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방울이 가죽 가방 표면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가죽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차가운 수증기와 섞여 코끝을 찔렀다.

액정 화면 가장자리에서 요란하게 요동치던 푸른색 경고등은 이제 신당동 이면도로의 어두운 골목길 전체를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23시 25분.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35분뿐이었다. 골목길 구석구석에 버려진 깨진 기와 조각들과 젖은 연탄재 사이로, 검붉은 밤안개가 낮게 깔려 기어 다녔다. 도심 한복판인데도 이곳은 마치 이승의 경계 바깥에 버려진 폐허처럼 고요했다.

민아의 흔적이 이곳에 존재한다…….

진우는 주머니 속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손바닥에 듬뿍 짰다. 차가운 알코올 액체가 피부를 파고들며 소독되는 감각만이 흐려져 가는 그의 이성을 붙잡아 주는 유일한 닻이었다. 물류창고의 거대한 철문은 붉게 녹슬어 있었고, 그 틈새로 음산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누군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피를 울컥이며 내는 신음 같았다.

철문 앞에는 검은색 우비를 깊게 눌러쓴 사내 둘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소매 깃 아래로 기괴하게 뒤틀린 문신이 얼핏 비쳤다. 비화회의 말단 행동대원들이었다.

사내 하나가 진우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비 모자 그늘 속에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길 잘못 들었으면 곱게 꺼져라, 꼬맹아. 여긴 오늘 영업 안 하니까."

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시선은 사내들의 얼굴이 아닌, 철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푸른색 진동 파동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른 '도시괴담록'의 레이더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경고: 반경 10m 이내에 비화회의 영적 자원 이송 차량 대기 중.] [주변 인물들의 생체 파동에서 미약한 주술적 오염 감지.]

"귀가 처먹었나? 꺼지라고 했다."

다른 사내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서늘한 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갈랐다.

진우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감정이 마모된 자리에 남은 극도의 효율성과 냉혹함이 그의 사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비화회 물류창고 총책임자, 지금 어디 있지?"

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오히려 사내들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품에 손을 넣었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칼날을 뽑아 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사내가 칼을 치켜들고 돌진하는 순간, 진우는 스마트폰 화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어플의 거래 장부 탭이 열리며, 지난번 포획했던 '숨바꼭질 귀신'의 잔재 파편 하나가 허공으로 방출되었다.

파삭.

사내의 눈앞에서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사내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자신의 비명 속에 갇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목을 조르는 듯,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꺼흑! 끄으……!"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경악하며 뒤로 넘어졌다. 진우는 쓰러진 사내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구두굽으로 짓밟았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품속에서 가죽 지갑과 몇 가지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바닥 위로, 낡은 사진 한 장이 뒤집힌 채 떨어졌다.

진우의 시선이 그 사진에 닿았다.

노란색 유치원 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 그 옆에서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민아였다. 그리고 그 옆의 소년은 바로 자신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 무감각증으로 인해 슬픔도, 기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던 가슴 한구석에서, 뜨겁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기이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진우는 짓밟고 있던 사내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사내의 가죽 옷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진우의 손등을 적셨지만, 이번에는 손소독제를 찾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이게 왜 네 주머니에서 나오지?"

사내는 진우의 눈빛에 압도되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 그게…… 위에서…… 수집하라고 한 제물들의…… 신상 정보 자료에…… 힉!"

"민아 어디 있어."

"몰, 몰라요! 진짜 몰라요! 우리는 그냥 오늘 밤 자정에 들어오는 운송 차량에…… 영혼 자원들을 싣기만 하면 된다고……!"

그때였다.

창고 내부에서부터 고막을 찢을 듯한 고주파 음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이—!

마치 수천 마리의 금속 매미가 일제히 우는 듯한, 혹은 유리가 깨지며 서로를 긁어대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었다. 바닥의 빗물이 그 진동에 맞춰 소름 끼치는 동심원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악! 아아악!"

진우의 손에 붙잡혀 있던 사내가 귀를 감싸 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귓구멍과 코끝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안구가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사내는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머리를 시멘트 벽에 찧기 시작했다.

진우 역시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귓가에서 삐 소리가 나며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소리 귀신(音鬼)…….'

비화회가 이 창고의 보안을 위해 심어둔 방어용 악령이었다. 인간의 뇌파와 공명하여 뇌출혈을 일으키는 살상 규칙을 가진 존재. 일반적인 퇴마사라면 귀를 막고 부적을 붙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괴담 개체: 소리 귀신 (C등급)] [살해 규칙: 특정 고주파 음파를 통한 인간 뇌세포 파괴 및 출혈 유도.] [대응 수칙: 물리적 차음(遮音) 혹은 주파수 상쇄.]

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초자연적인 저주라고 해서 대단한 줄 알았더니…… 결국은 그냥 물리적인 파동일 뿐이잖아."

그는 어플의 하단 메뉴를 빠르게 탭했다. 도시괴담록 상점에 등록되어 있던 기능 중 하나가 화면에 활성화되었다.

[도구 사용: 음향 간섭 필터 (WP 500 소모)] [- 대상 공간의 영적 주파수를 역위상(Anti-phase)으로 중화합니다.]

"겨우 500포인트짜리 소음 차단 장치로 막히는 저주라니. 가성비가 떨어지는군."

손가락이 액정을 누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장막이 진우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툭.

세상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귀를 찢을 것 같던 고주파 소음은 이제 두꺼운 이중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다. 진우의 귀에서 흐르던 피가 멈췄다. 반면, 주파수 상쇄 영역 밖에 있던 비화회 대원들은 이미 뇌가 녹아내린 듯 사지를 부르르 떨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사이다처럼 속이 뻥 뚫리는 고요함 속에서, 진우는 천천히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넓은 물류창고 내부는 거대한 목제 궤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궤짝들의 표면에는 기괴한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틈새로 인간의 절규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화회가 도심 곳곳에서 수확한 '괴담 자원'이자 인간들의 영혼 잔재였다.

창고 중앙, 제단처럼 꾸며진 탁자 위에 낡은 라디오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 라디오의 스피커 그릴 틈새로 검은색 연기 같은 형상이 일렁이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소리 귀신의 본체였다.

진우는 라디오 앞으로 다가갔다. 소리 귀신은 자신의 저주가 통하지 않는 인간의 등장에 당황한 듯, 더욱 거세게 진동하며 불협화음을 뿜어냈다. 하지만 진우의 주위에는 완벽한 역위상 필터가 작동하고 있었다. 귀신의 살상 음파는 진우의 몸에 닿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래져 사라졌다.

"시끄러워."

진우는 무감각하게 스마트폰을 라디오 위에 올려놓았다.

[도시괴담록 수록 기능 가동] [- 대상 개체 '소리 귀신'의 봉인 및 자원화 정산을 시작합니다.]

액정 화면에서 강력한 붉은색 흡입력이 소용돌이치며 뻗어 나왔다. 라디오 스피커에서 일렁이던 검은 연기들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스마트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항하려 몸부림치던 귀신의 파동은, 시스템의 절대적인 계약 규칙 앞에서는 한낱 데이터 조각에 불과했다.

스르륵.

마지막 연기 한 자락까지 완벽하게 액정 속으로 수장되었다.

[정산 완료] - 획득 자원: '소리 귀신' (C등급, 보관함 등록 완료) - 획득 보상: 3,000 WP - 소유자 상태: 감정 '공포(恐怖)' 2% 마모.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감각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한 조각 더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진우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더 맑아지고 냉철해지는 기분이었다.

제단 옆에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 물류창고의 현장 총책임자이자 비화회의 중간 간부였다. 그의 품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최신형 스마트폰이 눈에 띄었다.

진우는 사내의 손가락을 강제로 가져다 대어 지문 인식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그 위에 겹쳐 놓았다. 도시괴담록의 해킹 프로토콜이 작동하며, 상대 기기의 모든 데이터를 무단으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타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비화회 최상층부의 극비 연락망과 암호화된 메신저 방이 실시간으로 복구되어 나타났다.

"잡았다……."

진우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여동생이 갇혀 있을 '망각의 대성당'으로 통하는 구체적인 경로와 비화회 고위 간부들의 동선이 고스란히 그의 손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이제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숨통을 하나씩 죄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였다.

진우가 쥐고 있던 해킹된 스마트폰의 화면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웅, 웅, 웅.

기기 자체에서 발생하는 진동이 아니었다. 물류창고 바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면 중앙에 검은색 고딕체 글씨가 떠올랐다. 그것은 비화회의 상층부에서 원격으로 전송한 시스템 강제 제어 명령어였다.

[경고: 비인가 단말기의 데이터 접근 감지.] [보안 프로토콜 '정화(Purge)' 가동.] [알림: 인수 거래 거부 시 3분 후 물류창고 전체 공간 폭파.]

화면 상단에서 붉은색 타이머가 째깍거리며 줄어들기 시작했다.

[02:59] [02:58] [02:57]……

창고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궤짝들의 부적이 붉게 타오르며, 그 안에 갇혀 있던 영적 자원들이 폭발적인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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