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내 고통을 가져가는 미련한 녀석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벼랑 끝에 선 맹수의 울음처럼 위태롭고 젖어 있었다. 유제스의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내 입가에 번진 붉은 피 자국을 조심스럽게 문질러 닦아냈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가 마치 불을 지른 듯 뜨겁게 타올랐다. 내 목덜미를 타고 뻗어 나간 검은 흑장미 낙인이 욱신거리며 심장 박동에 맞춰 맥질했다.

“기억해라. 너를 잃는 날, 나는 정말로 온 세상을 불태우고 나 자신마저 지옥으로 던질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내 곁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무시무시한 소유욕과 맞닥뜨린 순간, 내 의식의 끈이 툭 끊어졌다. 세상이 암전되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 손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잡은 채 절망으로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었다.

***

사흘 뒤.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불의 감촉에 눈을 떴다.

사방은 고요했고, 코끝을 스치는 것은 슈바르츠발트 특유의 서늘한 침엽수 향과 매캐한 타르 냄새였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돌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쇄골 아래에서부터 찌릿찌릿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침대맡에 앉아 있는 유제스 카르텐이었다. 사흘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그의 뺨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고 턱가에는 푸르스름한 까끄라기가 돋아 있었다. 늘 단정하게 빗어 넘기던 흑발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이마를 덮었고, 그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깼군.”

그의 목소리는 뜨거운 모래바람을 삼킨 듯 거칠고 낮았다.

유제스는 가만히 손을 뻗어 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내 살결에 닿는 감촉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유리 인형을 다루는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부드러운 밤하늘색 실크 슬립 드레스였다. 쇄골과 어깨라인을 따라 은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눈꽃 문양이 보였지만, 지금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내 왼쪽 쇄골 아래에서부터 목덜미까지 타투처럼 새겨진 기괴한 문양이었다.

검붉은 줄기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내 살결을 파고들어, 이제는 목덜미를 타고 턱 끝까지 뻗어 나가려 하고 있었다. 동조율 48%. 만개에 가까워질수록 이 고통의 낙인은 더 선명하고 흉포해질 터였다.

유제스의 시선이 내 목덜미의 검은 장미 가시덤불에 머물렀다. 그의 손가락이 그 검붉은 낙인을 아주 미세하게 떨며 쓸어내렸다. 그의 눈망울에 서린 감정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지독한 자책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이제는 숨김없이 설명해라.”

그의 목소리가 억눌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내 마력이 폭주할 때마다, 내 안의 어둠이 날뛸 때마다 네가 이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있었다는 뜻인가? 왜 나 대신 이 지독한 인두질을 견디고 있었냔 말이다, 엘디아!”

나는 욱신거리는 쇄골을 가볍게 누르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이불의 묵직한 실크 텍스처가 지친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말했다면 믿어주기나 했을까요?”

나는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를 흘려보냈다.

“처음 내가 이 성에 발을 들였을 때, 당신과 그 무뚝뚝한 호위대장 르나르는 내 목에 칼날부터 들이댔잖아요. 황태자가 보낸 가짜 신부니, 감시자니 하면서 나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굴던 게 누구였더라?”

“그건…….”

“그때 내가 ‘당신의 고통을 내가 똑같이 나눠 느끼고 있어요’라고 속삭였다면, 당신은 날 미친년 취급하거나 더 잔혹하게 심문했겠죠. 안 그래요?”

유제스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괴물이라 여겼기에, 타인의 그 어떤 호의도 가식과 음모로 치부하며 밀어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죠.”

나는 쇄골의 낙인을 톡톡 건드리며 유제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을 쫓아 흔들렸다.

“이건 ‘연리의 흑장미’라는 각인이에요. 당신이 마력 폭주로 고통받을 때마다, 혹은 내가 당신의 비밀이나 영지의 핵심 정보에 접근할 때마다, 그 대가로 당신이 겪는 지옥 같은 고통이 실시간으로 내 신경계에 동조돼요. 당신의 저주받은 마력이 폭주하지 않고 억제되는 건, 그 과부하를 내가 육체로 나누어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동조의 대가라고?”

유제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내 어깨를 으스러지게 움켜쥐려다, 이내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 자신이 만지는 것조차 내게 고통이 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내가 날뛸 때마다, 내가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난도질할 때마다 너 역시 같은 고통으로 뼈가 바스러지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지? 왜 나 같은 괴물을 위해 제 수명을 깎아 먹느냔 말이다!”

“착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유제스의 뺨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차가운 살결이 내 손바닥 안에서 가볍게 떨렸다.

“난 당신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성녀가 아니에요. 난 철저하게 내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장사꾼이죠. 내 갈망은 단 하나, 원작의 비참한 단두대 엔딩을 피하고, 그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완벽한 자유와 부를 손에 넣는 것뿐이에요.”

“자유와 부…….”

“네. 그러려면 북부의 거대한 지배자인 당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당신이 광증으로 자멸해 버리면, 내 계약금과 영지 자유 계약서는 공중분해 되잖아요. 내 위자료를 안전하게 챙겨서 먹튀할 때까지는, 당신이 살아서 내 뒤배가 되어줘야 하니까요.”

유제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내 지극히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깊은 안도와 집착으로 불타올랐다.

“위자료…… 먹튀 방지라.”

“그래요.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죽어버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내 투자금 회수는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

“하.”

유제스가 바람 빠진 소리로 실소했다. 하지만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법이다, 엘디아. 이 지독한 동조가 계속되는 한 너와 나는 영혼의 끈으로 묶여 있으니까.”

“그러니까요! 아주 끔찍하고도 완벽한 공동 운명체죠. 그러니 서로 몸 사리며 조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티키타카를 주고받듯 빠르게 쏘아붙였다. 유제스는 내 당돌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다시금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시선이 내 침대 옆 탁자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흘 전 박살 나 은 조각으로 변해버린 식기들과, 푸른빛이 도는 기묘한 액체가 담긴 깨진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바벨의 방에서 찾아낸 것이다.”

유제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쓰러지기 직전 경고했던 그 진통 촉진제…… 황실에서 내게 매달 보내오던 비술제 말이다.”

“맞아요. 그건 진통제가 아니라 가짜였어요.”

나는 차갑게 은식기 조각들을 노려보았다.

“그 약의 진짜 이름은 ‘레테의 눈물’. 마력을 안정시키는 척하면서 복용자의 신경계를 서서히 파괴하고 우울증을 극대화해 자멸하게 만드는 황실 특제의 만성 독약이죠. 당신의 주치의였던 바벨은 그 독약을 당신에게 지속적으로 투여하며 황실과 내통하고 있었어요. 사흘 전, 내 상태창…… 아니, 내 촉이 그 은식기 부식 반응과 위협 파동을 잡아내지 않았다면 당신은 평생 그 독을 삼키다 미쳐 죽었을 거예요.”

유제스의 주먹이 으스러질 듯 쥐어졌다. 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고,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바벨 그놈은 이미 지하 감옥에서 르나르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있다. 황실의 개새끼들이 내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나는 침대 옆 가방에서 묵직한 비취 흑장미 빗을 꺼내 들었다. 계모 베아트리스가 이송 마차에서 내게 강제로 쥐여주었던 그 불길한 물건이었다.

“이 빗속에는 치명적인 신경 가스 침이 숨겨져 있었어요. 사흘 전, 내가 저주 동조로 정신을 잃어가던 그 찰나의 순간…… 성내에 침투해 있던 백작가의 은밀한 자객들이 나를 암살하고 누명을 씌우려 했죠. 다행히 쓰러지기 직전 이 비취 빗의 독침 장치를 리버스 작동시켜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어요. 르나르가 남은 자들을 생포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쓰였죠.”

유제스의 눈동자가 살기로 붉게 타올랐다. 그는 내가 처했던 위험과, 자신의 곁에서 홀로 싸워온 흔적들을 마주하며 짓눌린 괴성을 삼켰다.

“황실과 베르제 백작가…… 그 버러지 같은 자들이 내 눈과 귀를 가리고 내 반려를 죽이려 들었군.”

그가 내 손을 다시 한번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하게.

“이 가혹한 법칙의 모순을 기필코 깨부수겠다. 엘디아, 네 낙인이 만개하여 너를 삼키게 두지 않아. 황태자 줄리안이 숨겨둔 고대 서판의 실마리가 필요하다. 카르텐 가문의 어둠을 완벽히 통제하고, 내 심장에 걸린 황혈의 지하실 족쇄를 끊어내 마력을 영원히 봉인할 수만 있다면…….”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집착은 이제 자멸이 아닌, 나를 살리기 위한 맹렬한 투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던 괴물이, 나를 지키기 위해 지옥의 불꽃을 길들이려 하고 있었다.

[★ SYSTEM INFO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가 굳건히 유지되며 집착도가 심화됩니다! (호감도: 87%) 내면의 상태: ‘네가 내 고통을 짊어진 대가라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없애버릴 것이다. 나를 살렸으니 책임져라, 엘디아. 너는 영원히 내 품 안에서만 숨 쉬어야 한다.’

그의 상태창에 떠오른 붉은 글씨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지만, 동시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이 남자의 집착은 이제 완벽한 내 무기이자 방패였다.

“르나르!”

유제스가 문밖을 향해 매섭게 호령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과묵한 호위대장 르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주군.”

“성 안의 모든 기사단과 시종들을 대연회장으로 집합시켜라.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알겠습니다.”

유제스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자, 나의 공자비. 이제 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 미련한 것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켜 줄 때가 되었다.”

***

웅장한 대연회장.

높은 천장 아래로 샹들리에의 촛불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방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걸치고 있는 것은 묵직한 진홍빛 벨벳 케이프였다. 그 아래로 드러난 실크 드레스의 텍스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럽게 쓰러지며 우아한 광택을 냈다. 쇄골을 장식한 은사 자수와 가슴팍의 백금 브로치가 촛불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였다.

단상 위에 올라서자, 연회장 바닥을 가득 메운 백 명이 넘는 기사들과 수십 명의 시종들이 긴장한 안색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유제스는 내 손을 잡은 채,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연회장을 압도했다.

“모두 들어라.”

그의 묵직한 저음이 넓은 연회장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선 엘디아 베르제는 한낱 정략결혼의 인질이나 가짜 신부가 아니다. 그녀는 나와 온 신경망과 생명을 공유하는, 유일무이한 카르텐의 진정한 공자비이자 이 성의 전권 대리다.”

가신들과 기사들 사이에서 나직한 술렁임이 일었다. 하지만 유제스의 매서운 눈빛이 채찍처럼 내리치자, 술렁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 유제스 카르텐의 명령이다. 앞으로 공자비의 명령은 곧 나의 명령이다. 그녀의 뜻에 거역하거나 불경을 저지르는 자는 곧 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그 자리에서 참수할 것이다. 성의 모든 열쇠와 군권, 내정 전권은 오직 그녀의 손끝에서 움직인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오만하면서도 오직 나만을 향한 지독한 헌신이 담겨 있었다.

“기사단장, 그리고 호위대장. 무릎을 꿇어라.”

가장 먼저 호위대장 르나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을 바닥에 꽂았다. 쇠가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카르텐의 칼날은 오직 공자비 전하의 안위와 명령만을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무한한 절대 복종을 맹세합니다.”

뒤이어 기사단장과 백 명에 달하는 은빛 갑주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갑옷들이 맞부딪히며 내는 철컥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연회장을 휩쓸었다.

“공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절대 복종을 맹세합니다!”

시종들과 하녀들 역시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짜릿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흑장미 성의 진정한 지배자로서 내 지위가 온 영지에 공식적으로 완벽하게 선포되는 격상의 순간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베르제 백작가의 버림받은 서녀로 대할 수 없으리라.

[★ SYSTEM INFO ★] 경축! 메인 퀘스트 ‘영지 장악과 지위 격상’ 성공! 보상: 영지 내 모든 기사 및 가신의 충성도 급상승, 흑장미 동조 부작용(통증) 일시적 억제 상태 돌입!

상태창의 푸른 메시지가 눈앞에 기분 좋게 둥실 떠올랐다. 욱신거리던 쇄골의 통증이 기적처럼 씻겨 내려가듯 가벼워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성벽 전체를 칭칭 휘감고 있던 검은 가시넝쿨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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