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르륵, 붉은 핏기가 가신 입술 위로 차가운 욕실의 조명이 내려앉았다.
거울 속의 사내는 낯설었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생기도, 온기도 머물지 않았다. 손끝을 대어 보아도 살갗의 감촉조차 무뎌져 있었다. 어플을 사용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대가, 영혼의 마모가 임계점에 달하고 있음을 육체가 먼저 증명하고 있었다.
진우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세면대 옆에 놓인 손소독제를 눌렀다.
꾹.
투명하고 미끈거리는 젤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알코올의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결벽증 환자처럼 손가락 사이사이를 강박적으로 문질렀다. 가죽을 벗겨내듯 집요한 손길이었지만, 가슴속의 서늘한 공동(空洞)은 채워지지 않았다.
"민아……."
어금니 사이로 새어 나온 이름이 욕실의 타일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한때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그 이름이, 이제는 박제된 활자처럼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목적의식만이 뇌리에 각인된 기계적 명령어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지독할 정도의 냉소와 생존 본능이었다.
진우는 젖은 손을 대충 털어내고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손끝에 걸린 것은 차갑고 묵직한 금속 덩어리였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의 깊은 구석에서 찾아냈던, 정체불명의 녹슨 구리 열쇠.
그 순간, 주머니 속의 열쇠가 기이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상이라도 입힐 것처럼 이글거리는 열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열쇠를 꺼내 들었다. 시퍼런 녹이 슬어 있던 낡은 열쇠의 표면에서 미세한 붉은 광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웅, 웅, 웅…….
금속의 울림이 뼈마디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잡동사니가 아니었다. 진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사선으로 내리치는 도로 너머, 거대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그랜드 디스토피아' 호텔이 보였다.
열쇠의 진동은 정확히 그 호텔을 향하고 있었다.
"13층……."
진우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일반적인 엘리베이터의 버튼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인간의 인지 체계 밖으로 밀려난 회색의 구역. 지하철역에서 얻은 이 녹슨 구리 열쇠는, 그 숨겨진 13층의 봉인된 물리 공간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이자 잠금장치와 공명하는 매개체였다.
진우는 열쇠를 움켜쥐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방을 나섰다.
빗방울이 가죽 재킷을 사정없이 때리는 외곽 도로는 기괴할 정도로 한적했다. 도심 한복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가로등은 누런 불빛을 깜빡이며 비틀거리는 그림자들을 도로 위에 길게 늘어뜨렸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째깍, 째깍, 째깍…….
빗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금속성 마찰음이 끼어들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고막을 송곳처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단절되었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공중에 그대로 멈춰 섰다.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허공에 매달린 투명한 구슬처럼 정지해 있었다. 바람도, 대기의 흐름도, 시간마저도 얼어붙은 세계.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운 얼굴을 한 존재. 지옥의 감사관이자 사금융 추심원인 No.04였다.
그는 왼손에 금색 회중시계를 쥐고 있었다. 시계의 초침은 정각보다 항상 4분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의 시공간을 제멋대로 비틀고 있었다.
"규칙 위반자는 정산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요."
No.04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하고 가학적이었다.
"강진우 씨. 당신이 꼼수로 피해 간 채무의 이자가 복리로 쌓였습니다. 오늘이야말로 그 영혼의 잔금을 완벽히 회수해 가겠습니다."
그가 회중시계를 툭 누르자, 공중에 멈춰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칼날로 변해 진우를 향해 쏘아져 내렸다.
진우는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도시괴담록' 어플을 구동하려 했다.
[경고: 감사관의 권한으로 시스템의 일부 기능이 잠금 처리됩니다.] [현재 인벤토리 및 괴담 소환 기능 사용 불가.]
붉은색 경고등이 액정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앗……!"
소환해 둔 '소리 귀신'이나 다른 괴담 자원들이 먹통이 되었다. 무기가 봉인된 상태에서, 시공간을 찢고 날아오는 칼날 같은 빗방울들이 진우의 몸을 덮쳤다.
서둘러 몸을 비틀었지만, No.04가 지배하는 4분 빠른 시간의 영역 안에서는 육체의 반응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렸다.
퍼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진우의 오른쪽 어깨뼈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극심한 통증이 신경망을 타고 뇌로 직행했다.
"크윽……!"
진우는 비틀거리며 아스팔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안에서 비린 피가 울컥 올랐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멈춰 버린 빗물과 섞여 기묘한 무늬를 그렸다.
No.04는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겹쳐 들렸다.
"인간의 미천한 지혜로 지옥의 장부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당신의 그 오만함이 결국 파멸을 부른 겁니다."
그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돌렸다. 대기 중의 수분이 다시 한번 날카로운 송곳의 형태로 응축되어 진우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등 뒤에 바짝 다가온 순간이었다. 어깨의 통증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진우의 차가운 이성은 멈추지 않았다.
'포기할 순 없다. 민아를…… 그곳에서 꺼내야 해.'
감정은 지워졌을지언정, 각인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진우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움켜쥐었다. 화면의 하단,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극소형의 독소 조항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제3자의 귀속 소속 영혼은 양도 시 우선 면책권이 부여된다…….'
4화에서 발견했던, 어플의 이용약관 최하단에 숨겨진 악마적 루프홀이었다.
진우는 이 조항의 규칙을 역역학으로 재해석했다. 제3자의 영혼을 양도하는 대가로, 현재 걸려 있는 시스템의 잠금과 제약을 일시적으로 면책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즉시 바칠 수 있는 타인의 영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가장 소중한 기억을 제3자의 자산으로 간주하여 즉석에서 거래의 제물로 던지는 것.
[시스템 거래 요청: '강진우'의 기억 자산 중 일부를 영혼 가치로 환산하여 긴급 불입합니다.] [거래 대상 기억: 첫 돌 사진 속 따스한 부모님의 품과 웃음소리.]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듯한 끔찍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방,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부모님의 얼굴, 그리고 아기였던 동생의 옹알이 소리……. 그 모든 기억이 마치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어플의 가상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정신적 충격이 몰려왔지만, 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규칙대로…… 정산한다."
[긴급 세금 공제 완료.] [면책권 발동. 감사관 No.04의 시스템 잠금 기능이 3초간 해제됩니다.]
"무엇을……!"
No.04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서렸다.
그 찰나의 순간, 진우는 인벤토리에서 '소리 귀신'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하고 방출했다.
"찢어발겨."
진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은 형상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음파와 물리적 질량을 동반한 폭풍이었다.
콰아아아앙!
소리 귀신의 거대한 울부짖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No.04가 구축해 놓은 4분 빠른 시공간의 결계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멈춰 있던 공기와 빗줄기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 이럴 수가……! 감히 시스템의 대리인에게 반역을……!"
No.04가 뒤로 밀려나며 중심을 잃었다. 그의 금색 회중시계의 유리가 쩍 갈라지며 바늘들이 제멋대로 돌기 시작했다.
진우는 으스러진 어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닦아내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잔혹했다.
"너희들이 만든 법이다."
진우가 냉혹하게 읊조렸다.
"나는 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을 뿐이야. 블랙컨슈머에게 당한 소감이 어떠냐, 감사관?"
그가 역공으로 No.04에게 돌진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파지직, 파직!
찢겨 나간 시공간의 결계 틈새에서, 평범한 현실의 풍경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의 심연이 드러났다. 그 틈새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은 지독한 썩은 내와 오컬트적인 마력이 융합된 이계의 기운이었다.
시공간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중력을 거스르는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균열의 중심부에서 휘몰아쳤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과 아스팔트 파편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No.04 역시 깨진 회중시계를 쥔 채 소용돌이의 인력에 휘말려 비틀거렸다.
"이 공간은…… 망각의 대성당의 심층부와 연결된……!"
그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흐릿하게 흩어졌다.
소용돌이의 흡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깨뼈가 부서진 진우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주머니 속의 녹슨 구리 열쇠가 다시 한번 광폭하게 진동하며, 소용돌이 너머의 어둠과 완벽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진우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대신,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그 어둠의 심연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가자…… 민아를 찾으러."
마침내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진우와 감사관 No.04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속으로 추락하며, 진우의 의식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외곽 도로에는, 오직 차가운 빗줄기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추락은 끝이 없었다. 어둠 속을 낙하하는 감각은 마치 끈적한 타르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것처럼 무겁고 불쾌했다.
귓가를 때리던 거센 바람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대신 비린내 나는 흙먼지와 오래된 성당의 제단에서나 풍길 법한, 썩은 라일락 향이 융합된 기괴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쿵!
진우의 몸이 딱딱한 석조 바닥 위로 곤두박질쳤다. 으스러진 오른쪽 어깨가 바닥에 부딪히며 전신을 관통하는 비명이 이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윽……!"
신음조차 길게 내뱉지 못한 채, 진우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촉감은 차갑고 축축한 대리석이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이따금 허공에서 붉은빛을 띠는 인광(隣光)이 명멸하며 거대한 공간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과 그곳을 떠받치고 있는 뒤틀린 석조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둥의 표면에는 수많은 인간의 얼굴 형상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채 조각되어 있었다. 아니, 조각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들려오는 신음과 눈동자의 움직임이 그것들이 살아 있는 영혼의 잔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망각의 대성당. 비화회가 도심의 공포를 양분 삼아 건설하고 있던, 오컬트의 심장부이자 심층 구역이었다.
"……진우 씨."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No.04가 서 있었다. 그의 완벽하던 정장은 곳곳이 찢겨 있었고, 기계적이던 얼굴 오른편에는 실핏줄처럼 붉은 균열이 가 있었다. 그가 쥔 금색 회중시계는 유리가 완전히 박살 난 채, 초침이 앞뒤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곳은…… 시스템의 감시가 닿지 않는 무법 구역이군요."
No.04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기계적인 사무원 같던 태도 대신, 억눌러 왔던 가학적인 본성이 노골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사관으로서의 제약도, 당신이 매달리던 어플의 안전 수칙도 이곳에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즉, 제가 당신을 여기서 찢어 죽여도 지옥의 세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가 천천히 진우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디딜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붉은 피 같은 액체가 번져 나갔다.
진우는 왼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스마트폰을 켜려 했다. 하지만 액정은 노이즈로 가득 찬 채, 어떤 화면도 제대로 띄우지 못했다.
[치명적 오류: 차원 인과율 왜곡 구역 진입.] [시스템과의 연결이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남은 정산 기한: 00:03:12……]
정산 기한이 3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끝나면 어플에 수록된 모든 원혼이 폭주해 진우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터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깨는 쓸 수 없고, 무기는 봉인되었으며, 앞에는 살의를 품은 지옥의 감사관이 서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계산만이 번득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녹슨 구리 열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열쇠는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 진동을 멈췄지만, 대신 기괴할 정도로 푸른빛을 내뿜으며 바닥의 특정 기하학적 문양과 완벽한 각도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대성당의 입구라면…….'
진우는 두뇌를 풀가동했다. 비화회가 이 거대한 괴담의 랜드마크를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외부의 인과율을 수급하는 '절대적인 규칙'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사관 No.04 역시 지옥의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다. 시스템의 규율이 정지된 무법지대라 할지라도, '계약의 본질'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진우는 으스러진 어깨의 통증을 억누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왼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꾹.
알코올 젤을 상처 부위에 사정없이 문질렀다. 피와 젤이 섞이며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지독한 소독 향이 피비린내를 덮어씌웠다. 결벽증적인 정화 의식이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극단적인 자해였다.
"No.04."
진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시계가 왜 망가졌는지 아나?"
No.04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기괴한 얼굴이 비틀렸다.
"시간의 왜곡 때문이 아닙니다."
진우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핏기가 없어 푸르스름했지만, 눈빛만큼은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이 공간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망각'의 영역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4분 빠르게' 흐르는 네 시계는 존재 자체로 모순이지. 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이제 허수(虛數)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채무를 독촉하는 것은 지옥의 세법 제7조, '존재하지 않는 자산에 대한 과세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
"……!"
"그리고 지금 내 어플의 정산 기한 역시 마찬가지야."
진우는 액정이 깨진 스마트폰을 No.04에게 보여주었다. 화면 속의 타이머가 '00:03:12'에서 멈춘 채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에, 정산 기한 역시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루프에 갇힌 것이다.
"시간이 멈춘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기한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존재하지 않는 채권을 추심하려 한 죄로, 대성당의 인과율 시스템에 '불법 추심자'로 등록되었지."
그 순간, 대리석 바닥의 기하학적 문양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우가 쥐고 있던 녹슨 구리 열쇠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No.04의 발밑을 가리켰다. 대성당의 기둥에 박혀 있던 살아 있는 영혼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No.04를 향해 기괴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이, 이 벌레 같은 인간이……!"
No.04의 몸이 바닥에서 솟구친 붉은 사슬들에 결박되기 시작했다. 대성당 자체의 방어 기제가 그를 '시스템의 침입자'이자 '불법 거래자'로 규정하고 배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우는 그 광경을 냉혹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승리의 미소를 지을 틈은 없었다.
징—!
진우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갑자기 미친 듯이 발열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노이즈가 걷히며, 피로 쓴 듯한 붉은 글씨가 빠르게 떠올랐다.
[경고: 감사관 배제에 따른 인과율의 공백 발생.] [시스템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3자 면책 조항을 강제 집행합니다.] [강진우의 남은 자아와 기억의 90%가 '망각의 대성당' 소유권 이전을 위한 담보로 동결됩니다.]
"……앗."
뇌가 통째로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진우를 덮쳤다.
자신의 이름, 여동생의 얼굴,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조차 혼미해지는 극단의 망각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제 발로 들어온 이 성당이, 이제는 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대성당의 안쪽 문이 서서히 열리며 정체불명의 흰 그림자가 진우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