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거울이 깨져 나간 틈새로 쏟아진 바람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무너진 철판과 유리 파편이 바닥에 나뒹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엘리베이터의 좁은 상자 안에 갇혀 있던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오래된 무덤에서나 날 법한 눅눅한 흙먼지와 비린 가죽 냄새였다.

진우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의 왼쪽 눈은 이미 완전한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빛을 잃은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고, 오직 오른쪽 눈만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고 있던 녹슨 구리 열쇠가 기이한 진동을 멈추고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서 건져 올렸던 그 쓸모없어 보이던 고철 조각. 그것이 이 호텔의 숨겨진 13층, 물리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회색의 구역’의 자물쇠와 이토록 완벽하게 공명할 줄은 몰랐다. 열쇠가 제어판의 틈새에 박혀 인과율을 비틀어 버린 덕분에, 비화회가 겹겹이 쳐두었던 차단 결계가 통째로 뜯겨 나간 것이다.

"진우 씨…… 저기 좀 봐요."

뒤따라오던 한채희가 숨을 죽이며 진우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들이 있었다.

가스등도, 촛불도 아니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푸른 인화(燐火)들이 구부러진 대리석 기둥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아치형 천장이었다. 도심 한복판, 일류 호텔의 지하에 이런 규모의 대성당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초월한 일이었다.

성당의 중앙, 층계식으로 솟아오른 피의 제단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연기 사이로 십여 명의 남녀가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사제복을 뒤집어쓴 채,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음조로 유창하게 주문을 암송하고 있었다.

"……스라, 에크하, 베르투스……."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그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청각을 긁어내리는 듯한 불쾌한 공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 제단 바로 앞에서 붉은 산호로 장식된 지팡이를 쥐고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비화회의 고위 간부이자, 이 구역을 관리하는 교주였다.

교주는 침입자의 존재를 깨달았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나긋나긋하고 얇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이어갈 뿐이었다.

"길 잃은 어린 양들이 제 발로 도살장에 들어왔군."

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품속에서 글록 19 권총을 쥔 채였다.

그는 붕괴된 엘리베이터의 잔해를 성큼성큼 밟고 지나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맑고 차가운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성정은 이 음산한 공간의 먼지와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손소독제를 꺼내려다, 이내 멈추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멈춰라."

제단 아래에 엎드려 있던 신도 중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의 눈꺼풀은 실로 꿰매어져 있었고, 입술은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안의 영혼은 비화회의 주술에 의해 완전히 마모되어 괴물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세 명의 신도가 짐승처럼 네 발로 기며 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손가락 끝에서 자라난 검은 손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비켜."

진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탕! 탕!

망설임 없는 두 발의 총성이 성당 내부를 찢어발겼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신도의 미간과 가슴에 정확히 구멍이 뚫렸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오며 바닥으로 쓰러졌지만, 남은 두 명은 동료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진우의 목덜미를 향해 도약했다.

그 순간, 제단 위의 교주가 지팡이를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쿠웅!

"지옥의 법률에 따라, 이 공간의 인과를 동결하노라. 침입자의 모든 행동은 무(無)로 돌아가리라!"

교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적색의 문자 기호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비화회가 자랑하는 강력한 인과율 차단 저주였다. 공기가 순식간에 납처럼 무거워졌고, 진우의 손가락 끝이 마비되듯 굳어 가기 시작했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 해도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들던 신도들의 손톱이 진우의 목전까지 다다랐다.

한채희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여기서 온몸이 굳어 찢겨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진우의 오른쪽 눈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인과율 차단이라……."

진우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왼손에 쥐어진 스마트폰 화면이 시퍼런 광채를 뿜어냈다.

[도시괴담록]의 액정 위로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요동치며 떠올랐다.

[보유 괴담 자원: '엘리베이터의 장님 노파(속박)'를 방출합니다.] [소모 대가: 사용자의 유년기 기억 일부(초등학교 졸업식의 기억)가 영구 소멸합니다.]

머릿속 한구석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운동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웃으며 찍었던 사진의 잔상이 하얗게 타들어 가며 재가 되었다.

하지만 진우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까짓 쓸모없는 과거의 껍데기 따위, 여동생을 구하는 데 비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되돌려주지."

진우가 중얼거린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회색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두 눈이 멀어 텅 빈 안구에서 진물이 흐르는, 거대한 장님 노파의 형상이었다. 노파는 입을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수천, 수만 가닥의 썩은 회색 실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스스스스슥!

회색 실들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진우를 덮치려던 두 명의 신도의 사지를 허공에서 옭아맸다. 신도들은 실에 닿자마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매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파의 실은 제단 위에서 저주를 시전하던 교주의 온몸으로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이, 이게 무슨……! 내 주술이 역류한다고?!"

교주가 경악하며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회색 실들은 그의 붉은 산호 지팡이를 휘감아 단숨에 동강 내버렸다. 교주가 뿜어내던 적색의 인과율 결계는 장님 노파의 강력한 속박력에 짓눌려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와장창!

결계가 깨지며 발생한 충격파가 제단 전체를 휩쓸었다. 엎드려 주문을 외우던 신도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며 피를 토했다. 단 한 번의 터치, 단 하나의 괴담 자원 방출만으로 비화회의 정교한 방어 주술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이다.

"악!"

교주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온몸을 옥죄는 회색 실들은 피부를 파고들어 붉은 핏자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움직이려 할 때마다 실들이 살점을 파고들어 뼈를 갉아먹는 고통을 선사했다.

진우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제단 계단을 올랐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교주의 비명 소리 위로 차갑게 얹혔다.

"너희들은 항상 규칙을 과신하지."

진우가 교주의 코앞에 멈춰 섰다.

"규칙이란 건 말이야, 더 강한 전제 조건으로 덮어쓰면 그만인 계약서에 불과해. 너희가 만든 결계의 허점은 '외부의 인과'만을 차단한다는 점이었지. 하지만 내 어플에 박제된 괴담은 이미 이 공간의 일부로 동화되어 안쪽에서 발현된 것이다. 계약의 주체를 헷갈린 대가치고는 꽤 아플 거다."

"이…… 괴물 같은 놈……!"

교주가 피를 뱉으며 진우를 노려보았다.

진우는 그를 무시한 채, 제단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단 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함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진우는 유물함으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고서들과 함께, 아주 이질적이고 현대적인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투명한 유리병. 그 안에 담긴 보랏빛 액체.

진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천천히 그 유리병을 집어 올렸다. 마개를 열지 않았음에도, 코끝을 찌르는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라일락 향수였다.

여동생 민아가 납치되던 그날 밤, 그녀의 방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상표, 동일한 향기였다. 비화회의 조직원들이 흘리고 다녔던 그 라일락 향수의 원천이 바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드득.

진우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이 맞물렸다. 그의 눈가에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져 나왔다. 언제나 감정을 잃어버린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손에 쥐인 유리병이 깨질 것처럼 강한 힘이 들어갔다.

"민아……."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살의는 화산의 용암보다 뜨거웠다. 이 향수병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민아가 이 지옥 같은 비화회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진우는 향수병을 품속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리고 거친 몸짓으로 바닥에 쓰러진 교주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컥! 무슨……!"

교주의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진우의 회색빛 왼쪽 눈과 서슬 퍼런 오른쪽 눈이 교주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말해."

진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도윤은 어디 있지? 내 동생은 어디로 보냈나."

"크흑……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비화회의 대업은 이미…… 아아악!"

교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진우가 그의 손가락 하나를 그대로 꺾어 부러뜨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침묵이 내려앉은 성당에 크게 울렸다.

"고문 같은 원시적인 방법은 쓰지 않겠다. 시간이 아까우니까."

진우는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켜고, 화면 하단의 약관을 빠르게 훑었다.

'제3자의 귀속 소속 영혼은 양도 시 우선 면책권이 부여된다.'

4화에서 발견했던 그 독소 조항. 진우는 이 조항의 맹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치러야 할 영혼의 마모를, 이 비화회의 쓰레기 같은 교주의 영혼으로 '대체 정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스템 기능: '강제 영혼 질의'를 활성화합니다.] [대상: 비화회 교주 (영혼 잔존율 72%)] [대체 면책권을 발동하여 정산을 시작합니다.]

"아, 아아아아악! 머리가, 내 머리가!"

교주가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과 코,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플의 보이지 않는 갈고리가 그의 뇌수 깊숙한 곳에 박혀, 기억과 영혼의 정보를 강제로 강탈해 가는 과정이었다.

진우는 그 고통스러운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절규와 고통이 실시간으로 데이터화되어 스마트폰 화면으로 전송되었다.

[정보 추출 완료.] [대상자의 기억 속에서 핵심 좌표를 감지했습니다.] [목적지: 도심 공동묘지 지하, '망각의 대성당' 실시간 정밀 좌표 확보.] [위도: 37.5665, 경도: 126.9780, 지하 40미터 공간.]

"확보했다."

진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교주의 머리채를 놓아버렸다.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먹힌 교주는 눈동자가 뒤집힌 채,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거렸다. 그의 입가에서는 침과 피가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우 씨, 좌표를 얻었으면 어서 여기서 나가요! 기분이 너무 이상해요. 이 공간이 무너질 것 같아요!"

한채희가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제단의 푸른 불꽃들이 급격히 흔들리며 꺼져 가고 있었고, 대성당의 기둥들마다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결계가 깨진 공간은 서서히 지상의 물리 법칙에 의해 짓눌려 붕괴하고 있었다.

"그래. 가자."

진우는 품속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손바닥에 듬뿍 짰다. 교주의 머리채를 잡았던 손에 묻은 더러운 피와 먼지를 씻어내기 위함이었다. 알코올의 독한 향이 퍼지며 그의 차가운 이성을 다시금 깨웠다.

두 사람은 붕괴하는 대성당의 중앙 통로를 타고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무너진 틈새, 지상으로 이어지는 비상 계단 통로가 저 멀리 보였다. 저곳만 빠져나가면 천도윤이 있는 망각의 대성당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동생을 구할 수 있는 진짜 열쇠를 손에 쥔 것이다.

그러나 비상구 문을 밀치고 나가려던 순간.

철컥! 철컥! 철컥!

어둠 속에서 정교하고 차가운 기계음들이 연쇄적으로 울려 퍼졌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수십 개의 붉은 조준용 레이저 포인터가 그의 가슴과 미간, 그리고 한채희의 이마 위에 벌집처럼 얽혀 있었다.

"거기까지다, 무법자."

통로의 어둠을 헤치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색 전술 방탄복을 입고,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특수 제압 부대원들이 그 남자의 등 뒤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장비에는 일반적인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괴한 부적과 은빛 룬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괴담의 인과율을 제압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이능력 격리 장비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사내, 유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특수 권총이 들려 있었다.

유지혁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깊은 적의가 서려 있었다.

"강진우. 네가 어플의 규칙을 해킹해서 이 구역을 콩가루로 만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옥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괴담보다 더 위험한 법이지. 순순히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사살한다."

총구들이 일제히 진우를 향해 전진했다. 사방이 가로막힌 폐쇄된 통로 속에서, 진우의 오른쪽 눈이 다시 한번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