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액정 화면 위로 흘러내린 붉은 글씨가 기괴한 빛을 뿜어내며 진우의 창백한 얼굴을 물들였다.

[상태: 거대 도시전설 기동을 위한 핵심 동력원(제물)으로 영구 연결 및 소모 중…….]

화면 한가운데에 박힌 '강민아' 세 글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진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가라앉은 늪지대처럼 고요했고, 동요의 기색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감정의 마모가 가져온 지독한 무감각증은 혈육의 끔찍한 비극 앞에서도 그를 냉정하게 유지시켰다. 슬픔이나 분노 대신, 머릿속에서는 오직 차가운 기계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상황을 분석하는 논리 회로만이 빠르게 작동하고 있었다.

"망각의 대성당……."

나지막이 읊조리는 진우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신설동역 지하 3층, 버려진 유령 승강장의 공기는 여전히 뼛속까지 시렸다. 귀신은 사라졌지만, 공간을 가두고 있는 기괴한 뒤틀림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벽면의 타일 틈새에서는 정체 모를 검은 액체가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우는 스마트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잔존 공간 인과율 분석 중…….] [탈출 규칙: '승강장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존재하지 않는 열차의 차단봉을 넘어야 한다. 단, 열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릴 때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지상으로 통하는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 비친 그 문은 단순한 철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과율의 빗장으로 묶인 하나의 '계약'이었다.

진우는 계단 앞의 노란색 안전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멀리 철로 너머로부터 기차 바퀴가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가상의 열차가 플랫폼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이 귓가를 때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공포에 질려 귀를 막거나 뒤로 물러섰을 터였다. 하지만 진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발바닥이 안전선을 밟는 순간, 그의 발끝에서부터 회색빛 먼지가 피어올랐다.

[경고: 열차의 완전한 정차 전에 경계를 침범했습니다. 공간의 이치가 침입자를 도살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시끄럽군."

진우는 액정을 조작해 방금 수확한 '숨바꼭질 귀신'의 잔류 영적 파동을 시스템에 강제로 주입했다.

"해당 구역의 정차 규칙을 재정의한다. 정차의 기준은 열차의 물리적 정지가 아니라, 승객의 '인지적 멈춤'이다. 이미 이 승강장에는 귀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지적 주체는 나 하나뿐이다. 내가 멈췄다고 판단하는 순간이 바로 정차다."

[규칙 역공학 작동…….] [시스템 오류 발생. 잔존 인과율이 소유자의 정의에 따라 강제로 재구성됩니다.]

귓가를 때리던 쇠 긁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덜컹거렸다. 틈새로 지상의 희미한 매연 냄새와 차가운 바깥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공간의 이치가 그의 억지에 굴복하여 길을 열어준 것이다.

진우는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씩 올라갈 때마다 등 뒤의 유령 승강장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는 것이 느껴졌다.

계단 중간쯤 이르렀을 때, 벽면에 반쯤 깨진 채 방치된 낡은 물품보관함이 진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녹슬고 찌그러진 철제 보관함들은 마치 이빨이 빠진 해골의 주둥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다수의 보관함은 비어 있었지만, 오직 한 군데, '13번' 보관함의 문만은 굳게 닫힌 채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우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스마트폰의 '도시괴담록' 어플이 가볍게 진동했다.

[특이 유물 감지.] [수확 구역 내의 미수거 유실물입니다. 소유권이 불분명한 자산은 어플리케이션의 규정에 따라 '발견자'에게 우선 귀속됩니다.]

진우는 주저 없이 보관함의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녹슨 문이 열렸다.

안에는 먼지 쌓인 가방도, 돈다발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보관함 바닥에 오직 단 하나의 물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은 손가락 두 개 크기만 한 녹슨 구리 열쇠였다.

진우가 그것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자, 열쇠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기괴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 형상을 한 원 안에 복잡하게 얽힌 활자들…… 그것은 비화회의 인장이었다.

열쇠를 쥐는 순간, 뼛속까지 시려 오는 음산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이 열쇠 내부에서 맴돌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우는 주저 없이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손을 꼼꼼히 닦아낸 뒤, 열쇠를 코트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어플의 알림은 뜨지 않았지만,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 열쇠는 비화회의 정체와 여동생의 행방을 풀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터였다.

지상으로 통하는 마지막 출구를 밀어 열자, 젖어 든 도심의 밤거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마치 물감처럼 번져 나갔다. 진우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인도를 따라 걸었다. 밤공기는 눅눅했고, 비 내리는 도심의 소음은 유령 승강장의 침묵보다 더욱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얼마쯤 걸었을까. 가로등 불빛마저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공간의 흐름이 미묘하게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빗방울이 공중에서 아주 느리게 멈춰 서는 듯한 착각.

"첫 수확치고는 꽤나 요란하고 우아한 방식이네요, 강진우 씨……."

어둠 속에서 매혹적이면서도 가시가 돋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골목길 구석, 낡은 배전반 옆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여인에게 닿았다.

붉은 가죽 코트를 입고, 고급스러운 실크 우산을 받쳐 든 여자. 한채희였다. 그녀는 영혼 거래소 '판데모니움'의 독점 배심원이자, 이 끔찍한 오컬트 비즈니스의 중개인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뒤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기까지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진우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 귀한 고객님이 지옥의 아가리에서 첫 사냥을 성공하셨는데, 마중 정도는 당연한 예의죠."

채희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진우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구두굽 소리가 젖은 아스팔트 위로 맑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녀의 구두 밑창에는 빗물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신설동역의 '숨바꼭질 귀신'…… D등급 치고는 인과의 고리가 꽤 단단해서 웬만한 사냥꾼들도 혀를 내두르는 놈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계약의 맹점을 찔러서 산산조각 내버릴 줄은 몰랐어요. 아주 흥미로워요."

채희의 눈동자가 탐욕스러운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진우의 스마트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포획한 영혼을 판데모니움에 넘기시죠.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매입해 드릴게요. 1,500 WP 정도면 당장 필요한 영적 안정제를 사기엔 충분할 거예요."

"1,500?"

진우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손바닥에 짰다. 알코올의 냄새가 차가운 빗속으로 번져 나갔다.

"장난질이 심하군, 한채희 씨."

"장난이라니요? 시장 가격이 원래 그래요. D등급 원혼은 유통 기한도 짧고, 가공하기도 까다롭거든요."

"이 귀신은 단순한 D등급이 아니다."

진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숨바꼭질 귀신'의 세부 정보와 함께, 진우가 역공학으로 해킹해 둔 인과율의 변형 구조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녀석은 공간 구속력을 지닌 귀신이다. 특정한 입구를 봉쇄하고, 침입자의 인지 체계를 왜곡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내가 이 녀석의 계약 구조를 완전히 붕괴시키면서, 그 공간 구속력의 이치가 이 녀석의 영혼에 영구적으로 각인됐다. 즉, 이 녀석은 단순한 원혼이 아니라, 특정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제어형 자원'이다."

채희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지."

진우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압박했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코너에 몰아넣은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판데모니움에서 최근 거래된 '영역 제어형' 괴담 자원의 평균 시세는 최소 4,000 WP 선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내 해킹으로 인해 계약의 루프홀이 열려 있어, 구매자가 별도의 정화 작업 없이 즉시 부려 먹을 수 있는 최상급 가공 상태지. 이 가치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채희는 침묵했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늘 남의 불행을 구경하며 여유를 부리던 그녀였지만, 눈앞의 남자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점으로 괴담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귀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것의 구조를 분해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이라니.

"……무서운 사람이네요, 강진우 씨."

채희는 이내 생기 넘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가공된 영역 제어형 자원이라니, 확실히 탐이 나네요. 4,500 WP를 쳐 드리죠. 대신, 앞으로 수확할 자원들도 우리 판데모니움과 독점 거래하는 조건이에요. 어때요?"

"제안은 나쁘지 않군. 하지만 거래의 대가로 포인트만 받지는 않겠다."

진우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설마 돈? 귀신 부리는 인간들이 종이돈 따위에 연연하진 않을 텐데."

"정보."

진우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골목길의 바람 소리가 마치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스산하게 웅웅거렸다.

"비화회. 그들이 도심 속에서 괴담을 육성하고 수확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거점을 원한다."

채희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실크 우산을 살짝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어둠 속으로 숨기려 했다.

"비화회라니…… 그들은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미치광이 집단이에요. 공포를 경작해서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자들이라고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들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요."

"그건 내가 판단한다."

진우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찾아낸 녹슨 구리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그의 손가락 끝을 자극했다.

"거래를 하겠나, 아니면 이 자원을 다른 중개인에게 넘길까? 판데모니움의 경쟁사들이 이 가공된 자원에 얼마를 부를지 나도 궁금하군."

채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물신주의적 본능이 머릿속에서 치열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강진우라는 독보적인 '공급처'를 놓치는 것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게다가 그가 비화회와 충돌하며 만들어낼 거대한 혼란은, 그녀에게 더 큰 상업적 기회를 가져다줄 터였다.

"……정말이지, 지독한 블랙컨슈머라니까요."

채희는 한숨을 쉬며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지도를 꺼냈다. 지도 위에는 현대적인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붉은색 먹물로 기괴한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비화회는 단순히 귀신을 부리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도시의 낙후된 구역들을 연결해 일종의 '영적 물류망'을 구축해 두고 있어요. 도심 곳곳에서 모아들인 원혼과 공포의 잔재들을 가공하고 보관하는 창고가 있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신당동의 한 버려진 지하 물류 창고……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폐건물이지만, 그 지하 깊은 곳에는 비화회가 도심에서 수확한 괴담들을 일시적으로 포획해 두는 '공포의 물류창고'가 존재해요. 그곳이 그들의 첫 번째 가공 공장이에요."

진우는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먹물로 칠해진 그 물리적 공간에서 기괴한 한기가 스며 나오는 듯했다.

"그곳에 내 여동생이 있나?"

"거기까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창고를 거치지 않고선 '망각의 대성당'으로 그 어떤 자원도 운반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대성당은 그들의 최종 종착지이니까요."

진우는 지도를 건네받아 품속에 넣었다.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 판매 자원: '숨바꼭질 귀신' (D등급, 커스텀 가공) - 획득 보상: 4,500 WP 및 '비화회 물류창고 지도' - 소유자 상태: 감정 '연민(憐憫)' 4% 추가 마모.

가슴 깊은 곳에서 또 하나의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진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무감각하게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채희는 우산을 고쳐 쓰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디 살아서 다음 거래를 하러 오시길 빌게요, 강진우 씨. 당신이 파산해서 지옥의 노예가 되는 꼴은…… 꽤 나중에 보고 싶거든요."

그녀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골목길에는 오직 빗소리만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진우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향했다. 그때, 품 안의 스마트폰이 기이할 정도로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전에 없던 푸른색 경고등이 액정 화면 가장자리에서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방금 채희에게 받은 지도 정보가 어플의 레이더 화면과 동기화되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붉은색 경고 문구가 마치 피로 쓴 글씨처럼 떠올랐다.

[긴급 특이 사항 발생] [좌표: 신당동 폐물류창고 지하 2층] [상황: 오늘 밤 24:00, 비화회의 대규모 영적 자원 이송 작전(유통망 가동) 계획 감지.] [알림: 이송 대상 목록에 등록 혈연자 '강민아'의 영혼 파동 잔재 확인.]

현재 시간 23시 15분. 남은 시간은 단 45분이었다.

진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가방을 쥔 그의 손가락 끝에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도심의 이면에서, 거대한 음모의 이빨이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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