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레테의 눈물…….”

가래 끓는 듯한 유제스의 목소리가 흑장미 성의 얼어붙은 대기를 갈랐다.

자신의 검날에 묻은 보랏빛 액체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피빛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자신마저 소멸시키려는 자멸적인 증오였다.

과거 카르텐 가문의 일족을 모조리 미치게 만들어 서로를 도륙하게 만들었던 비열한 황실의 특제 독액. 그리고 주치의 바벨을 통해 매일 밤 유제스 자신에게 ‘마력 안정제’라는 가짜 탈을 쓰고 투여되던 바로 그 맹독이었다.

“줄리안…… 감히 내 가문을 멸하고, 나를 장난감처럼 주물렀단 말이지.”

유제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력이 폭풍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뒹굴던 살수들의 시체가 마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콰득, 소리를 내며 짓눌렸다.

동시에 내 왼쪽 쇄골 아래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앗.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막았다. 쇄골에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낙인이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목덜미를 타고 검붉게 뻗어 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피학적 동조. 유제스의 살의와 고통이 내 신경계를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와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요동쳤다.

[★ SYSTEM WARNING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정신 붕괴도가 한계치를 돌파합니다! 저주의 폭주가 노출됩니다. 동조율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현재 동조율: 52%)

“공작님, 정신 차려요! 그 독은 이미 알아챈 진실일 뿐이잖아요!”

내가 소리쳤지만, 유제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가시넝쿨이 거대한 뱀처럼 솟구쳐 올라 성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쿠구구궁!

단단한 대리석 벽면이 힘없이 바스러지며 굉음을 토해냈다. 천장에서 돌가루와 흙먼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흑장미 성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흐읍, 윽……!”

내 안의 장기들이 한꺼번에 뒤틀리는 감각에 무릎이 꺾였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짓물러 피가 배어 나왔다. 밤하늘빛 실크 드레스의 화려한 자락이 먼지와 피로 더럽혀지는 괴멸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는 머리를 굴려야 했다. 여기서 그가 미쳐 버리면 내 단두대 엔딩 회피 시나리오도, 내 몫으로 챙겨야 할 막대한 위자료와 자유도 전부 공중분해 된다.

“비켜라, 엘디아.”

유제스가 뒤를 돌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괴물의 그것이었다. 검은 불꽃이 그의 양손에서 일렁이며 성벽을 통째로 뜯어낼 기세였다.

“황궁으로 간다. 그 가식적인 황태자의 목을 찢어 발겨 대성당 기둥에 매달아 주지. 나도, 그놈도, 이 더러운 제국도 전부 끝이다.”

“미쳤어요? 지금 가면 자멸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요!”

“상관없다. 어차피 내 목숨 따위, 처음부터 버려진 진흙탕에 불과했으니.”

자멸주의적 복수귀의 본능이 완전히 고삐를 풀었다. 그의 마력 제어가 풀리자 성 내전 전체가 검은 안개와 날카로운 대기 파편으로 가득 찼다.

멀리서 기사들의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기사단장 르나르가 검을 뽑아 쥔 채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작 전하! 멈추십시오! 마력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르나르! 들어오지 마!”

내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기사단을 전부 데리고 내전 밖의 안전 구역으로 대피해! 당장!”

“하지만 부인, 저 폭풍 속으로 혼자 가시겠다는 겁니까? 저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마력이 아닙니다!”

과묵한 르나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르텐 가문의 어둠을 수없이 보아온 호위대장조차도 지금 유제스가 토해내는 살기 앞에서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말 안 들려? 전원 대피하라고 했어! 내 명령이야!”

나는 품 안에서 유제스가 건네주었던 카르텐 가문의 마스터 열쇠를 꺼내 번쩍 들어 올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열쇠가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자, 기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문의 전권을 위임받은 안주인의 서슬 퍼런 외침에, 르나르는 마침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인의 뜻대로. 전원, 내전에서 후퇴한다!”

우르르 멀어지는 기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홀로 남은 검은 폭풍의 한가운데로 발을 내디뎠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검은 마력의 바람이 밤하늘빛 실크 드레스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부드러운 벨벳 안감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칼날에 베이는 듯한 감각이 일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사실 이 습격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베르제 백작가에서 내게 심어두었던 음모를 역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계모 베아트리스가 이송 마차에서 억지로 쥐여주었던 비취 흑장미 빗. 그 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신경 가스 침을, 나는 아까 살수들이 들이닥친 순간 그들의 안면에 정확히 깨뜨려 주었다.

‘날 장님으로 만들려던 독침이, 너희의 눈을 멀게 할 줄은 몰랐겠지.’

가스에 중독되어 비명을 지르며 눈을 쥐어뜯던 살수들의 비참한 몰골이 떠올랐다. 백작부인의 음모를 통쾌하게 리버스하여 살수들의 무력화시켰던 짜릿한 사이다의 감각. 하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남주의 대폭주라는 거대한 해일이 밀려온 것이다.

콰아아앙!

유제스의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번개가 내 발바닥 바로 옆을 강타했다. 대리석 바닥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오지 마라……!”

유제스가 머리를 감싸 쥐며 포효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 모양의 마력 형상이 일렁였다.

“내 안의 뱀들이…… 너마저 씹어 삼킬 것이다. 엘디아, 도망쳐!”

“싫은데요.”

나는 피식 웃었다.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고통이 척추를 타고 뇌를 관통했다. 눈앞이 번쩍이며 붉은 경고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 SYSTEM WARNING ★] 동조율이 60%에 도달했습니다! ※ 경고: 수하의 통각 동조율 60% 진입. 생명 유지 기간이 3개년에서 ‘3개월’로 격하됩니다! ※ 경고: 흑장미 만개율이 임계점에 인접합니다.

‘3개월이라고?’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다. 입안에서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쿨럭!”

바닥에 한 움큼의 붉은 피를 쏟아냈다. 투명한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나듯 피가 번졌다. 뼈마디가 마디마디 부서져 나가는 듯한 극통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력 회복제나 그 어떤 치유 마법으로도 상쇄되지 않는, 영혼을 깎아내는 피학적 동조의 대가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피 묻은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겨우 이까짓 아픔으로 나를 돌려보낼 수 있을 줄 알았어?”

“엘디아…… 너, 피를…….”

유제스의 붉게 충일했던 눈동자에 순간적인 균열이 일었다. 광기와 증오로 가득 찼던 그의 시선이, 내 입가에 흐르는 붉은 피와 찢어진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쇄골의 검은 장미 문양에 멈췄다.

“왜…… 왜 네가 아파하는 거지? 왜 내 저주의 고통이 네게서 흘러나오는 거냐!”

“말했잖아. 우리는 계약 관계라고.”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코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검은 폭풍이 내 피부를 찢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 전신을 감싸 안는 검은 마력의 가시들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스르륵.

피 묻은 내 손가락이 유제스의 차갑게 굳어 있는 뺨바닥에 닿았다.

“그러니까 혼자 멋대로 죽으러 갈 생각 하지 마, 유제스.”

그 순간, 지독한 공명 반응이 일어났다.

[★ SYSTEM INFO ★] 고유 권능 ‘피학적 동조’의 최대 출력이 발동합니다! 상대의 저주 마력을 본체로 강제 흡수 및 동조합니다.

쿠우우웅!

유제스의 가슴팍에서 거칠게 날뛰던 검은 불꽃들이, 내 손끝을 타고 거짓말처럼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제스의 몸을 갉아먹던 어둠의 마력이 내 신경계로 도강하며, 서로의 심장박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기괴하고도 신성한 감각이 몰려왔다.

두근! 두근! 두근!

두 사람의 결합된 마력이 하늘 높이 거대한 검은 빛의 기둥을 쏘아 올렸다. 슈바르츠발트의 영원한 겨울 하늘을 뚫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빛이었다.

“아아아아윽……!”

전신이 불타오르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유제스의 얼굴목덜미를 감싼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내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똑똑히 보았다.

폭풍의 눈 한가운데서, 유제스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증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괴물 같던 어둠의 가시들이 눈 녹듯 사라지며, 오직 나만을 담아내는 맑고도 깊은 흑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아.”

유제스의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성벽을 무너뜨릴 듯 요동치던 검은 가시 폭풍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정적이 찾아온 복도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을 타고 흘렀다.

기사단장 르나르를 비롯해 멀찍이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누구도 진정시키지 못했던, 한 번 폭주하면 영지의 절반을 날려버려야 끝이 나던 공작의 광증이, 겨우 한 명의 여인에 의해 완벽하게 진압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고통을 고스란히 나누어 가지는 기적 같은 방식으로.

“공작…… 부인께서…….”

르나르의 목소리가 경외감으로 떨렸다. 기사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엘디아 베르제는 황실에서 보낸 감시자나 가짜 신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흑장미 성의 진정한 지배자이자, 괴물을 잠재운 유일한 구원자였다.

툭.

유제스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거구의 사내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내 피 묻은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은 절망과 경악, 그리고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집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째서…….”

유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내 지옥을 네가 대신 짊어지는 거지? 왜 나 같은 괴물을 위해 네 목숨을 갉아먹는 거냔 말이다, 엘디아!”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드레스 소매로 대충 훔쳐내며, 차갑고도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각하지 마요. 난 당신을 위해 희생하는 성녀 따위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당신이 죽으면 내 계약금과 영지 자유 계약서가 날아가잖아. 난 내 이득을 위해 행동할 뿐이야.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내 차가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유제스의 눈빛은 더욱 깊은 나락으로 침잠했다. 그는 내 피 묻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자신의 입술을 간절하게 문질렀다. 마치 신성한 성물에 입을 맞추는 광신도처럼.

[★ SYSTEM INFO ★] 대상 ‘유제스 카르텐’의 호감도가 한계를 초과하여 폭발합니다! (호감도: 85%) 내면의 상태: ‘이 고통을 나누어 가진 순간, 내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다. 네가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기꺼이 뼈까지 내어주지. 하지만…… 날 두고 떠나려 한다면, 난 이 세상을 부수고 너를 내 품에 가둘 것이다.’

그의 상태창에 떠오른 붉은 글씨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구원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착의 족쇄였다.

유제스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내 입가에 남아 있는 붉은 피 자국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가 불을 지른 듯 뜨거웠다.

“내 고통을 가져가는 미련한 녀석아…….”

그가 내 목덜미까지 뻗어 나온 검은 흑장미 낙인을 응시하며,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억해라. 너를 잃는 날, 나는 정말로 온 세상을 불태우고 나 자신마저 지옥으로 던질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내 곁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무시무시한 소유욕을 마주한 순간, 내 쇄골의 장미 낙인이 다시 한번 기묘한 맥박을 치며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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