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성문 전체를 칭칭 휘감고 있던 검은 가시넝쿨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르릉, 하며 성벽을 타고 흐르는 불길한 진동에 연회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으로 쏠렸다.

은빛 갑주를 입은 수백 명의 제국 기사 수호대. 그리고 그 선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마차와 함께, 제국의 대주교를 대동한 황태자 줄리안 드 엘마르가 오연한 자태로 강림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황실 소환장이 높이 들려 있었다. 성문 바로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황궁의 군세는 흑장미 성의 차가운 안개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어머나, 기별도 없이 참 요란하게도 오셨네요.”

나는 유제스의 손을 꽉 맞잡은 채,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오늘 내가 입은 드레스는 카르텐 가문의 상징색인 흑자색 벨벳 위에 은실로 정교하게 쇄빙(碎氷) 문양을 수놓은 화려한 예복이었다. 쇄골 아래 새겨진 흑장미 인장을 절묘하게 가려주는 하이넥칼라에는 물방울 모양의 자수정 브로치가 매달려 있어,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며 보랏빛 광채를 뿜어냈다.

상태창의 버프 덕분에 욱신거리던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눈앞의 황태자를 보니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유제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운 빙하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몸 주위로 검붉은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 하자, 나는 그의 손바닥을 손톱 끝으로 꾹 눌러 신호를 보냈다.

‘참아야 해요, 유제스. 저 미친 황태자 놈이 바라는 게 바로 그 폭주니까.’

우리는 연회장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성문이 거친 쇠소리를 내며 열리자, 찬 바람과 함께 줄리안의 오만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유제스 카르텐. 그리고 베르제 가문의 쓸모없는 인질년까지 참 지저분하게도 붙어 있군.”

줄리안은 황금색 비단 망토를 펄럭이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곁에 선 대주교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성스러운 성수를 담은 은제 병을 쥐고 있었다. 줄리안의 시선이 내 목덜미와 유제스의 피폐해진 얼굴을 훑으며 비열한 호선을 그렸다.

“공작, 몰골이 그게 무엇인가? 북부의 괴물이라 불리던 기세는 어디 가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군. 역시 가문의 저주란 참으로 정직해.”

줄리안은 들고 있던 황실 소환장을 펼쳐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황명이다! 카르텐 가문에 깃든 ‘그림자 저주’가 이 성과 북부 영지 전체에 만연하여 제국의 안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이에 황실은 제국 수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카르텐 가문의 영지 지배권을 즉각 국가로 귀속하고 박탈할 것을 선포하노라!”

쾅! 대주교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며 엄숙하게 맞장구를 쳤다.

“신의 뜻에 따라, 어둠에 물든 더러운 땅을 정화하고 황실의 직할령으로 삼을 것입니다.”

유제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저주의 파동이 내 쇄골의 각인을 타고 찌릿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 SYSTEM WARNING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분노 수치 급상승! 저주 폭주 위험도 85% 돌파! 동조율이 흔들립니다!

유제스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당장이라도 저 줄리안의 목덜미를 뜯어발기겠다는 살기가 안개처럼 자욱해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아으윽……! 콜록, 쿨럭!”

나는 가녀린 가문 여인의 전형적인 비련미를 온몸으로 연기하며, 유제스의 앞을 가로막아 줄리안의 가슴팍 코앞까지 다가섰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유제스의 어깨에 기대어 기침을 연발했다.

“공작 전하……! 제발 참으셔야 해요. 제 몸이, 제 몸이 또…… 흑!”

유제스는 내 돌발적인 행동에 흠칫 놀라며 본능적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폭주하려던 마력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갈무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기침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줄리안만이 볼 수 있는 싸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황태자 전하, 여전하시네요. 남의 집에 들이닥쳐서 남의 남편 건강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땅을 뺏으려 들다니. 참으로 ‘황실다운’ 고결한 도둑질이옵니다.”

“뭐라? 네년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줄리안의 미간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입을 놀리는 건 제가 아니라 전하십니다. 카르텐 가문을 박탈하겠다고요? 무슨 명분으로요? 이 성에 저주가 만연하다는 그 가당치도 않은 헛소문 하나 때문에요?”

나는 소매 안에서 슬며시, 일전에 주치의 바벨을 처단할 때 확보해 두었던 은제 약병을 꺼내 들었다. 은빛 표면이 기괴하게 검푸른 빛으로 부식되어 있는, 유제스가 매일 밤 복용하던 ‘진통 촉진제’였다.

“황실에서 매달 자비롭게 보내주시던 이 ‘마력 안정제’ 말입니다.”

나는 약병을 줄리안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병 안의 검은 액체가 출렁였다.

“저희 공작가의 영민한 가신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안정제가 아니라 신경계를 파괴하고 마력을 폭주하게 만드는 황실 특제의 만성 독약, ‘레테의 눈물’이더군요. 주치의 바벨이 황실의 지령을 받고 공작 전하께 매일 밤 먹이던 촉진제 말이에요.”

줄리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떨렸다.

“그, 그것이 무슨……!”

“어머, 모르셨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전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랍니다. 황실이 공작 전하를 미치게 만들어 영지를 찬탈하려고 독약을 보냈다는 증거가 제 손에 이렇게 똑똑히 남아 있는데, 감히 누구에게 소환장을 들이미시는 건가요?”

나는 한 걸음 더 줄리안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내 가방 안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베르제 백작부인 베아트리스가 이송 마차에서 내게 쥐여주었던, 비취로 장식된 흑장미 빗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있죠. 제 계모인 베르제 백작부인이 저더러 공작 전하의 침소에 두라며 친히 쥐여주신 비취 빗입니다. 이 빗등을 살짝 누르면 뭐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스윽, 내가 빗의 하단을 가볍게 비틀자, 끝부분에서 시퍼런 독기가 서린 미세한 침이 튀어나왔다.

“반경 수 미터 내의 생명체를 순식간에 가사 상태로 만드는 치명적인 신경 가스 침이더군요. 황태자 전하와 베르제 백작가께서 아주 짜고 치는 고스톱을 예술로 하셨더라고요? 저를 살인귀로 만들어 단두대에 보내고, 공작 전하를 독살해 북부를 집어삼키려던 그 앙증맞은 계획,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줄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대주교 역시 땀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이 무례한 년이……! 감히 황실을 모함하려 드는구나! 그런 조작된 증거 따위가 통할 것 같으냐!”

줄리안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품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명분은 충분하다! 이 서류를 보아라! 제국 법률 제47조에 의거, 영지 내에 국가 전복의 위험이 있는 마력 폭주가 발생할 경우, 황실은 즉각 영지 임시 관리권을 발동하여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싸인해라, 유제스 카르텐! 순순히 영지를 내놓고 황궁으로 와서 조사를 받지 않으면, 이 수백 명의 기사들이 당장 이 성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줄리안이 기고만장하게 소리치며 제국 기사 수호대에게 검을 뽑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수백 자루의 검이 일제히 뽑히며 서슬 퍼런 쇳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는 내 맑은 웃음소리가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 속에서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전하께서는 황실 도서관에 가본 적이 없으신가 봐요.”

“뭐라?”

나는 유제스의 손을 놓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줄리안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내 드레스의 실크 자락이 눈밭 위를 부드럽게 쓸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국 개국 헌장 제3조를 잊으셨나 봅니다. 카르텐 공작령은 제국 건국 당시 초대 황제 폐하께서 친히 부여하신 ‘영구적 치외법권’ 지대입니다. 황실의 그 어떤 법률도, 그 어떤 군대도 카르텐 가주의 명시적 동의 없이는 이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으며, 영지 회수 세칙 역시 공작가가 황실에 반역을 획책했다는 ‘황실 재판소의 최종 판결’ 없이는 발동될 수 없습니다.”

나는 줄리안의 손에 들린 서류를 톡톡 건드렸다.

“전하께서 가져오신 이 조제된 영지 반납 강제 세칙은, 개국 헌장 제3조의 공작령 치외법권 항조에 의해 즉각 ‘무효’ 처리됩니다. 헌법보다 하위 법률을 들고 와서 억지를 부리시다니, 황실의 법률가들이 참으로 태만하군요. 아니면 왕세자 전하의 머리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인가요?”

“너, 너……!”

줄리안의 얼굴이 기품 있게, 그리고 아주 붉게 타올랐다. 수치심과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어머,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지셨어요? 북부의 추위가 전하의 고귀한 뺨에는 너무 가혹했나 봅니다. 그러게 집에서 따뜻한 코코아나 드시지, 왜 남의 영지까지 와서 찬바람을 맞고 계십니까?”

티키타카 대사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흘렀다.

“엘디아 베르제……! 네년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줄리안이 이를 갈며 검자루에 손을 올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슈바르츠발트의 어둠 속에서 스산한 쇠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철컥.

줄리안이 대동해 온 수백 명의 제국 기사 수호대. 그들의 바로 뒷덜미,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장전된 검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깊은 곳과 숲속에 은둔해 있던 카르텐 공작가의 정예 기사단이 수면 아래에서 소리 없이 움직여 황태자 호위 기사들의 목덜미 뒤로 검을 완벽하게 장전해 놓은 상태였다.

호위대장 르나르가 검을 비스듬히 쥔 채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사냥감을 포착한 늑대의 그것이었다.

“황태자 전하. 공자비 전하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이곳에 온 황실 기사들의 목은 단 한 명도 성치 못할 것입니다.”

사방이 완벽하게 포위당했음을 깨달은 줄리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수백 명의 제국 기사들은 고작 몇십 명의 카르텐 정예 기사들이 뿜어내는 살기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 SYSTEM INFO ★] 경축! 적대 세력의 기선 제압 성공! 황태자 줄리안의 굴욕 수치 최고조 달성! 공작 유제스의 호감도 상승! (현재 동조율 안정세)

유제스는 내 뒤에서 묵묵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지독한 집착과, 내 당당함에 매료된 듯한 열망이 기이하게 뒤섞여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내 허리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기며, 내 귀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잘하는군, 나의 비. 아주 영리하고 잔인해.”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쇄골의 각인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하지만 줄리안은 이대로 물러설 놈이 아니었다. 이 가학적인 가스라이팅의 대가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비열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제법이구나, 엘디아. 하지만 네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줄리안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곳까지 온 줄 아느냐? 네 아비 베르제 백작이 너의 반역 협조 물품을 이미 황실에 정식으로 기소했다!”

줄리안의 목소리가 흑장미 성의 공터를 크게 울렸다.

“네 방에서 발견된 공작가의 내통 문서와 독약 제조법, 그리고 네가 황실을 전복하기 위해 카르텐 공작과 공모했다는 친필 서명까지 모두 확보했다. 네 생부인 베르제 백작이 직접 황실 감찰원의 자격으로 지금 이 성 내부로 진입하고 있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문 너머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친부, 나를 학대하고 단두대로 밀어 넣으려 했던 베르제 백작이 황실 감찰관의 인장과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줄리안이 던진 역공의 배수진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