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무너져 내리는 심연의 구멍, 붕괴하는 대성당의 잔해 속에서 진우는 몸을 날렸다.

대성당 예배실 철문에 도달해 통째로 깨뜨리자, 중앙 마력 용기에 갇힌 누이 강민아의 얼굴이 고음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민아!"

그 갈라진 비명은 차가운 예배당의 대리석 바닥을 타고 진우의 발목을 적셨다. 벽면의 주물 촛대들이 일제히 검붉은 불꽃을 토해내며 격렬하게 흔들렸고, 무너지는 천장 잔해 사이로 비릿한 흙내와 비화회 특유의 썩은 주술적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공기 중에 흩날리는 재와 석회 가루가 진우의 검은 코트 깃에 내려앉았다. 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옷자락을 털어내려 했으나, 이내 허공을 메우는 기괴한 진동에 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철문 너머, 예배실의 가장 깊고 어두운 제단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리 용기가 기둥 모양으로 솟아 있었고, 그 안에 잠긴 채 허우적거리는 민아의 실루엣이 보였다. 유리 표면에는 핏빛으로 쓰인 알 수 없는 부적과 인과율의 문양들이 기분 나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군요, 강진우 씨……."

제단의 그늘 속에서 천도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사제복은 어깨 부분이 찢겨 나가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얼굴에 띤 미소는 소름 끼칠 정도로 나긋나긋했다. 그 눈동자에는 광신도 특유의 뒤틀린 희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완성된 제단입니다. 신성한 의식이 종막을 향해 달리고 있지요. 가엾은 어린 양의 영혼은 이제 곧 도심 전체를 뒤덮을 거대한 공포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천도윤의 곁으로 감사관 No.04가 기계적인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의 황금빛 가면은 깨진 틈새로 정체불명의 흐릿한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No.04가 품속에서 금색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시계의 초침은 째깍,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으나, 그 속도는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보다 기묘할 정도로 빨랐다. 정각보다 항상 4분 빠르게 움직이는 그 기괴한 유물은, 주변의 모든 인과와 괴담의 살해 주기를 억지로 앞당기며 대성당의 의식 속도를 가속하고 있었다.

"현재 정산 기한까지 남은 시간…… 소급 적용 시 3분 40초."

No.04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차가웠다.

"규칙은 절대적이다. 시간이 모두 흐르고 나면, 너의 영혼은 지옥 장부의 정산 대장에 기입되어 영구히 압류될 것이다. 방해물은 제거된다……."

천도윤이 그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의 손가락이 감사관의 시계 태엽 헤드를 강제로 쥐고 돌리자, 시계 내부에서 톱니바퀴들이 비명을 지르며 맞물리는 소리가 예배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끼이이익……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예배실 사방의 벽면에서 거무죽죽한 손들이 튀어나와 허공을 긁어댔고, 민아가 갇힌 유리 용기 주변의 차원 장벽이 무서운 속도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용기 속의 산소가 희박해지는지, 민아의 작은 손가락이 유리벽을 긁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만둬……!"

뒤늦게 예배실 안으로 뛰어든 유지혁이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저 시계의 주파수가 성당의 결계와 완벽히 동기화되었어! 이대로 두면 의식이 3분 안에 끝나고, 이 구역 전체가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다! 규칙을 되돌려야 해!"

한채희 역시 입술을 깨물며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진우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진우는 천천히 코트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투명한 용기 안에서 찰랑이는 무색의 액체. 손소독제였다. 그는 뚜껑을 열고 손바닥에 젤을 듬뿍 짰다.

스윽, 스윽…….

차가운 알코올 향이 예배당의 불쾌한 피비린내와 주술적 악취를 일시적으로 지워버렸다. 진우는 젖은 손을 싹싹 비비며, 눈앞의 거대한 파멸의 시나리오를 마치 지저분한 얼룩을 대하듯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규칙이라……."

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너희들은 참으로 멍청하군. 룰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이, 정작 자신들이 만든 계약서의 조항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벌레 같은 채무자 놈이……."

No.04의 가면 사이로 붉은 안개가 격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진우는 왼쪽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이미 '도시괴담록' 어플의 깊숙한 서브 메뉴가 켜져 있었다. 스크롤을 무수히 내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경로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극소형 폰트의 이용약관 최하단 페이지였다.

"이용약관 제214조 부칙 제12항."

진우가 스마트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제3자의 귀속 소속 영혼은 양도 시 우선 면책권이 부여된다.’ 그리고…… 지옥 금융 위원회 표준 금융 거래법 제89조를 인용하지."

진우는 다른 한 손으로 품속에서 낡고 녹슨 구리 열쇠를 꺼냈다. 예전 지하철 신설동역 물품보관함 깊숙한 구석에서 발견했던,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였던 잡동사니 전리품이었다.

하지만 그 열쇠가 진우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그랜드 디스토피아 호텔의 숨겨진 13층 물리 공간 전체가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열쇠의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이 붉은 빛을 발하며, 예배실 바닥의 대리석 틈새에 숨겨진 차원의 자물쇠 구멍과 공명하고 있었다.

"이 녹슨 열쇠는 이 공간의 차원적 소유권을 증명하는 마스터키다. 즉, 내가 이 열쇠를 사용하는 순간, 이 13층 예배당은 정식으로 내 소유권 하의 '영토'로 편입된다."

진우가 구리 열쇠를 공중에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 쥐며, 바닥의 보이지 않는 균열 속으로 사정없이 꽂아 넣었다.

철컥!

묵직한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예배당 전체를 감싸고 있던 비화회의 어둠이 찰나의 순간 걷히며 '도시괴담록'의 시스템 인터페이스 영역으로 강제 치환되었다. 사방의 허공에 푸르스름한 격자무늬의 홀로그램 선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이곳은 공식적인 거래소이자 내 자산이다."

진우가 No.04를 똑바로 응시했다.

"감사관 No.04. 네가 소지한 금색 회중시계는 정각보다 항상 4분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 괴담의 살해 주기를 앞당기지. 그리고 지금, 너는 그 왜곡된 시간을 이용해 나의 정산 기한을 강제로 4분 단축하려 했다."

"계약은 계약이다. 시간의 흐름은 내가 관장한다……."

"아니, 관장하지 못해."

진우가 선언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을 인위적으로 가속해 채무자의 상환 기간을 강제로 박탈하는 행위는, 명백한 '기한 미도래 채권에 대한 법적 청구 사기'다. 채무자가 기한 전에 조기 상환할 권리나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유예 기간을 시스템적 편법으로 박탈한 것이니까."

진우는 스마트폰 화면의 '감사 위원회 제소'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이에 본 사용자는 도시괴담록 감사 위원회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며, 감사관 No.04의 권한 남용 및 계약 사기 혐의에 대한 긴급 감사를 청구한다. 감사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의 모든 자산과 유물의 기능은 일시 정지되어야 마땅하다!"

그 순간, 예배실 천장 허공에서 천둥 같은 시스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경보! 소송 및 제소 접수 완료.] [피제소자: 감사관 No.04] [혐의 내용: 기한 미도래 채권에 대한 임의적 강제 집행 및 시간 왜곡 사기.] [도시괴담록 감사 위원회 긴급 소집 심의 개시……] [판정: 혐의의 개연성이 충분하므로, 심의 완료 시까지 피제소자의 유물 '금색 회중시계'의 작동을 강제 정지합니다.]

"……뭐라?!"

No.04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가 쥐고 있던 금색 회중시계의 유리가 쩌적 갈라졌다.

시계 내부에서 붉은빛의 에러 코드가 불꽃처럼 튀어 올랐고, 미친 듯이 회전하던 시계 바늘이 뚝 멈춰 섰다. 째깍거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자, 예배당을 옥죄던 차원의 강제 수축 역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듯 정지했다.

"이…… 이 교활한 벌레 같은 놈이…… 감히 지옥의 법률을 해킹하다니!"

No.04가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그의 황금 가면 틈새로 검은 진액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천도윤 역시 미소를 잃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지옥의 계약서를…… 한낱 종이 조각처럼 주무르는군요. 강진우 씨, 당신은 정말로…… 악마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칭찬으로 듣지."

진우는 차갑게 읊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시선은 정지된 마력 용기 속의 민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우는 주머니에서 비화회 조직원이 떨어뜨렸던 자그마한 물건을 꺼냈다. 라일락 향수병이었다. 여동생 민아가 납치당할 당시 지니고 있었던, 그녀의 체취와 영혼의 파동이 고스란히 각인된 마지막 유품.

진우가 향수병의 노즐을 강하게 눌렀다.

치익-.

맑고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비릿한 피비린내를 뚫고 예배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향기가 허공에 닿자, 장벽의 표면에 서려 있던 민아의 영혼 잔재들이 마치 주인을 찾은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며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벽의 가장 취약한 결절점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지혁아! 채희 씨! 지금이야!"

진우의 외침에 유지혁이 검을 고쳐 쥐고 제단 아래의 수호 귀신들을 막아섰고, 한채희는 품에서 주술용 부적들을 꺼내 천도윤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진우는 오른손에 쥔 녹슨 구리 열쇠를 거꾸로 쥐고, 라일락 향기가 모여든 장벽의 결절점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유리창이 통째로 박살 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민아를 가두고 있던 거대한 차원 장벽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파편들이 은빛 가루가 되어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갔다.

진우는 무너지는 잔해 속으로 몸을 던져, 용기 안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민아의 가냘픈 몸을 양팔로 받아 안았다.

"……민아."

품에 안긴 여동생의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고, 또 차가웠다.

그 순간, 진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플을 사용하고 괴담을 부릴 때마다, 그의 소중한 기억과 따뜻한 감정들이 영구히 소멸해 가던 그 지독한 마모의 과정들……. 타인의 비극을 보아도,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던 심각한 무감각증의 벽이, 여동생의 희미한 숨결이 뺨에 닿는 순간 쩌적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심장 깊은 곳에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눈 녹듯 흐려지기 시작했다.

평생 눈물 흘려본 적 없던, 얼음과도 같던 강진우의 오른쪽 눈 끝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민아의 뺨 위로 툭 떨어져,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적셨다.

"오…… 빠……?"

민아가 아주 미세하게 눈을 뜨며 목소리를 냈다.

"그래, 나야.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진우는 민아를 등에 업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갑고 냉혹한 지략가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제단 뒤편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음에 진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우흐…… 우후후……."

천도윤이 바닥에 엎드린 채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 관절들이 제멋대로 뒤틀리며 가죽이 찢어지고 있었다. 그 옆에서 No.04 역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계약을 파기하고…… 우리를 파산 상태로 몰고 가다니……."

No.04의 목소리가 천도윤의 목소리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정식적인 절차 따위는 필요 없다. 지옥의 심연을 직접 이 땅에 소환하여…… 모든 것을 통째로 삼켜내리라……."

두 존재의 몸이 시커먼 진액과 붉은 마력의 덩어리로 변하며 서로를 집어삼키듯 얽히기 시작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녹아내려 하나로 합쳐지는 끔찍한 소리가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영적 주파수가 완벽히 하나로 동조되는 순간, 예배실 중앙의 바닥이 거대하게 갈라지며 그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형태의 거대한 지옥 괴수였다. 무수한 눈과 이빨이 돋아난 검은 형체가 포효를 내지르며 진우를 향해 거대한 앞발을 뻗어왔다.

종말의 의식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잔혹하고 물리적인 파멸의 형태로 진우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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