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시공간의 틈새는 칠흑 같은 아가리였다.
그것은 자비 없이 모든 존재를 빨아들였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모래처럼 바스러지며 허공으로 흩어졌고, 그 파편들 사이로 지독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중력의 방향이 뒤틀려 사방이 위아래를 분간할 수 없는 혼돈으로 변했다.
"아아아아아아—!"
붉은 사슬에 온몸이 결박된 지옥 감사관 No.04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정장을 입은 그의 육신이 사슬에 쪼개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고, 그 비명은 시공간의 왜곡 속에서 기괴하게 늘어지며 고막을 찔렀다.
진우 역시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사정없이 추락했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 그리고 영혼을 직접 긁어내리는 듯한 이계의 파동이 전신을 덮쳤다. 눈앞이 멀어버릴 것 같은 암전 속에서, 진우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통째로 붕괴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쿵—!
얼마나 떨어졌을까. 등 뒤로 가해지는 둔탁하고 강한 충격에 허파에 차 있던 공기가 단숨에 빠져나갔다.
진우는 거친 흙먼지 바닥을 굴렀다. 차갑고, 축축하며,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바닥이었다. 사방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에 짓눌려 있었다. 멀리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불규칙한 박자로 고요함을 흔들 뿐이었다.
"……윽."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기분 나쁜 점액질과 거친 먼지의 감촉에 본능적인 혐오감이 치밀었다. 평소라면 즉시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몇 번이고 문질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이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내려가고 있었다. 단순한 냉정이 아니었다. 뇌세포의 일부가 강제로 도려내 지는 듯한, 영혼의 밑바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극심한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흘렀다.
[경고: 감사관 배제에 따른 인과율의 공백 발생.] [시스템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3자 면책 조항을 강제 집행합니다.] [강진우의 남은 자아와 기억의 90%가 '망각의 대성당' 소유권 이전을 위한 담보로 동결됩니다.]
눈앞에 명멸하는 스마트폰의 붉은 경고등이 그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아주 소중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의 파편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첫 번째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을 때, 진우는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 그 가장 근원적인 동기가 안개 너머로 사려져 가고 있었다.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단발머리에,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누군가의 실루엣.
'이 이름은…… 뭐였지? 분명…….'
기억해 내려 할수록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의 텍스트들이 전부 깨진 외계어처럼 변해갔다. 동생. 그래, 내게 동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이, 그 아이의 목소리가, 그 아이와 함께 보냈던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방 한 칸의 기억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아…… 윽……!"
진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자아의 90%가 동결된다는 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축적해 온 모든 인격과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대로 몇 분만 더 지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이 어두운 성당의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짐승이나 원혼으로 전락할 터였다.
그때였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맹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거움에 진우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낡고 녹슨 구리 열쇠였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서 발견했던, 쓸모없는 잡동사니인 줄만 알았던 그 구리 열쇠가 지금 이 순간 미친 듯이 공명하고 있었다. 열쇠의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붉은 빛을 발하며 요동쳤다.
징—!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번져 나갔다. 그 구리 열쇠가 뿜어내는 기운은 놀랍게도 이 그랜드 디스토피아 호텔의 숨겨진 13층, 그 기괴한 물리 공간의 잠금장치와 정확히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고 있었다.
열쇠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공간의 왜곡이 고정되었다. 흔들리던 대성당 심층부의 차원적 균열이 이 열쇠의 공명 덕분에 비로소 하나의 단단한 물리적 좌표로 묶이기 시작한 것이다. 열쇠는 이계의 폭풍 속에서 진우의 영혼이 완전히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일종의 닻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열쇠가…… 공간을 고정하고 있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진우의 이성이 번뜩였다.
열쇠 덕분에 육체는 이곳에 묶였지만, 머릿속을 갉아먹는 시스템의 침식은 멈추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의 타이머는 여전히 붉은빛을 발하며 그의 영혼을 정산하려 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자아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이 구조적 모순을 깨부수어야 한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액정에 묻은 자신의 피가 화면의 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졌다. 그는 결벽증적으로 피를 닦아내려다, 이내 손을 멈추고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도시괴담록의 시스템 어플리케이션.
그 무한한 약관의 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결코 읽지 않고 넘겼을, 수만 장에 달하는 지옥의 계약서 내용이 진우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뇌세포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약관의 텍스트들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존재한다…… 악마들이 만든 규칙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예외 조항이 존재해…….'
그리고 마침내, 약관의 가장 어둡고 깊은 최하단, 일반적인 스크롤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미세한 폰트로 적힌 독소 조항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제3자의 귀속 소속 영혼은 양도 시 우선 면책권이 부여된다.]
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찾았다……."
이 조항의 본질은 간단했다. 지옥의 시스템은 이미 자신들의 자산으로 등록된 '제3자의 영혼'이 타인에게 양도되거나 소실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자산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금융적 보호 조항이었다.
그리고 진우의 도시괴담록 어플 임시 대기실과 자원 창고에는, 그동안 그가 목숨을 걸고 포획하고 봉인한 수많은 괴담 자원들과 그 과정에서 얽힌 소유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장님 노파', '소리 귀신' 등 그가 부리던 강력한 원혼들, 그리고 거래 관계를 통해 확보한 영적 권리들.
그것들은 전부 시스템상 '제3자의 귀속 소속 영혼'으로 분류된다.
진우는 주저 없이 어플의 관리자 권한을 강제로 실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 구조, 즉 뇌세포의 기억 장치와 영혼의 핵심 네트워크를 이 '제3자 영혼 자원들'과 강제로 매핑(Mapping)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을 단순한 '인간 강진우의 사적 자산'이 아니라, '어플에 귀속된 제3자 영혼들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인프라 및 부속 영혼'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만약 시스템이 강진우의 자아와 기억을 90% 동결하여 지워버린다면, 그와 연결된 수많은 괴담 자산들의 인과율 역시 도미노처럼 붕괴하여 영구 소실될 터였다.
즉, "나를 건드리면 너희가 소유한 양질의 괴담 자산들도 전부 파산한다"는 식의 악질적인 블랙컨슈머식 역협박이었다.
윙—!
스마트폰이 터질 것처럼 진동했다. 화면이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거칠게 깜빡이며 시스템 에러를 뿜어냈다.
[시스템 오류: 자산 가치 평가 충돌.] [경고: 관리자의 기억 소실 시, 귀속된 괴담 자원 '장님 노파외 3종'의 인과율 보존율이 2% 이하로 급감합니다.] [지옥 세법 및 자산보호법 제14조에 의거, 제3자 귀속 소속 영혼의 보존 우선권이 강제 발동됩니다.]
바르르 떨리던 화면이 이내 정지했다.
[강진우 님의 자아 및 기억 동결 처리가 일시 면책(유예)됩니다.] [담보 설정이 해제됩니다.]
"……하."
진우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뇌를 짓누르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같은 압박감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흐려졌던 시야가 극도로 선명해지기 속도로 돌아왔고, 지워지던 기억들이 제자리를 찾아 뇌리에 박혔다.
강민아.
여동생의 이름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비화회에게 납치당하던 그 비극적인 밤의 기억이 아주 또렷하게 수복되었다.
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손바닥에 듬뿍 짰다. 알코올의 알싸한 향이 차가운 공기 중에 퍼지며, 손에 묻은 더러운 먼지들을 녹여냈다. 손을 비벼 닦는 그의 행동은 지극히 결벽적이었고, 그 모습은 이 기괴한 공간과 지독한 대조를 이루었다.
"감히 내 기억을 담보로 잡아……?"
진우는 낮게 읊조렸다.
지옥의 시스템조차 법률과 계약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저 고용주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우는 그 고용주의 허점을 가장 잘 파고드는 최악의 계약자였다.
정신을 차린 진우는 비로소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에 들어온 대성당 심층부의 풍경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사방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고딕 양식의 기둥들은 석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의 유골과 마른 가죽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살아 숨 쉬는 기둥들이었다. 기둥의 표면에서 미세한 흐느낌과 비명이 바람 소리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면에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입은 하나같이 벌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검은 액체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곳은 단순한 종교적 건축물이 아니었다.
"이건…… 거대한 영적 감옥이군."
진우는 단번에 간파했다.
이 성당은 도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 결핍, 그리고 헛된 소망들을 왜곡하여 빨아들이는 거대한 깔때기였다. 비화회는 도심 곳곳에 괴담을 유포하고, 그 공포와 열망을 동력원으로 삼아 이 성당의 뼈대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성당의 가장 깊은 심장부에, 그의 여동생 민아가 갇혀 있을 터였다.
스르릉.
품 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향기가 있었다. 비화회 조직원이 떨어뜨렸던 라일락 향수병. 진우는 그것을 꺼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지독한 부패취와 곰팡이 냄새 속에서, 아주 가냘프고 이질적인 라일락 향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민아가 납치당할 때 지니고 있던 소지품의 향이었다.
향기는 이 어둡고 습한 회랑의 안쪽, 즉 성당의 중심부를 향해 아주 미세한 실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거기 있군."
진우는 스마트폰을 켜고 도시괴담록의 지도 기능을 활성화했다.
이전에는 먹통이었던 지도가, 시스템의 면책 조항을 우회 수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과율의 균열 덕분에 하얗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노이즈가 심하게 끼긴 했지만, 성당 전체의 입체적인 구조가 렌더링되어 나타났다.
진우는 차가운 눈으로 지도를 분석했다.
[속죄의 회랑]을 지나 [통곡의 예배당],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망각의 대성당 중앙 제단].
각 구역의 이름과 함께, 붉은 점들로 표시된 경계 근무 중인 비화회 사교도들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었다. 그들의 순찰 루트, 그리고 침입자가 발생했을 때 그들이 퇴각할 수 있는 비밀 통로와 퇴로까지 전부 역추적하여 어플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버렸다.
이제 이 성당 내에서 비화회 놈들은 진우의 손바닥 위의 말에 불과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쥐새끼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미로 속에서 사냥당할 터였다.
진우는 구리 열쇠를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서늘한 메아리를 남겼다.
또각. 또각.
소리가 회랑을 따라 길게 뻗어 나갈 때마다, 벽면에 박힌 영혼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가 속죄의 회랑을 지나 거대한 아치형 문을 열었을 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성당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요동쳤다.
저 멀리 성당 중앙,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게 솟아오른 파이프오르간이 보였다. 그 파이프들은 청동이 아니라 거대한 짐승의 척추뼈를 이어 붙인 듯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오르간에서 조율되지 않은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귀를 찢는 듯한 고음과 심장을 울리는 저음이 뒤섞인 기괴한 연주였다. 그 소리와 함께, 오르간 주변의 바닥에서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불길한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오르간의 건반 앞, 단상 위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나긋나긋한 미소,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사제복을 입은 남자.
비화회의 총수, 천도윤이었다.
그는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진우를 향해 조롱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성당 전체의 음향 설비를 타고 진우의 귓가에 번졌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군요, 강진우 씨…… 자아를 잃고 미쳐버린 괴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리한 벌레였습니다……."
천도윤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희번덕거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이 성당의 마지막 나사가 지금 막 맞춰졌으니까요……."
그의 손가락이 오르간의 마지막 건반을 내리누르는 순간, 진우의 등 뒤로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