을 짚고 간신히 서 있는 유제스 카르텐이었다. 그의 하얗게 질린 은발이 이마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투명한 벽안은 핏발이 서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작님……!”
“오지…… 마라.”
유제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검은 안개는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킬 것처럼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위험! 유제스 카르텐의 저주 통증 지수: 89%] [현재 대상은 극심한 정신적 붕괴 상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파괴하려는 자멸적 본능이 지배적입니다.]
엘디아는 침을 삼켰다.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자신의 쇄골 밑 장미 낙인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내질렀다.
[선택창이 활성화됩니다.] [선택지 1: 자리를 피한다. (안전 확보, 하지만 유제스의 폭주로 성의 절반이 파괴되며 신뢰도 영구 하락)] [선택지 2: 통증의 30%를 대가로 흡수한다. (동조 대가: 극심한 신경계 손상 통증 발생. 보상: 유제스의 이성 회복, 호감도 시스템 정식 개방)]
‘장난해? 여기서 피하면 내 단두대 엔딩은 누가 막아주는데?’
엘디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차피 이 저주받은 성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괴물의 심장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선택지 2.”
머릿속으로 속삭인 순간, 뇌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극통이 덮쳐왔다.
“아으으윽……!”
단말마 같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서지고, 혈관 속에 펄펄 끓는 용암을 들이붓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엘디아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유제스에게 다가갔다.
스르륵.
보랏빛 벨벳 드레스 자락이 검은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고통으로 파르르 떠는 손을 뻗어, 유제스의 차가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유제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통증의 삼분의 일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영향이었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의 정신에 맑은 균열이 생기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너, 너…… 무슨 짓을…….”
“단단히 미치셨네요, 공작님.”
엘디아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생긋 웃었다. 고통으로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목덜미까지 뻗쳐오른 검은 가시덤불 낙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혼자 죽으러 가실 거면, 제 위자료는 챙겨주고 가셔야죠. 이렇게 허무하게 성을 부수면 곤란해요.”
“이 손 치워……!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유제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거칠게 밀쳐냈다.
파스스스-!
검은 안개가 불꽃처럼 튀며 엘디아의 하얀 손목에 붉은 쓸림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엘디아는 뒤로 밀려나면서도 그의 소매 끝동을 억척스럽게 움켜쥐었다.
“안 치워요. 죽어도 못 치우겠으니까, 밀어내실 거면 아주 뼈가 부러지도록 밀어내 보시든가요.”
눈꼬리가 붉게 물든 채, 고통을 참느라 이가 덜덜 떨리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엘디아의 눈빛.
유제스는 짓눌려 있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언제나 가식적인 선의나 동정, 혹은 공포에 질린 눈빛만을 받아왔던 그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달랐다.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동정이 아니었다. 지독할 정도로 날것의 생존욕구, 그리고 자신을 이용해 기어코 살아남겠다는 오만한 독기였다.
그 독기가, 그 지독한 생명력이 유제스의 차가운 얼음 성벽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며 파고들었다.
“……독한 년.”
유제스가 이빨 사이로 더운 숨을 뱉어내며 그녀의 손목을 쥔 힘을 서서히 풀었다. 하지만 그의 핏빛 서린 안광은 엘디아의 얼굴을 꿰뚫을 듯이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이 순간의 그녀를 영혼 깊숙이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시스템 알림: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 게이지가 이상 진동합니다!] [호감도 단계가 ‘관찰 대상’으로 진입하기 직전입니다!]
* * *
“상황은 정리되었습니다, 공작님.”
기침을 가라앉힌 유제스의 뒤로 르나르가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엘디아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팍의 통증은 여전히 찌릿하게 남아 있었지만, 간신히 호흡을 고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푸른 유리병과, 첩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르나르가 회수해 건넨 양가죽 주머니를 유제스의 발밑에 툭 던졌다.
“베르제 백작가에서 보낸 쥐새끼들이 공작가의 주방에 독을 풀려더군요. 다행히 제가 한발 빨랐습니다.”
유제스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백작가가 감히 내 성에 손을 댔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디아가 양가죽 주머니 속에서 나온 반쯤 타들어 간 양피지 지령서를 펼쳐 들었다.
그것은 아까 첩자가 품속에 소중히 감춰두고 있던 베르제 백작가의 극비 지령서였다. 지령서의 붉은 밀랍 인장을 확인하는 순간, 엘디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걸 보시죠.”
그녀가 내민 지령서의 내용을 훑어내려 가던 유제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옆에서 슬쩍 내용을 훔쳐본 호위대장 르나르 역시 숨을 들이켰다.
[……황태자 전하의 명에 따라, 다음 달 연무장 열병식을 기점으로 카르텐 공작가의 저주 전염을 공식 구실로 삼아 제국 정예군을 파견할 예정이다. 공작이 발작하는 시기에 맞춰 성문을 안에서 열어젖힐 준비를 마쳐라. 서녀 엘디아는 그 혼란을 틈타 처단하고 공작가의 반역 증거를 확보할 것.]
황태자 줄리안 드 엘마르.
그 오만하고 잔혹한 황실의 사냥개가 드디어 이 흑장미 성을 짓밟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음 달 열병식을 기회로 삼아서.
“황태자가…… 군대를 파견한다고?”
르나르의 목소리에 지독한 긴장감이 서렸다.
유제스는 지령서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콰득, 구겨버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검은 마력이 양피지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공중에 흩뿌렸다.
“기어코 이 목줄을 끊어놓으시겠다…….”
유제스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성을 되찾았던 그의 눈동자에 다시금 어두운 살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작가 전체의 존망이 걸린, 그리고 엘디아 자신의 목덜미를 겨눈 단두대의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리는 청천벽력의 선전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